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속의 요동, 전략적인 요충지

한자 韓國史 속의 遼東, 戰略的인 要衝地
중문 韩国史中的辽东,战略的要塞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상세정보
성격 지명|고지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기원전 3세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245년(동천왕 19)
특기 사항 시기/일시 31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342년(고국원왕 12)
특기 사항 시기/일시 91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92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1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34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6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8년(우왕 14)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6년(광해군 8)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3년(인조 1)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8년
정의

한국사와 관련된 요동 지역의 통사.

요동의 범주

요동(遼東)은 현재 중국의 영토이지만, 선사 시대부터 근대까지 한민족의 역사, 문화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었다. 요동은 중국의 입장에서 요하(遼河)의 동쪽을 지칭하고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 요동성(遼東城)을 지칭하거나 넓게는 산해관 동쪽에서 한반도 북부의 서쪽에 이르는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요동은 요하 동쪽에 위치한 요동 반도 일대를 지칭했다. 고구려 멸망 후 중국은 당대(唐代) 이후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광의의 의미에서 '요동'이라는 명칭을 썼다.

요하의 길이는 1,390㎞, 유역 면적은 21만 5,000㎢에 이른다. 주요 지류는 심양시(瀋陽市)를 지나는 혼하(渾河), 요양시(遼陽市)를 흐르는 태자하(太子河), 그리고 신민시(新民市)를 흐르는 유하(柳河) 등이 있다.

요하를 아우르는 지역을 요동이라고 할 때, 그 동쪽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압록강송화강(松花江)의 상류 지방인 장백산(長白山) 일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요동 지역은 지금의 중국요령성(遼寧省) 철령시(鐵嶺市)·무순시(撫順市)·본계시(本溪市)·단동시(丹東市)·대련시(大連市)·영구시(營口市)·안산시(鞍山市)·요양시·심양시 등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요동

최근 중국의 황하 문명과 별개로 홍산 문화(紅山文化)를 이은 요하 문명(遼河文明)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요서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과 다뉴경(多紐鏡)이 출토되고, 요동과 길림 동남부의 100여 곳에서 지석묘(支石墓) 유적이 확인되면서 이 지역의 청동기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고조선이 요하 문명의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밝히는 연구들이 늘고 있다.

요서 지역 청동기 문화는 하가점(夏家店) 하층 문화[B.C.24∼15C]에서 시작하여, 요령성 영성현(寧城縣) 남산근(南山根) 유적으로 대표되는 하가점 상층 문화[B.C.14∼7C], 조양시(朝陽市)의 위영자(魏營子) 문화[B.C.14∼서주 중기], 능하(凌河) 문화[B.C.10∼4C]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능하 문화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이나 청동기들은 요령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서 출토된 고조선 유물들과 매우 비슷해 동일한 문화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비파형 동검 문화는 요하를 경계로 요서 지역 청동기 문화와 대릉하(大凌河) 동쪽에서 요동 지역에 분포하는 청동기 문화가 특징적인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요서 지역과 요동 지역의 주민 집단을 구분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기원전 3∼2세기경 요동에서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는 지역에는 세형 동검(細形銅劍)과 거푸집을 이용해 만든 쇠도끼 등 초기 철기 문화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늦어도 기원전 3세기 말에는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석묘(積石墓)를 축조하면서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전통을 수립하였다고 추정된다. 고조선이 요서 지역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해서 등장했으며, 한반도 문명과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이해되고 있다.

고조선과 요동

선진 시대 이래 요하 동쪽에서는 모두 예맥족(濊貊族)이라는 동일 계통의 주민 집단이 전체적으로 비파형 동검 문화권 내에서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성장한 정치체가 바로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초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의 공격을 받아 2천여 리의 영토를 잃고, 만반한(滿潘汗)을 경계선으로 정하였다. 연은 정복한 지역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개 군을 설치하였으며, 요동에까지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

요동군은 중국 왕조의 동북방 진출 기지였을 뿐 만 아니라 고조선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던 군현이었다. 연(燕)을 이어 진(秦)·한(漢)이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조선을 압박하였다. 한(漢)의 사신으로 위만 조선에 왔던 섭하(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조선의 장수를 살해했는데, 얼마 후 그가 요동군의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부임하자 조선은 섭하를 기습 살해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위만 조선은 한 무제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위만조선의 멸망 후 한(漢)은 요동 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현도군은 고구려의 성장과 그에 따른 압박으로 인해 치소를 옮겨야 했다. 404년(광개토왕 14) 이전, 요동군과 함께 완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소멸될 때까지 요령성 흥경(興京)·노성(老城) 방면[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 무순(撫順) 지방으로 두 차례 이전되었다.

고구려와 요동

고구려는 주어진 환경의 열악함과 경제적 기반의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중국의 여러 왕조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요동 지역은 고구려와 중국 왕조와의 주요 쟁패지가 되었다.

고구려 건국 초기의 도읍지는 요동 지역 내의 졸본(卒本)이었다. 지금의 요령성 본계시 환인(桓仁) 북쪽에 있는 오녀 산성(五女山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후 졸본에 시조 주몽(朱蒙)의 사당을 세웠는데, 평양 천도 후에도 고구려 왕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곤 하였다.

고구려의 무리한 요동 진출은 중국을 자극해 도성이 함락되는 일이 두 차례 있었다. 245년(동천왕 19) 위(魏)관구검(毌丘儉)에 의해 환도성[丸都城 ; 길림시 통화시집안]이 함락되어 국가의 존망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 뒤 고구려는 서진(西晉)이 몰락하자,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313년과 314년에 각각 이를 병탄하고 요동평야로 진출하였다. 이에 그 지배권을 둘러싸고 선비족 모용씨(慕容氏) 등과 각축을 벌였다. 342년(고국원왕 12) 전연(前燕)모용황(慕容皝)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4세기 후반 광개토왕(廣開土王)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개혁 정치를 기반으로 하여 대외 진출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거란(契丹) 부족을 공략하고, 요동 평야를 둘러싼 쟁패전에서 모용씨의 후연(後燕)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5∼6세기는 중국 내 5호 16국 시대가 도래하여 요동 지역은 비교적 소강 상태를 유지하였다. 430년대에 들어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북위(北魏)가 북연(北燕)을 압박하니, 북연 황제 풍발(馮跋)이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436년(장수왕 24)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 현 朝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고구려군이 먼저 성에 들어가 북연 황제와 그 주민을 몰아 동으로 돌아왔다. 520년대에 북위의 내분을 틈타 고구려군이 용성 지역에 진주하여 그 지역민을 고구려로 이주시켰다. 평원왕(재위 559∼590) 때 북주(北周)무제(武帝)가 요동을 침입했을 때 온달 장군이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을 격퇴하였다.

요동 지역을 장악한 고구려의 중요 거점 성은 요동성[遼東城 : 요령성 요양]이었다. 612년과 613년 수(隋)의 1·2차 침입 때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645년 당(唐)태종의 침입 때, 10여 일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그 때 포로 병사가 약 1만 명, 남녀 백성의 수가 4만 명, 양곡이 50만석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요동성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요동 방면에서는 가장 북쪽의 신성(新城), 남쪽의 안시성(安市城), 건안성(建安城)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楊萬春)의 지휘력에 당의 대군은 패배하고 철수해야 했다.

668년 당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군대 2만 명을 주둔시켰다. 이어 고구려인 2만 8,200호를 당의 서부와 남부 변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러한 당의 억압에 반대해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신라의 지원을 받아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무렵 요동 지역에서의 부흥 운동군의 중심지는 안시성이었다. 671년 7월,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되고, 672년 12월 백수산(白水山) 전투와 673년 5월 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 밀리면서 요동 지역에서의 부흥 운동은 약화되었다.

요동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 요동 도독의 지배를 받았다. 677년에는 요동 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임명된 보장왕(寶藏王)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당(反唐) 정책을 추진하자, 681년 보장왕은 공주(邛州)로 유배되고 그 유민들은 다시 하남도(河南道)와 농우도(隴右道) 방면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로써 요동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 운동은 막을 내렸으나, 이는 발해 건국과 같이 새로운 방향으로 추진되어 갔다.

발해와 요동

고구려 멸망 후 당(唐)의 영주[營州 : 요령성 朝陽]에 끌려와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은 당이 혼란을 틈을 타 대조영(大祚榮)의 지휘 아래 구국[舊國 : 지금의 길림성 돈화]에 ‘진국[震國 : 뒤에 渤海로 개칭]’을 세웠다. 이후 926년 거란에게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발해는 지방 5천 리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였다. 제2대 무왕 때 현재의 요령성 관전(寬甸)·신빈(新賓)·청원(淸源)을 잇는 선에서 당(唐)과 접경하고 있었다. 요동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획은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대략 압록부·장령부·부여부 등 3부로 편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상경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928년에는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기고 발해 유민들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려광종(光宗) 때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웠으나 986년 거란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로부터 발해 유민은 금(金) 초기까지 요동 지역에 자취를 남기다가 서서히 중국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고려 시대의 요동

926년(태조 9), 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 일원을 차지하였던 발해가 거란족에 의하여 멸망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강역에서 요동을 포함한 만주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발해는 망하니 요동 지역은 거란에 흡수되었다. 거란이 옛 요동성을 수축하고 거주하면서 동평(東平)이라고 부르더니, 얼마 뒤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키고 또 동경(東京)으로 고쳤다.

고려는 다른 왕조와 비교해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홍건적, 왜구 등 여러 이민족과 오랜 기간 전쟁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이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거란은 서요하(西遼河) 상류, 곧 지금의 내몽고자치구에 있는 시라무렌강 인근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종족이었다.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하고, 상경 임황부[上京 臨潢府 ; 현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 바린쭤치(巴林左旗)]를 수도로 요(遼)를 세웠다. 요는 중원 대륙으로의 진출에 앞서 그 배후로 의심하고 있는 고려를 공격하였다. 요와 36년간 세 차례의 싸움에서 사로잡힌 고려 전쟁 포로들은 동몽고인 지금의 열하성(熱河省)으로 옮겨져 집단 생활을 하였다. 요의 지방 행정 구역인 고주 삼한현(高州三韓縣)은 바로 이들로써 구성된 현이었다.

12세기 초 숙종(肅宗)과 예종(睿宗) 대에 윤관(尹瓘)의 별무반(別武班) 조직과 여진 정벌이 추진되었으나, 큰 전쟁은 없었다.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동북여진(東北女眞)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일해 금(金)을 세우고, 요(遼)를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발해상경에 도읍을 설치하였다. 이때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나아가 군신 관계를 체결하는 조건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민족적 자존심에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1234년(고종 21) 금이 몽고에 의해 멸망되자, 요동 지역은 원(元)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초기에 금은 요양 등처행 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을 두고, 주변 여러 지역을 관리토록 하였다. 고려는 원과 대략 40여 년간 싸웠는데, 긴 기간 만큼이나 고려인들의 희생은 물론 초조 대장경 및 황룡사 9층 목탑 등 문화재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1254년(고종 41)에 포로로 끌려간 고려인은 약 20만 7,000명이었으며, 사망자는 더 많았다고 한다. 원과의 전쟁에서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와 동생을 20년 만에야 찾은 김천(金遷)의 이야기는 당시 포로가 된 고려인의 비참한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릉에 살고 있던 김천은 어머니와 동생 김덕린(金德麟)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 지역 북주[北州 ; 遼陽] 천로채(天老寨)로 건너가 은 55냥과 86량의 몸값을 치르고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왔다.

원은 고려인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해 안무 고려군민 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하였다. 요양과 심주(瀋州)에 각각 고려인으로서 책임자를 임명하여 고려인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1296년(충렬왕 22) 둘을 합쳐 심양 등로 안무 고려 군민 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 혹은 심왕]으로 삼아 이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충선왕이 1313년(충선왕 5)에 고려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1316년[충숙왕 3]에는 심왕위를 조카인 왕고(王暠)에게 각각 양위함으로써 이들 간의 갈등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심양왕(瀋陽王)은 고려 국왕보다 서열이 높았으나, 고려 국왕이 되려고 하는 과정에서 고려 국왕과 대립하였던 것이다.

요령성 요양, 심주[심양] 지역에는 그만큼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삶과 문화는 이후에도 요동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다. 당시 고려인들이 먹었던 떡으로 인절미와 같은 고려병(高麗餠)이 있었다. 1803년(순조 3) 음력 10월 21일, 동지사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의하면, 청인(淸人)들이 파는 고려병은 요양 고려보(高麗堡)라는 곳의 인기 식품이었다고 적어놓았다.

원·명 교체기인 공민왕 대에 원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한족(漢族)들의 봉기를 홍건적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 일부가 고려를 공격해 왔다. 2차에 걸친 전쟁으로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다. 이들과의 전투는 주로 국내의 북쪽 지역에서 치러졌는데, 그들의 공격로는 요동을 경유하였음은 물론이었다.

1368년 명(明)이 들어서고 다시 요동 지역을 놓고 대립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遼東征伐)이 추진되었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했는데, 고려가 이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왕과 최영(崔瑩)철령위의 배후 세력인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14만 대군을 징발하여 출정시켰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압록강 유역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요동

조선 시대의 요동 지역은 명(明)과 그 뒤를 이어 청(淸)이 장악하였다. 명은 요동 도사(遼東都司)를 두어 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청은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으로 삼고, 봉천부(奉天府) 건주(建州)를 두어 흥경(興京)으로 삼아 이 지역을 다스렸다. 1644년 청은 도읍을 심양에서 북경[北京, 혹은 燕京]으로 옮겼으나, 초기 수도가 흥경과 성경이었던 만큼 요동 지역을 매우 중시하였다.

조선 시대의 요동 지역은 사신로(使臣路)와 침략로로서 주목할 수 있다. 사신로 또는 연행로는 평양·의주·압록강·봉황성(鳳凰城)·연산관(連山關)·요양(遼陽)·심양(瀋陽)·광녕(廣寧)·사하(沙河)·산해관(山海關)·통주(通州)·북경(北京)으로, 총 3,100리의 거리며 40일의 여정이었다.

조공 이외에 사신에게 공인된 사무역이 행해졌고, 또 국경에는 호시(互市)가 시작되어 관허 무역인 개시(開市)와 밀무역인 후시(後市)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왕래가 빈번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요동 지역은 조선인의 아픔과 상처를 남긴 지역이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 요동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 조선인들의 실태에 대해 몇 가지 기록이 전한다.

『세조 실록』 1464년(세조 10) 8월 1일자 기록에 양성지(梁誠之)가 『요동지(遼東志)』를 인용하여,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과 관련한 노역과 징발로 인해 평안도 사람은 파산하거나 그것을 피해 요동으로 건너간다고 하면서, “동녕위[현 요양시 태자하]의 고려인은 명홍무제[1368~1398] 때는 3만 명, 영락제[1403~1424] 때는 4만 명이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인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 현 요령성 해성시]·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성종 때 최부[1454-1504]의 『표해록』에, “해주, 요동[요양] 등지에는 중국인, 조선인, 여진인이 섞여있다. 석문령[무순]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옷과 모자, 말과 여자들의 장식이 우리와 거의 같다.”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의 요동 지역의 조선인은 개인 파산으로 인해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淸)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조선과 명(明)이 연합하여 여진족의 토벌전을 벌였다. 세조 초 명(明)이 건주 본위(建州本衛)를 토벌하는데, 조선에서도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을 보내 압록강을 넘어 건주위의 본거지를 공략, 건주본위 도독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죽이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1479년에도 명의 요청으로 윤필상(尹弼商)압록강 너머 여진 본거지를 토벌하게 했고, 그 뒤 신립(申砬)도 여진의 이탕개(尼湯介)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조선·명(明)·청(淸) 등 삼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에 또 다시 요동을 두고 삼국이 대립하였고, ‘심하(深河) 전투’와 가도 사건(椵島事件)이 벌어졌다.

심하 전투는 조선이 후금과 벌였던 첫 전투였다. 1616년(광해군 8) 후금[1616~1636]을 세운 누르하치[1559~1626]는 1618년 4월 무순(撫順)을 함락시키고, 1619년에 명의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명은 원병 요청을 받아들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3,0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참전케 하였다. 강홍립의 조선군은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赫图阿拉 : 현 요령성 무순시 신빈현 흥경]를 공격했으나, 허투알라 근처를 흐르는 심하의 부차(富車) 들판에서 후금의 기습을 받아 7,000여 명이 죽고 4,000여 명이 항복해 포로가 됐다.

가도 사건은 조선의 땅 가도를 중심으로 조선, 명, 청이 대립했던 사건이었다. 1621년 후금이 요양(遼陽)을 공격하자, 명의 요동 도사 모문룡(毛文龍)이 국경을 넘어와 평안도 철산(鐵山) 남쪽에 있는 가도[일명 皮島]로 병력을 옮기게 되었다. 1623년(인조 1) 명은 가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으며 명칭도 동강진(東江鎭)이라 칭하였다. 이듬해 다시 진을 선천(宣川)의 신미도(身彌島)로 옮기고 운종도(雲從島)라 고쳤다.

후금은 모문룡의 명군을 공략하기 위해서 1627년 정묘 호란을 일으켰다. 1629년 모문룡이 요동 경략 원숭환(袁崇煥)에게 피살되자, 유격 장군 진계성(陳繼盛)·유흥치(劉興治)·심세괴(沈世魁) 등이 그 자리를 놓고 서로 살생을 일삼았다. 1637년 청은 심세괴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조선에서는 평안 병사 유림(柳琳)과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을 보내 토벌하였다.

이로써 조선·명·후금 사이에 미묘하게 작용했던 가도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그 밖에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조선군은 청군과 함께 명의 금주(錦州) 싸움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봉림 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10여 년의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세상을 떠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조선은 이에 반발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청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결국 병자 호란 때 항복하고 말았다. 심양은 병자 호란 때 잡혀온 조선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때 잡혀간 조선인은 약 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림 대군 또한 인질로서 심양으로 갈 때 회한을 담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1828년(순조 28) 사은 겸 동지사의 수행원이었던 박사호(朴思浩)는 『연계기정(燕薊紀程)』에서,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요양의 소석령(小石嶺)에 올라 ‘호풍음우가(胡風陰雨歌)’를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여 부른다. 아득히 그 날을 돌이켜 생각하면 눈물짓게 된다.”라고 하였다. 잡혀온 조선인 대부분은 노비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지내야 했다.

심양에는 조선인들을 노비에서 풀어주는 시장으로 속량시(贖良市)가 열렸다고 한다. 소현 세자는 이들의 속량에 힘쓰는 한편 속량된 이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땅을 매입해 주기도 하였다. 이 밖에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는 심양으로 잡혀와 청 태종의 회유를 거부하고 절의를 고집해 결국 처형당했다. 속량가(贖良價)는 신분에 따라 1인당 25냥에서 1,500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계산기정』에 의하면, 요동 지역의 논농사는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된 조선인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근대의 요동

청은 건국 초기부터 왕조의 발상지라고 하여 길림 북방으로부터 봉황성[요령성 봉성시] 부근에 버드나무를 심은 유조변책(柳條邊柵)을 쌓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19세기 중반 철종 이후 양반과 관리의 학정과 수탈을 피해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고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대기근이 든 산동성의 중국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조선족과 한족의 갈등이 점차 노골화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조선을 놓고, 청·일본·러시아가 요동 지역에서 각축을 벌였다. 1895년 청일 전쟁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下關 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 반도 영유를 확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를 좌절시키고 동청 철도 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조차(租借)하였고, 만주를 세력권으로 포함시키려 하였다.

일본과 러시아의 알력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9월에 걸쳐 오야마 이와오[大山巖]가 이끄는 일본군과 알렉세이 쿠로파트킨 사령관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요동 반도와 심양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들 전투에서 이긴 일본은 러시아의 대련 및 여순 지역의 조차지(租借地)를 넘겨 받았다. 일본은 이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고 하고, 관리 기관인 관동 도독부(關東都督府)와 방위군인 관동군(關東軍)을 창설했다.

이로써 요동 지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대련·여순 등 요동 반도 일대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1909년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최후를 맞은 곳도 여순 감옥이었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여순 감옥 인근에 묻혀있다고 한다. 1909년에 일본은 청(淸)으로부터 남만주 철도(南滿洲鐵道)의 부설권을 얻어낸 대가로 간도(間島) 지방을 청의 영토로 넘겨주는 간도 협약을 맺었다.

일제 강점기의 요동

일제 침략이 본격화하는 1910년 전후에는 항일 투쟁 근거지가 됐다. 근대식 학교와 교회가 활발히 세워진 교육의 고장이자, 피어린 항일 무장 투쟁이 전개된 저항의 중심지였다. 대련, 여순 등 요동 반도 일대는 일본의 식민 정부가 들어섰다. 그 북부 지역은 중화 민국의 봉천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봉천성은 독립운동의 기지였을 뿐 만 아니라, 망명가 및 이민자들의 보금자리였다.

주요 독립운동 단체로는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의 대한 통의부[大韓 統軍府, 大韓統義府, 1922.8], 다물 청년당[1923], 남만 청년 연맹[南滿 靑年 聯盟, 1926.12.6], 유하현(柳河縣)삼원보(三源堡)의 신한민촌과 경학사(耕學社), 신흥 무관 학교[新興 講習所, 新興 武官 學校, 1919], 동명 중학교(東明中學校), 대한 독립단(大韓 獨立團, 1919.4), 무송현(撫松縣)흥업단(興業團, 1920), 관전현(寬甸縣)의 광제 청년단[廣濟 靑年團, 1919.6], 광한단[光韓團, 1920.2] 등이 있었다. 강평현 박인촌(博仁村)신농 농장(神農農場) 등과 같은 이주민들의 집단 농장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2년 일본이 괴뢰 정부 만주국(滿洲國)을 건국하면서, 요령성 지역은 만주국의 봉천성, 안동성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요동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광복 후의 요동

광복 후 중국에는 독립운동가 및 한인들 약 200만 명이 남아있었다. 대부분 지금의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등 동북 3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인들의 귀환은 중국과 미국의 귀환 정책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중국 내 한인들은 현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지금의 중국 교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항미 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중국 인민군은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에 미군 등 연합군은 압록강 연안의 중국의 발전 시설을 폭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6.25 전쟁 당시 중국 인민군의 중요 거점은 요동 지역이었다.

이후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중국 내의 정치 상황이 요동치면서 중국과의 교류는 완전 차단되었다. 중국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기간을 거치고 난 뒤, 1979년부터 개혁개방(改革開放)과 현대화 건설을 추진하였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교역 및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였다. 중국과의 교역, 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 요동 지역인 단동과 심양이다.

단동시는 북한과 중국 교역의 70%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우리와의 교역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단동의 신개발지인 신구국문항(丹東新區國門港)에 압록강 대교가 완공되면서 북한과의 교역과 관광 등 민간 교류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밖에 대련, 심양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1980년대 초 대련의 조선족 인구는 4천 명 정도였으나, 2013년도에는 8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심양에는 주중국 총영사관이 설치될 정도로 중국 내에서도 그 위상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으로 금지된 민족 고유의 습속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연변 조선족자치구 왕청현의 농악무, 아리랑, 요령성 철령시(鐵嶺市) 판소리 등 조선족 민요와 풍습이 중국의 국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사와 요동

요동은 중국의 변경이며, 그로 인하여 유사 이래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군사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요동 지역은 우리나라의 안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요동론」에서,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골(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요동은 대중국 교통로이면서 중국 왕조와 북방 유목 민족의 주요 침략로이기도 하였다.

요동사를 보면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실감할 수 있다. 고구려 유민, 대몽 항쟁과 병자 호란의 포로와 인질, 일제 강점기의 징용과 이주 등 이별의 슬픔을 간직한 곳이었다.

강홍립의 심하 전투 때 포로가 된 조선인 중 박씨 성을 가진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요령성 개현(蓋縣) 진둔향(陳屯鄕) 박씨촌 마을이 그 실례이다. 요령성 본계현 산성자향(山城子鄕)·편령향(偏嶺鄕), 하북성 청룡현(靑龍縣) 팔도하향 타구촌, 대영자향(大營子鄕) 맹가와포촌, 위당구, 하북성 평천현(平泉縣) 당감향 박가원(唐坎鄕朴家院), 칠구향 박장자(七溝鄕朴杖子) 등도 박씨촌이 있다. 이 밖에 요령성 봉성현 북산 문씨촌, 서가보(徐家堡) 서씨촌 등이 있다.

철령 이씨도 조선에서 건너간 이영(李英)을 시조를 삼고 있다. 임진 왜란 때 명군으로 참전한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과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은 모두 이영(李英)의 5대손이었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도, 하북성 풍윤현(豐潤縣) 고려포(高麗鋪)에서 정묘 호란에 포로가 되어 잡혀 온 조선인의 후손들을 만난 기록이 전한다.

요동 지역은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고, 활동 무대였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요서·요동의 선사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요동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의 북부 지역과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며 교류해온 고대 동북 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였다.

향후 요동 지역을 남북 교류의 전초 기지로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북한·중국 교류의 근거지로서 단동의 위상이 커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단동을 중심으로 대련, 심양 등지를 남북 교류의 중심지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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