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조선시대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

한자 朝鮮時代 淸나라로 끌려간 朝鮮人들의 삶과 哀歡
중문 朝鲜王朝清朝拖欢乐和生活,韩国人的悲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인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때 포로가 되어 청에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
정의

17세기 인조(仁祖) 대에 발생한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淸)나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심양(瀋陽)에서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1627)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 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 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겼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비밀서찰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 체계는 매우 부실했던 것이다.

1636년 12월 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 14일, 한양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 속에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인조,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 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 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난 갔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 ‘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의 포로들, 심양으로 끌려가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 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에는 본 주인의 편의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 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포박되어 보내어졌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胡亂)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이 있었던 것이다.

청은 정묘호란 때에도 서북 변방 지역 주민 수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간 후 교역 장소인 개시(開市)에서 포로를 가족들에게 송환하는 대신 거액의 몸값을 받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에도 조선인 포로들을 획득하는데 주력하였다.

청나라 부대가 장기간 주둔하였던 남한산성 주변의 광주·용인·이천·양주 등 경기도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갔다. 청군은 가난한 일반 백성보다 거액의 속가(贖價)를 지불할 수 있는 양반층을 포로로 잡고자 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 만 이었다.”라고 썼다. 정약용은 “심양으로 끌려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 붙잡힌 자는 여기 포함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다.”라고 적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6%가 전쟁 포로로 끌려간 셈이다. 인질로 끌려가는 세자와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의 모습은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인 포로들의 삶

조선인 포로들의 삶은 처참했다. 한겨울에 200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면서 청군에게 말채찍으로 얻어맞기 일쑤였다. 언 살에 채찍을 맞으니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났다.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청나라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조선인 포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갔다. 노예매매 시장을 지켜본 소현세자는 ‘심양장계’에서 “(돈을 치르고 포로에서 면하는) 속환에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다.

많으면 수백 또는 수천 냥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희망을 잃었고,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 찼다. 날마다 관소(館所) 밖에서 울며 호소하니 참혹하여 차마 못 보겠다”고 적었다.

청인들은 포로를 ‘목숨을 걸고 얻어낸 재물’로 여겨 도망친 포로들을 추적해서 붙잡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로 붙잡힌 포로는 코나 귀가 잘리거나 발뒤꿈치를 잘리는 고문을 당했다. 몰래 탈출하다가 붙잡혀 매를 맞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 과정에서 도망 포로를 추적하는 포로 사냥꾼과 속환가를 대신 내주고 조선으로 데려와 가족에게 되팔거나 강제노동을 시키는 포로 장사꾼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청으로 붙잡혀간 조선인 포로는 사람이 아니라 소나 말 같은 동물로 취급을 받으며 노예 시장에 팔려갔다. 그들에게는 인권이란 없었다. 청인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도망치다 붙잡히면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그 시체는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전시하여 다른 조선인 포로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었다.

조선인 포로 중 건장한 남자들은 조선영(朝鮮營)이란 외인부대에 편입되어 청군의 보조부대로 전쟁터에 끌려 나가기도 했다. 군에 뽑히지 못한 수많은 남자 포로들은 척박한 황무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각종 공사 노역에 시달렸다.

여자들의 삶은 남자들보다 더욱 비참했다. 운이 좋으면 노예 시장에서 청의 왕족이나 귀족, 장군들에게 팔려가 첩이 되어 호강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본부인의 투기를 사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주인들도 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런 줄이라도 잡지 못한 여자들은 매음굴로 팔려가 청나라 사람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다.

포로들의 생활이 이렇다보니 간혹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그들 주위에 조선인 포로들이 몰려들어 구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아우성치는 일이 많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조선 사신들은 가지고 있는 돈을 털어 몇 명이나마 조선으로 데려 오기도 했다.

원래 조선인 포로의 몸 값은 10냥 정도였다. 그런데 청나라로 끌려간 자기 혈육을 찾아오는데 급급한 나머지 돈을 많이 주고서라도 찾아오려 하면 몸값이 도리어 올라갔다. 대표적인 예로 우의정인 이성구는 자기 아들을 되찾아 오려고 무려 1,500냥이나 되는 거금을 건네기도 했다. 청인들이 포로의 몸값을 지나치게 높게 불러 가족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자, 이에 절망한 포로들이 자살하는 일도 속출하였다.

환향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논란

1638년(인조 16) 3월 조정에는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호소문이 올라왔다. 억울한 사연을 인조에게 호소했던 주인공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장유(張維)와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이었다. 그들의 호소는 모두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유는 자신의 외아들 장선징(張善徵)과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절개를 잃은 며느리에게 선조의 제사를 계속 맡길 수 없으니 아들이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한이겸의 사연은 장유의 호소 내용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의 딸이 속환되어 왔는데, 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 원통하다’며 인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한 사람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 다른 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전혀 상반된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예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은 뒤 결정해야 한다고 물러섰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 그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의 고사를 떠올렸다. "제가 고로(故老)들에게 들었는데, 왜란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종실(宗室)이, 송환된 아내와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어떤 벼슬아치가 새장가를 든 뒤, 본래의 아내가 쇄환(刷還)되자 선조께서는 후취(後娶)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시고 본처가 죽은 뒤에야 후취 여인을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그밖에 재상이나 고관들 가운데 쇄환되어 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손을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한 가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최명길은 단호했다. 이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혼을 허락할 경우, 수많은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명길은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절개를 잃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끌려간 조선 여인들 가운데 청인의 회유와 협박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또 청인들 중에도 그런 조선 여인들의 절조에 감명 받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

최명길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들어 환향녀들을 무조건 ‘절개를 잃은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와 한이겸의 상반된 호소 내용에 대해 최명길 이외의 다른 대신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최명길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인조실록’의 사신(史臣)이 최명길의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최명길을 비판했던 사평(史評)의 핵심은 이렇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지만,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사평에 따르면 환향녀들이 포로가 되면서 죽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서 사평은 다시 최명길에게 화살을 돌린다. "절개를 잃은 여자를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최명길은 백년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렇듯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장유 집안의 ‘이혼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논란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 9월에는 장유의 아내가 예조에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 이번 호소문에는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당시 장유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은 일단 신중했다. ‘섣불리 이혼을 허락하면, 부부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너도나도 이혼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인조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장선징이 훈신(勳臣)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 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사족 출신 환향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말았다. 이 가엾은 희생자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포로 김승경의 포로 생활과 탈출

김승경은 강원도 금성현 출신으로 1625년에 태어났다. 그는 11살이 되던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함께 금화현오갑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기에 곧 그곳에서 우리 관군과 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에서 관군은 패하였고 청군들이 철수하는 와중에 김승경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몽고로 끌려간 김승경은 타지의 생활 방식에 적응하며 살기 어려웠다. 김승경은 몽고로 끌려간 지 27년이 지난 1663년(현종 4) 10월 사냥을 하러 간다고 속이고 말을 타고 활과 화살을 끼고 동쪽으로 마구 달렸다. 1개월이 지나 말이 더 이상 가지 못하자 그는 말을 버리고 걸어서 12월 심양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그는 안주 관리의 신분으로 있던 조선인 포로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가 27년 전 몽고로 끌려가던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들짐승을 만날까 두려움에 떨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을 틈타 이동하였다. 전쟁 포로의 경우 만약 도망치다 잡히면 다시 청국으로 송환되어야 했고, 또한 조선으로 무사히 귀환했다할지라도 관청에 발각되면 다시 청국으로 보내져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김승경은 1664년 3월 심양을 출발하여 그해 5월 평안도 창성에 이르렀고, 8월에 그의 고향인 강원도 금성현에 도착하였다. 27년 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고향 산천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어렵게 고향에서 가족들과 재회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미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아버지와 형제들은 무고하였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김승경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이내 전후 사정을 듣고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에 부친과 형제들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김승경의 이후 삶은 비교적 평탄했을 것이다. 그의 도망 사실은 조정에도 보고가 되었지만, 조선 정부는 그를 청으로 돌려보내지 않아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었다.

포로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 한 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 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갔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심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 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북경에 입성하였다. 북경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심양의 거주민들에게 북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 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북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 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하였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북경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결국 안추원은 절망 끝에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처형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안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 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던 그 또한 주인을 따라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갔다. 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지 37년 만이었다. 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中江)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의주 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 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다. 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

참고문헌
  • 주돈식, 『조선인60만 노예가 되다』(학고재, 2007)
  • 도현신, 『옛 사람에게 전쟁을 묻다』(타임스퀘어, 2009)
  • 한명기,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재론」(『역사비평』 85, 2008)
  • 남미혜, 「병자호란기 조선 被虜人의 胡地체험과 삶」(『동양고전연구』 32, 2008)
  • 허태구, 「소현세자의 심양 억류와 인질 체험」(『한국사상사학』40, 2012)
  • 김민호,「병자호란 전후 만주인이 본 조선인」(『중국학논총』 41, 2013)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