중국
분류

1910년대 북간도 사립 학교의 체육 대회, 조선인들의 잔칫날

한자 1910年代 北間島 私立 學校의 體育 大會, 朝鮮人들의 잔칫날
중문 20世纪10年代北间岛私立学校运动会朝鲜人的节日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놀이|체육 대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2년 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2년 8월 16일[음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5월 20일-21일
최초 설립지 길림성 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지신향 명동촌
개설

북간도 지역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자 민족 교육 기관의 효시는 1906년 용정(龍井)에 설립된 서전 서숙(瑞甸書塾)이다. 서전 서숙의 개숙을 계기로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북간도에 애국 계몽 사상을 바탕으로한 민족 의식을 심어놓았다.

서전 서숙 이후 북간도에는 수많은 사립 학교들이 설립되어 1910년대는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이 그야말로 성황을 이룬 시기이다. 이러한 사립 학교들은 반일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주된 교육 목표로 하였다.

사립 학교의 체조과

사립 학교들의 반일 의식과 민족 의식 고취 방법은 다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체조과(體操課)의 운영은 비교적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운동이 사람을 즐겁게 하고 정신력을 키워주며 감정을 북돋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북간도에서 사립 학교를 통해 반일 민족 인재를 양성했던 애국 지사들은 체조과를 통해 학생들의 신체 단련을 도모하고 이와 동시에 학생들의 지구력과 완강한 의지력을 키우고자 했다. 이에 체조과를 주요 교과목으로 간주하고 각 학교마다 설치하려 했다. 당시 체조과의 내용 중에는 병식 체조(兵式體操)와 군사 훈련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체조과에서 체육과로

사립 학교들의 교육 과정이 점차 근대 교육 과정으로 개편되면서 체조과도 '체육과'로 이름을 고쳤다. 이와 함께 육상이나 구기 운동이 발전되었고 각 학교에서는 자체 운동팀이나 대표팀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운동 경기의 활성화로 인해 운동 관련 기초 시설들이 개선되기도 했다.

1908년 설립된 화룡현(和龍縣) 사립 명동 서숙(明東書塾)[화룡현 대립자(大笠子), 현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에서는 김약연(金躍淵) 교장과 조선에서 온 체육 교사의 지도하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각 급 학교에서 모두 체육 교사를 특별히 배정하기도 했다. 동신 학교(東新學校), 양정 학당(養正學堂), 영신 중학교(永新中學校), 영성 학교(英成學校) 등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체육 교사를 배정하였다.

체육 대회와 각종 경기

1910년대 북간도의 사립 학교들은 사실 반일 투쟁을 위한 근거지였다. 학생들의 반일 의식과 의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학교 운동회와 각종 시합을 적극적으로 개최하였다.

1908년 설립된 연길현(連吉縣) 와룡동(臥龍洞) 사립 창동 서숙(昌東書塾)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박문호 선생님께서 축구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런가 하면 화룡현 대립자 명동촌의 명동학교와 지신향(智新鄕)장동촌(長洞村)장동 학교는 매년 봄, 가을로 학교 간 축구 시합을 조직하곤 하였다.

1912년 봄 용정 동남쪽 5㎞ 지점에 있는 대교동(大敎洞)에서 제1기 간도 학생 운동회가 열렸다. 명동학교만 해도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모였고 수천 명의 사생들과 민중들이 애국가를 높이 불렀다.

1913년 단오절에는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립 학교들이 용정 인근의 합성우(合成佑)에 모여 운동회를 열었다. 1914년 국자가[局子街, 지금의 연길시]에서 또 한번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50여 개소의 사립 학교들이 모여 연합 운동회를 열었다. 사생과 민중들은 함께 광복가, 응원가, 운동가를 높이 불렀다.

그 해 여름 혼춘에서도 육상 경기를 개최하였다. 이 운동회는 반일 애국 투쟁의 열기를 드높인 운동회로 알려졌다. 1916년 단오절에는 용정 수신촌[樹新村: 현재의 화룡시 두도향 동고성촌] 학교에서 축구, 그네, 널뛰기, 씨름 등의 시합을 하였다. 그리고 애국 지사들은 대형 운동회를 이용해 반일 활동을 적극 홍보하였다.

혼춘 일대에서는 대황구(大荒沟) 지역이 축구로 유명했다. 1917년 고경(高京) 선생이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가죽 축구공을 가져왔는데, 이후 남구(南區) 학교와 경신(慶新) 학교 간에 축구 시합이 빈번히 열렸다. 때로는 육상 경기와 함께 씨름, 그네, 널뛰기 등 민속 운동 종목도 추가하여 종합 운동 대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사립 학교의 운동회는 1921년부터 연속 3년간 진행되었다. 경신년 대토벌이 일어난 뒤 첫 번째 운동회는 대립자에서 진행되었고 제2, 제3기는 팔도하자(八道河子)에서 진행하였다.

1923년 5월 20일부터 21일 사이에는 간도 7개소의 사립 학교, 즉 해성(海星), 동흥(東興), 대성(大成), 명동, 구산(邱山), 은진(恩眞), 영신 등의 학교에서 조직한 축구 대회가 용정에서 열렸다. 1923년 중추절에는 남양평(南陽坪)에서 운동회를 조직하였다. 운동회의 최종 항목은 왕왕 장거리 달리기를 배정하였다. 창동 학교(昌東學校) 설립 초기 노상렬(盧相烈) 선생은 축구 운동을 장동(長洞) 일대에 보급시켰다.

사립 학교 연합 운동회

북간도 사립 학교들의 운동회는 학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직하는 경우도 있고 학교간의 우정을 나누는 연합 운동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역적인 연합 운동회의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사립 학교들의 연합 운동회는 그 시합 종목이 간단하고 쉬워 대중성을 띠고 있으며, 오락성도 더해 사람들의 관심을 절대적으로 모을 수 있었다.

1912년 음력 8월 16일에 북간도 대불동(大佛洞)에서 조선인 추기 연합 운동회가 거행되었다. 당시 20여 학교가 모였는데 참여 학생이 육백여 명이었으며 구경꾼 수가 수백여 명이 되어 성대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 광경이 당시 관중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권업 신문(勸業新聞)』은 전했다.

『권업 신문』은 또한 그 운동회에서 진행한 운동 종목을 일일이 밝히기도 하였다. 다음은 당시 운동회의 전반적인 절차와 경기 항목이다. 어떤 경기인지 일부는 알아볼 수 있지만, 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탓에 일부는 앞으로 고증이 필요하다.

1. 집합 경례 2. 취지 설명 3. 창 가 4. 포대 공격 5. 창 가 6. 도보 경주 7. 목각 경주 8. 기마 경주 9. 맹00국 10. 송구 경쟁 11. 탈환 경쟁 12. 휴식 13. 체조 14. 이어0록 15. 명고 경쟁 16. 수구송 경쟁 17. 집장 고도 18. 양인 삼각 19. 부인 경중 20. 등고 품이 21. 모험 경주 22. 00경주 23. 한신 경주 24. 탈모 경쟁 25. 기차 경주 26. 0번 경주 27. 00 경주 28. 혼혈 등지

당시 운동회는 대개 일년 중 두 번 열렸는데, 춘기 운동회는 단오절을 전후로, 추기 운동회는 추석을 전후로 진행되었다.

단오절 연합 운동회에 대한 언론 보도

1913년 단오절 연합 운동회 역시 성대하게 치러졌다. 운동회의 조직은 매우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각 신문에서는 사전 공지를 철저히 하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 『권업 신문』이 매우 주도 면밀히 보도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오절 아침부터 북간도의 대교동(大敎洞)은 운동회로 매우 떠들썩 하였다. 32개소의 중소 학교에서 이곳에 모여와 운동회를 거행하기로 한 것이다. 27개소의 남학교에서 900명, 5개소의 여학교에서 150여 명으로 총 1천여 명의 학생들과 1만여 명의 구경꾼들이 모였다. 운동회는 그야말로 성대했다. 당시 대교동에서 진행한 운동종목은 포대 공격, 대모 경주, 계주 경주, 등교 준비, 양인 삼(三)각, 계산 경주, 광도[히로시마], 기마도, 집장 고도, 모험 경주 등이었다.

운동회는 이튿날 용정으로 옮겨 계속되었다. 이날은 구경꾼이 더 많아져 만 오천 명에 달했고 운동 종목은 탈환 경주, 명고 경주, 기마 탈모, 군함 경주 등 여러 가지로 진행되었다. 그 장면이 매우 굉장하여 박수 갈채가 운동장을 들썩이게 하는 가운데서 운동회를 마쳤다. 그 가운데 학생들은 의복을 모두 정제하고 규율을 정제하여 이목을 끌었을 뿐 만 아니라 그 기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또한 중국인들도 은으로 만든 상패를 기부하기도 하고, 중국 고등 관리가 학생들의 인내와 모험하는 기상과 사상이 장래 어떠한 사업이든 성취할 것이란 찬사와 의뢰 사상을 버리고 독립 정신을 가지라는 격렬한 연설을 하는 등 매우 이색적이고 의미가 있는 운동회였다.

이번 운동회에서는 남학생 최우등은 와룡동 창동 학원 학생들이 차지했고, 여학교 최우등은 명동 여학교에서 차지하였다. 운동회의 미열은 매우 거창했는데 학생들이 운동회를 마치고 용정촌을 지날 때 조선인 상인들은 집집마다 예포(禮砲)를 터뜨리면서 환영하였다고 한다.”

이 운동회를 『국민보(國民報)』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삽십(三十)여 학교가 연합 운동하여 무진 성황을 이뤘고 중국 관리가 연설과 상패로써 무한한 동정을 표함. 우리의 눈을 원동으로 바라며 우리의 귀를 원동으로 기울여 날로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때로 깊은 애정을 주더니, 이제 북간도 통신을 거하건대 금년 칠월(七月) 초순에 남녀 학교 삽십이(三十二) 처가 합동하여 대운동회를 실행하였는데, 구백(九百)여 명의 남학생과 이백(二百)여 명의 여학생이 한 마당에 모여서 쾌활하고 민첩한 재주를 각각 자랑할 때 관광하는 사람이 만명 이상에 달하여 처음 보는 장관을 나타내었더라.

이 때에 우리 한인들만 즐거워할 뿐 아니라 중국 고등 관리들이 또한 참석하여 같이 즐거워하였으니 그 중에 저명한 이는 연길부 지후 관운종과 순경 국장 초도링 양씨라. 각각 쾌활한 언론으로 일반 학생을 권면하니 그 문제는 의뢰 사상을 버리고 독립 정신을 배양할 것과 인내심과 모험력으로 장래의 한시 업을 성취하라 하였더라.

이틀을 계속하여 운동의 유희를 마치고 우등생에게 상품을 분급할 때 우리 동포들이 교육계를 위하여 삼백(三百)여 원을 들여 학생의 정신을 고무시키고, 중국 관청에서는 은으로 제조한 상패로써 권장하여 무한한 애정을 주었다 함.”

간민회 주최 추기 운동회

곧이어 추기 운동회가 다시 조직되었다. 이 운동회는 간민회(墾民會)에서 조직되었다. 초반 계획에 따르면 추석날인 음력 8월 15일에 국자가에서 진행하고자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운동회의 경비로 대략 300원의 예산이 잡혔고 사립 학교의 연합을 넘어서 북간도중국 각 관립 학교도 동참시켰다는 점이다.

운동회는 중국 관청과 협의한 결과 본래의 계획보다는 다소 늦은 10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거행되었다. 사립 학교로는 남녀 학교를 모두 합해 30여 학교가 참여하였는데 학생은 총 900여 명이었다. 중국 관립 학교는 6개소에서 500여 명이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인 사립 학교 가운데서 최우승은 광성 학교(光成學校), 관립 학교 가운데 최우승은 간민 모범 학당(墾民模範學堂)이었다.

경기가 매우 이채롭고 흥미진진하여 일반인들의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운동회가 열린 이틀 동안은 날씨도 좋아서 운동회에 참석한 조선인과 중국인 관중들이 매일 오천을 넘었다고 한다. 운동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중국 관찰부에서 제반 비용을 전담하였는데 1천 원 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단오절 연합 운동회

이듬해인 1914년 단오절에도 어김없이 연합 운동회가 열렸다. 이번에도 북간도 국자가에서 진행되었는데, 당시 참가 규모는 앞서보다 크지는 않았다. 연길현 내에 있었던 11개소의 학생 600여 명과 구경꾼 4천여 명이 모여서 규모는 조금 작았지만 성대한 운동회를 거행하였다. 당시 최우승은 와룡동창동 학원에서 거머쥐었다. 그런가하면 평강기성장에서도 6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운동회를 열었는데 구경꾼이 4, 5천에 달해 국자가 운동회 이상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당해의 운동회는 전처럼 북간도 사립 학교 전체의 연합 운동회는 아니었고 두 구역에서 지역적으로 진행한 운동회였다. 하지만 이 역시 파장이 매우 컸다.

사립 학교 연합 운동회의 영향과 의미 및 평가

북간도 사립 학교들의 연합 운동회는 간민회의 해체, 신구 사상 계열의 모순과 갈등, 중일간의 모순 첨예 및 경신년 대토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191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잠시 저조하였다.

하지만 그 영향은 1920년대 사립 학교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연합 운동회를 조직하도록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간도 조선인 사립 학교들의 연합 운동회는 점차 규범화되어서 학교들이 정규화, 규범화의 길을 모색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북간도 조선인 사립 학교의 연합 운동회는 단순히 운동회라는 활동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북간도 조선인들의 반일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항쟁을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활동이었다. 중국 관립 학교들과의 연합 운동회를 열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 관원들과의 교류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북간도 조선인 사립 학교들의 연합 운동회는 학생들의 운동회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현지의 조선인 관중들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북간도 조선인들의 단합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북간도 조선인 사립 학교들의 연합 운동회를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김경식, 『재중한민족교육전개사』 상(문음사, 2004)
  • 중국 조선족 교육사 편찬 위원회, 『중국 조선족 교육사』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교육사』민족 출판사, 1997
  • 동북 조선 민족 교육 과학 연구소, 편 『중국 조선족 교육지』,동북 조선 민족 교육 과학 출판사, 1998
  • 허청선·강영덕,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1』(연변교육출판사, 2002)
  • 허청선·강영덕, 『중국 조선족 교육사』(연변교육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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