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기상

한자 高句麗의 遼東 進出과 氣相
중문 高句丽的辽东進出的气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정의

서기 1세기부터 5세기 초까지 고구려가 요동 일대 즉 오늘날 길림성과 요령성 일대로 영역을 확장한 과정.

개설

고구려압록강 중상류 산간지대에서 발흥하였다. 고구려는 서기 1세기 중후반경 국가 체제를 확립한 다음, 동해안, 요동 평원, 서 북한, 송화강 등 여러 방면으로 영역 확장을 추진하였다. 이중 요동 평원 일대는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로 기원전 3세기 이래 중국 왕조가 요동군을 설치하여 동방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중국 왕조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끝에 5세기 초에 비로소 요동 진출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통해 만주 중남부와 한반도 중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주변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요동(遼東)의 의미와 지정학적 위상

요동(遼東)은 일반적으로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전한대(前漢代)만 하더라도 요하 서쪽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일대까지는 요동군의 관할 구역이었고, 후한대(後漢代)에는 의무려산 서쪽의 대릉하(大凌河) 일대에 요동 속국(遼東屬國)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한대(漢代)만 하더라도 요동은 ‘요하 동쪽’이라는 뜻 보다 ‘중국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이라는 의미가 강하였다. 다만 그 이후 요동 이라는 지명은 점차 ‘요하 동쪽’이라는 뜻으로 고착되었는데,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나 수·당의 고구려 원정 등이 요하를 경계로 전개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요동은 좁은 의미로는 요하(遼河)[또는 의무려산]와 압록강 사이의 요동 평원이나 요동 반도 일대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는 요하[의무려산]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일대 전체를 포괄하기도 한다. 특히 당대(唐代)에는 고구려 원정을 ‘요동 정벌’로 표현한 경우가 많고,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라는 국호 대신 ‘요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경우가 많다.

요동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은 요하 하류와 천산 산맥(千山山脈) 사이의 평원 지대이다. 흔히 요동 평원(遼東平原)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 일대를 잇는 육로 및 해로상의 요충지로 일찍부터 선진 문화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도 요동 평원 일대의 선진적인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 되었다. 다만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이래 중국 대륙 동북방의 전국(戰國)연(燕)과 각축전을 벌이다가, 기원전 300년경에 요동 평원 일대를 빼앗기고 한반도 서북부 일대로 밀려났다. 이때부터 연(燕)을 비롯한 여러 중국 왕조는 요동 평원 일대에 요동군을 설치한 다음 동방 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특히 한(漢) 무제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고지와 그 주변에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 등을 설치하였는데, 요동군이 한사군의 모군(母郡)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흥한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지배력을 물리치고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요동 평원 일대로 진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한 현도군의 퇴축과 요동 동부 산간 지대 석권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한의 현도군(玄菟郡)을 요동 방면으로 퇴축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주민 집단은 기원전 2세기 중후반경 대외적으로 ‘구려(句麗)’라는 단일 명칭으로 불릴 정도로 상당한 정치적 결속력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이 고조선 고지와 그 주변에 군현을 설치하며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는 현도군을 설치하였다[B. C. 107]. 이로써 압록강 중상류 지역은 한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정치 세력의 성장이 상당 기간 지연되었다. 다만 한 무제가 말년에 재정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온건책으로 선회하자, 각 지역의 토착민이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한군현의 지배력도 동요했는데, 기원전 82년 서남이의 담이군(儋耳郡)과 동방 지역의 임둔군·진번군을 동시에 폐지한 것은 이를 반영한다. 이 무렵 요동 서북방에서 오환(烏桓)이 크게 일어나 한의 변경을 공격했다. 압록강 중상류의 주민 집단은 한의 대외 정책 변화 및 오환의 흥기라는 정세 변화를 활용하여 현도군에 대한 무력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한은 기원전 75년경 현도군을 압록강 서북에 위치한 소자하(蘇子河) 유역의 영릉진 고성(永陵鎭古城)으로 옮겼다[제2 현도군].

이로써 압록강 중상류 일대의 주민 집단은 한군현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 곳곳에 ‘나국(那國)’이라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여 나국 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런데 오환 지역의 정세가 안정되자 한은 동방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맹주였던 소노 집단(消奴集團)이 현도군의 분리 통제책을 차단하지 못함에 따라, 원 고구려 지역의 여러 집단은 현도군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상호간에 활발한 통합과 복속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몽 집단(朱蒙集團)[계루 집단(桂婁集團)]이 부여에서 남하하여 강력한 군사력과 세력 기반을 바탕으로 소노 집단을 누르고 새로운 맹주로 부상했다. 계루 집단은 현도군(玄菟郡)의 분리 통제책을 분쇄하면서 주변의 소규모 정치 집단이나 이족 집단을 복속시켜 나갔다. 특히 서기 1세기 전반에는 선비족의 한 갈래로 요동 북방에 위치한 만리(萬離) 집단을 예속시켰다. 또한 소자하 유역의 제2 현도군 공격에 앞서 태자하(太子河) 상류의 양맥(梁貊)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계루 집단은 제2 현도군을 요동 방면으로 물리칠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계루 집단은 1세기 중후반에 각 단위 정치체의 대외 교섭권을 통제하면서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 체제를 확립하였다. 고구려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이다.

고구려는 국가 체제 확립 이후 본격적으로 영역 확장을 추진하면서 요동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고구려는 먼저 후한의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틈타 힘의 공백지대였던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 중후반에는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와 함흥 평야의 동옥저를 복속시켰다. 동해안 방면에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가진 배후 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고구려는 동해안 방면의 배후 기지를 바탕으로 한군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1세기 말경 선비(鮮卑)와 강족(羌族) 등이 후한을 대대적으로 공략하는 틈을 타서 소자하 유역의 제2 현도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05년에는 소자하 유역을 경유하여 종전에 제2 현도군과 요동군의 군계(郡界)였던 요동 고새(遼東故塞)를 넘어 요동군 관내의 6개현을 약취하였다. 고구려가 처음으로 요동 평원 일대까지 진공한 것이다.

이에 후한이 106년 혼하(渾河) 유역의 무순(撫順)에 제3 현도군을 설치하여 군사방어 체계를 재정비하자, 고구려는 111년 제3 현도군과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여 요동 고새를 양국의 국경선으로 확정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후한(後漢)에 대한 공격을 잠시 유보해야 했지만, 후한의 국경선을 요동 고새까지 크게 후퇴시키고, 요동 동부 산간 지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력 확장을 추진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 동부 산간 지대를 석권하며 요동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보다 굳건하게 건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3세기 요동 방면으로의 영역 확장

이처럼 고구려는 요동 동부 산간 지대에서 세력을 확장한 다음, 118년부터 다시 요동 진출을 시도하였다. 118년에는 요동 동부 산간지대의 주민 집단을 대거 동원하여 제3 현도군을 공격하였으며, 121년 봄에는 요동군과 현도군의 성곽을 불태웠다. 또한 121년 여름에는 선비와 연합하여 요대(遼隊)를 거쳐 요동군의 중심부까지 진격하였다. 다만 122년 이후에는 선비와의 연합 공격보다 요동 고새 외곽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며 후한에 대한 공격 루트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이를 통해 원산만 일대의 동예(東濊)와 압록강 하류의 소수맥(小水貊) 등을 예속시키고, 후한의 요동군과 낙랑군에 대한 환상(環狀)의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특히 146년에는 요동과 서 북한을 잇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살해하고 낙랑 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요동군과 낙랑군의 연계망을 차단하며 요동 방면에 대한 공격 루트 다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 양맥의 거주지인 태자하 중상류를 비롯하여, 혼하 지류인 소자하(蘇子河) 유역, 그리고 소수맥의 거주지인 압록강 하류 방면 등으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고구려가 요동 동부 산간지대를 거의 모두 석권하고, 본래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요동 평원으로 진출할 채비를 마무리한 것이다.

그런데 2세기 후반 후한의 붕괴와 더불어 중국대륙이 위(魏)·촉(蜀)·오(吳) 3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요동 지역에서는 공손씨(公孫氏) 정권이 흥기하여 서 북한과 산동 반도까지 세력을 미쳤다. 강력한 세력권을 구축한 공손씨 정권이 고구려를 압박하자, 압록강 하류의 소수맥이나 원산만 일대의 동예 등이 고구려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공손씨 정권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모색했다. 먼저 군사 방어성인 환도성을 임시 왕성으로 삼아 공손씨 정권의 침공에 대비하였다[209년]. 그리고 공손씨 정권에 대해서는 대항과 협력을 반복하다가, 230년대부터 외교적 대책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남중국의 오와 연결을 도모하다가[233년], 북중국의 위가 동방 진출을 적극 추진하자 위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234년].

그리하여 고구려는 238년 위와 함께 공손씨 정권을 협공하여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위와의 화친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위가 몰래 낙랑군을 점령한 다음 고구려를 환상으로 포위하면서 압박을 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고구려가 242년 서안평을 공격하며 요동군과 낙랑군의 연계를 차단하려 하자, 위는 관구검을 파견하여 244~245년에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도성을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북옥저까지 피신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사실상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초기 정치체제가 중앙 집권 체제로 전환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3세기 말까지 대내적인 체제 정비에 주력하는 한편, 위나 진의 대외 정책이 완화되는 틈을 타 양맥과 소수맥 등 요동 동부 산간지대의 피 복속 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강화하였다.

4세기 중국 대륙의 분열과 요동 진출 시도

후한의 붕괴와 더불어 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은 서진(西晉)에 의해 재통일되었지만[280년], 재통일도 잠시 잠깐이었으며, 290년경부터 서진의 지배질서는 급속히 무너졌다. 서진이 붕괴되자, 중국 대륙 주변의 여러 족속이 북중국으로 진출해 5호 16국이라는 역동적인 시대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에 따라 동방지역에 대한 중국 왕조의 지배력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3세기 후반 이래 지방 제도와 군제 정비를 통해 강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외 정복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고구려는 먼저 311년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西安平)을 장악한 다음, 313~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점령하여 한반도 서북지역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 이후 400여 년간 지속된 중국 군현을 축출했을 뿐 아니라, 서북한 평야지대의 경제력과 선진 문물을 확보하여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아울러 한반도 중남부와 직접 교통하는 길도 열었다.

고구려는 한반도 서북 지역을 장악한 다음, 315년 혼하(渾河) 남안의 제3 현도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요동 지역 진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한반도 서북지역으로 진출하는 사이, 요동 지역에서는 이미 선비 모용부(慕容部) 곧 전연(前燕)이 영향력을 확대한 상태였다. 고구려가 320년까지 요동 지역을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번번이 저지당하고 전연에 동맹을 요청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전연에게 내주었다. 그렇지만 고구려로서는 결코 요동 지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곳을 차지하지 못하면 동북아의 주도권을 놓칠 뿐 아니라,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구려는 대륙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새로운 대응책을 모색했다. 마침 화북지역에서는 후조(後趙)가 흥기하여 전조(前趙)까지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석권했다[329년]. 이에 고구려는 후조와 화친을 도모하는 한편, 선비 우문부(宇文部)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전연을 협공할 방안을 모색했다.

이 무렵 전연이 내분에 휩싸이자[333년], 고구려송화강 유역의 부여 지역을 전격적으로 장악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요동 평원 일대를 제외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예맥족의 주요 거주지를 거의 모두 석권했다. 그렇지만 내분을 수습한 전연이 339년 신성을 침공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이에 고구려도 후조나 우문부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등 전연을 협공할 다양한 방책을 마련했지만,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계속 밀렸다. 오히려 342년에는 전연의 침공을 받아 도성을 함락당하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더욱이 전연이 우문부 마저 멸망시키고[344년], 352년에는 북중국의 동반부로 진출해 황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더 이상 전연과 대결을 벌이기 힘들었다. 다만 전연도 고구려라는 위협 요소를 안은 채 중국 대륙의 동진(東晋)이나 전진(前秦)과 각축전을 전개하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고구려가 서북방의 초원 지대로 나아가는 부여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방 세력과 연계하여 협공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양국은 고구려가 전연의 황제국 이라는 위상을 인정해주고, 전연은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형태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355년].

이로써 고구려는 오랜 숙원이던 요동 진출을 잠시 미루어야 했지만, 서방 국경 지대를 안정시켜 한반도 중남부 등 다른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할 전기를 마련했다. 고구려가 요동 진출을 잠시 미루고 남진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다만 고구려는 369~371년 무리하게 남진정책을 추진하다가 백제의 반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에 고구려는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제도적으로 확립하고, 불교 수용이나 국가제사 정비를 통해 사상적 기반도 마련했다. 또한 385년 6월에는 전진-후연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여 요동 평원 일대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고구려가 오랜 숙원인 요동 진출을 이룩한 것이다. 그렇지만 385년 12월 후연의 공격을 받아 요동 평원 일대를 다시 내어주고 퇴각하여야 했다.

5세기 요동 진출의 실현과 독자 세력권 구축

광개토왕이 즉위한 390년대 초중반 고구려에 유리한 국제 정세가 조성되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저지했던 백제는 침류왕 사망 이후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신라는 백제와 왜의 협공을 받아 고구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중국 대륙 방면의 경우, 전진 붕괴 이후 북중국을 장악했던 후연은 북위를 무리하게 정벌하다가 파멸을 자초하였다[395-396년]. 더욱이 후연은 북위에게 쫓겨 요서까지 도망쳐 왔고[397년],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고구려를 강하게 압박하던 북중국 왕조가 잠시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경쟁자 백제는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강력한 북중국 왕조마저 사라졌으니 고구려로서는 세력을 확장할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광개토왕은 이러한 정세를 활용해 먼저 서 요하 일대의 거란을 공격해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395년]. 그리고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한강 북쪽의 백제 영역을 점령하는 한편[396년],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멀리 낙동강 하구의 가야지역까지 진격했다[400년]. 이로써 고구려는 백제를 강하게 압박하는 한편, 신라를 사실상 예속국으로 만들고 가야지역까지 위세를 떨쳤다. 이 무렵 요동 평원의 중심부인 양평(襄平)에서 후연의 현령인 단등(段登)이 반란을 일으켰다[400년 3월]. 이에 고구려는 단등의 모반으로 요동 평원 일대에 대한 후연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동 평원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402년 5월에는 요하를 건너 의무려산 동북방의 숙군성을 공격하고, 404년 12월에는 대릉하(大凌河) 하류의 연군(燕郡)까지 진격하였다. 요동 진출의 여세를 몰아 요서 방면 까지 진격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에 후연이 반격에 나서 405년 1월에 요동성을 공격하고, 406년 2월에는 소자하 유역의 목저성까지 침공하였으나 모두 물리쳤다.

고구려가 후연의 쇠퇴를 틈타 건국 이래 오랜 숙원인 요동 진출을 실현한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 평원 일대에서 중국 세력을 몰아내고,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예맥족 계통의 주민 집단을 거의 모두 통합하여 한민족 형성의 토대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요동 진출은 정복 군주인 광개토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광개토왕만주 동부로도 손길을 뻗어 숙신(肅愼)을 토벌하고[398년], 동부여(東夫餘)를 멸망시켰다[410년]. 가히 전방위적으로 정복 활동을 전개해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중국 대륙이나 유목 세계와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 세력권을 구축한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전통적인 천손족(天孫族) 사상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천하 사방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을 확립한 다음, 그에 입각해 백제, 신라, 동부여 등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주변국을 자국 중심의 국제 질서로 편입하려 했다. 이러한 독자 세력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 평원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요동 평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는 순간, 중국 왕조의 영향력이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 지역 전체로 쉽게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고구려는 요동 진출 실현 이후, 요하의 동방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설정하고 이를 사수하기 위한 대외 정책을 다각도로 구사하였다. 436년 북연을 둘러싼 북위와의 각축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는 북연이 완충 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북위가 동방 진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북연이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 고구려는 북연이 멸망하면 북위의 다음 목표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의 동향을 철저하게 정탐하면서 대비책을 세웠다. 그리고는 436년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 왕 풍홍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곧바로 2만 대군을 파견해 구원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는 북위와의 전면전을 피하며,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和龍城)으로 진입하여 각종 병장기를 탈취하고 북연왕 풍홍과 백성들을 이끌고 유유히 빠져 나왔다. 기세가 한풀 꺾인 북위군은 80여리나 되는 고구려군의 행렬만 바라본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전면전을 피하면서 북연의 지배세력을 대거 끌고 옴으로써 북위의 동진(東進)을 저지하고, 요동 평원 일대를 계속 장악할 수 있었다.

그 뒤 고구려는 여러 중국 왕조와 다양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요동 평원 일대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특히 요동 대평원에서 요하 지류의 하곡평지로 진입하는 입구마다 거대한 포곡식 산성을 축조하여 물 샐틈 없는 군사 방어망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방 통치 조직도 정비하였다. 또한 7세기 전반에는 요하 동쪽의 대평원을 따라 부여성에서 요하 하구에 이르는 구간에 천리장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군사 방어망을 바탕으로 수(隋)양제(煬帝)나 당 태종의 침공을 물리치고 668년 멸망하는 그날까지 요동 평원 일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요동 평원은 동방 지역에서 독자 세력권을 구축한 고구려의 기상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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