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 서탑가와 단동 조선족 거리 풍경을 읽다

한자 瀋陽 西塔街와 丹東 朝鮮族 거리 風景을 읽다
중문 欣赏沈阳西塔街和丹东朝鲜族街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심양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한인 집거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4년 7월 18일~7월 22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6년
정의

한국인과 조선족, 북한인 등 한민족이 상호 작용하면서 삶을 영위해나가는 심양 서탑과 단동 조선족 거리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

개요

요령성 단동시의 조한 풍정가와 심양 서탑 거리를 중심으로 오래 전부터 조선족이 이주하여 삶을 영위해 왔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부터는 한국인이 이주하여 조선족, 북한인, 중국 한족 등과 상호 교류하면서 저마다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압록강 너머 첫 번째 도시 단동, 조선족 이주의 역사

한반도는 반도라는 특수성으로 3면은 바다와 접하여 있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만강압록강 너머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은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으로 중국의 동북 3성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이 가운데 요령성은 길림성 다음으로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압록강을 사이로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다. 북한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처음으로 만나는 도시가 바로 단동(丹東)이다.

단동은 ‘안동(安東)’이라고 불리었는데 시기에 따라 ‘안동현’[1876년~1965년], ‘안동성’[1934년~1949년], ‘안동시’[(1837년~1965년)로 행정 구역이 여러 번 바뀌었다. 1949년 안동성은 요동성(遼東省)으로, 1965년에 ‘안동시’는 지금의 ‘단동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단동시는 진흥(振興), 원보(元寶), 진안(振安) 3개 구, 봉성(鳳城), 동강(東港) 2개 현급시, 관전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1개 현을 관할 지역으로 포함하고 있다. 단동 지구의 총 면적은 1.49만 ㎢이고, 인구는 240여 만 명(시내 인구 69만 명)이다. 이 가운데 약 1.7만 명의 조선족이 한족(漢族), 만족(滿族), 몽고족(蒙古族), 회족(回族), 석백족(錫伯族) 등 29개 민족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단동 지역에 거주했던 한인[韓人, 1945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중국에 거주했던 한민족을 한인이라 부르고, 그 이후에 거주한 사람들을 조선족이라 부름]들의 역사는 중국 수·당(隋·唐) 시기 고구려인으로부터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봉천통지(奉天通志)』, 『수암현지[岫巖縣志]』 등에 고구려인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료석화(籌遼碩畫)』에는 압록강 서쪽과 탕참보(湯站堡) 동쪽 그리고 남북 강변 일대에 요동인과 고려인이 잡거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요동지(遼東志)』에는 요동 지구에 한족(漢族)이 10명 중 7명이고, 여진인에 귀화한 고려인이 10명 중 3명이라고 하였다. 단동은 오랜 세월 한족과 한인, 여진족이 함께 살아온 다민족의 공간이었다.

이후 중국명나라 만력 연간[万歷, 1572~1620]에 명나라 장군 이성량(李成梁)이 관전(寬甸), 영전(永甸) 등 지방의 거주민을 강박적으로 이사시킴으로써 다수 한인은 조선 반도로 도망가고 남은 유민은 여진족으로 귀화하여 단동의 한인은 감소한 듯 했다.

얼마 만주 지역을 평정한 후금은 산해관을 향하여 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조선에 1627년[정묘호란, 丁卯胡亂]과 1636년[병자호란, 丙子胡亂] 두 차례 침략을 해왔다. 이 때 후금은 재물을 약탈하고 조공을 요구했으며, 조선에서 통역관을 선발하여 중국으로 이주시켰다.

『봉성 문가 씨족보(鳳城文佳氏族譜)』에는 시조 문서(文瑞)는 원래 조선옥상 좌동(玉尙左洞)에서 살고 있었는데, 청 순치(淸順治) 연간에 통역관으로 중국에 뽑혀 와서 봉성 이태자(鳳城二台子)에 거주하였다. 후에 청 만주 팔기 양백기(淸滿洲八旗鑲白旗)에 편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성 이태자 문씨 가족은 오랜 세월을 거쳐 만족으로 융화되었다.

청대의 조선족 단동 이주

청나라 강희[康熙, 1654~1722] 연간에는 봉금령에 의해 한인들이 자유롭게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배고픈 한인들은 압록강을 건너 단동 변경 지대에 들어 와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69년~1871년 조선의 심한 가뭄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수많은 한인들이 양국 정부의 금지령을 어기고 단동 지구로 이주하였다.

『안동성의 선인 이민 조사[安東省的鮮人移民調查]』에는 1845년 조선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80여 호 농민이 관전 하로하(寬甸下露河), 태평소(太平哨) 등 지방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많은 한인들이 일본의 압제를 피해, 독립운동을 위해 단동으로 이주하였다. 1905년 안동[지금의 단동시구와 동항시], 봉성, 관전 3개 현의 한인은 총 1,190여 호, 4,920여 명이었으며, 1926년 봉성현 한인은 456호, 2,689명이었다. 안동현[단동 시구와 동항시]은 1,752호, 8,260명, 관전현은 2,267호, 16,291명이었다.

광복 전후 시기의 단동의 한인

그런데 1927년 중국 군벌 통치자들이 한인 배척 정책을 펼치면서 단동 지구의 한인 인구가 반으로 감소하였다. 이후 1931년 중국 동북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변경 관리도 약화되었다. 많은 한인들은 생계를 위하여 단동 지구로 이주하였다. 1940년 봉성현[지금 봉성시] 인구는 9,690명, 관전현은 8,927명, 안동현[지금의 단동시구와 동항시]은 24,231명, 총 인구는 42,848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대다수의 한인은 한반도로 돌아갔고, 다시 단동 지구의 한인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단동 지구의 조선족[한인] 인구 변화는 빈번하였다. 1952년에는 공산당과 인민 정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흑룡강성으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반도 재건을 위해 한반도로 이주하기도 했다.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에는 벼농사가 제한을 받고 조선족 학교가 폐지되자, 조선족은 심양(瀋陽), 길림(吉林) 등 외지로 이사하였다.

1978년에 단동 지구 조선족 인구는 11,191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 중 시구 인구는 1,544명, 관전현은 6,017명, 봉성현은 2,660명, 동구현은 1,000명[많은 논밭으로 인해 한인 인구가 늘어남]이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의 단동 조선족

1979년부터 인민 정부에서 공산당의 민족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조선족 학교를 회복시키고 벼농사를 지지하여 조선족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압록강 연안의 단동 조선족 사회는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0년 제4차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단동 지구 조선족 총인구는 14,888명 이었다. 이 가운데 관전현이 6,193명, 봉성현이 3,740명, 동구현이 1,417명이었다.

조선과 변경 무역을 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조선족 상인이 단동 시내에 입주하여 조선족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제6차 전국 인구 조사(第六次全國人口調査)』에 따르면, 단동 지구 조선족 인구 총 수는 16,974명이었다. 이 중 진흥구 4,995명, 원보구 1,299명, 짐안구 792명, 경제 개발구는 393명, 봉성시 2,819명, 동항시 2,385명, 관전만족자치현 4,291명 등이다.

단동은 북한평안도와 인접하였기 때문에 평안도에서 이주한 조선족이 95%를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단동 시내 삼마로(三馬路), 오룡배(五龍背), 관전만족자치현, 봉성시, 동항시 등에 거주하고 있다.

단동의 한인, 혹은 조선족 이주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중국과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빠르고 민감하게 변화해 왔다. 이러한 특징은 압록강을 사이로 한반도와 마주 하고 있는 단동의 공간적 특수성에 서 기인한 것이며, 단동을 마주하고 태어난 한민족(韓民族)의 숙명이기도 하다.

압록강을 사이로 한 단동과 신의주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평안북도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단동은 화려한 수변 도시이며 변경 무역 도시이다. 압록강을 따라 높고 웅장한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은 모습은 마치 상해 같은 대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단동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은 단동이 활기찬 무역의 도시이며 관광의 도시임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단동에 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있다. ‘중조 변경-압록강단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비석 옆에 나란히 서서 압록강조중 우의교, 압록강 단교를 뒤의 배경으로 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떠난 실향민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 벅찬 눈물의 사진이다. 분단의 시간이 많이 지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일에 대한 순수한 염원이 줄었다고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자리에 서면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압록강 건너의 한반도 끝을 확인한 후 주위를 둘러보면, 유람선을 타는 선착장과 교량들이 보인다. 이 앞은 사진을 찍고 물건을 사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분홍색 치마에 노란저고리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는 중국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북한의 ‘조선 우표’, 북한 담배, 북한 돈 등을 파는 상인들도 있다.

단동과 신의주 사이 압록강의 강폭은 서울의 한강 정도이며 한강의 유람선처럼 단동에도 압록강 유람선이 있다. 유람선의 노선은 단동 측에서 배를 타고 강의 중간지점까지 배가 다다가 신의주를 조망하고, 다시 단동에 닿는 것이다. 강 건너 신의주의 경관은 단동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압록강변에서 빨래하는 아낙과 오고가는 북한 군인, 석탄을 가득 싣고 옮기는 트럭과 배. 북한 사람들의 소소하고 소박해 보이는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카메라를 당겨 바라보니, 북한 사람들은 압록강 너머 이곳 단동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왜 이 강 건너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단동의 높고 큰 건물들과 대조적이게 신의주의 건물들은 낮고 작다. 북한의 놀이 공원인 ‘노동 공원(勞動公園)’도 보인다. 간혹 북한 측 압록강에서 북한 유람선을 탄 사람들이 눈에 띈다. 신혼부부를 태운 듯한 배에는 알록달록 한복을 곱게 차리고 한껏 멋을 낸 신부들이 있다. 배보다 타고 있는 사람이 많아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단동과 신의주 사이 압록강을 잇는 다리

압록강 유람선의 선착장은 압록강 단교 옆에 있다. 단동과 신의주 사이 압록강 위로는 3개의 다리가 있다. 첫 번째 다리는 1911년 개설되어 1950년에 파괴된 압록강 단교이다. 이 다리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막기 위해 미군이 1950년 11월 8일부터 14일 동안 B-29 폭격기로 폭격하여 파괴하였다. 현재는 중국 측의 다리만 남아있다.

두 번째는 1943년에 만들어진 조중 우의교(朝中友誼橋)로 압록강 단교 좌측에 위치한 다리이다. 본래는 ‘압록강 철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90년 북한과의 합의에 의해 양국의 우의를 맺자는 의미에서 조중 우의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세 번째 다리는 2016년 개통을 앞두고 있는 신압록강 대교이다. 변경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단동에서 조중 우의교는 물류가 지나는 교통로로서 역부족인 상황이다. 따라서 새로운 교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단동시압록강과 북한 측의 백사강이 합수되는 지점까지 약 3㎞ 길이로 건설 중인 다리이다.

이 다리가 개통되면 단동은 중국 내에서 북한과의 무역량이 최대인 지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북한 경제에도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 줄 무지개 다리가 될 것이다.

북한의 풍정이 없는 단동 조한 풍정가

압록강변에서 시내 쪽으로 들어서면 육위로(六緯路)가 나온다. 입구에는 높은 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을 얹고 단청도 칠하고 ‘조한 풍정가(朝韓風情街)-조선 한국 민속거리’라는 현판을 걸었다. 2차선의 도로 폭을 가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한글 간판이 즐비하다. 조선[북한]과 한국의 특색이 있는 거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조한 풍정가’는 육위로에서 칠위로(七緯路)까지 이어진다. 북한에 있을 수 없는 한국의 거리와 한국에 있을 리 없는 북한의 거리가 단동 육위로에 함께 있다. 두 나라가 하나의 거리에 있다고 현판이 먼저 말해주고 있다.

‘조한 풍정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간판은 ‘한원상사 왕도매’이다. 간단한 음료와 담배를 파는 한 평 남짓한 작은 가게에 걸린 간판은 초라한 모습의 광고판이다. ‘한국 전자 제품, 한국 주방 용품,한국 가정 잡화 왕도매,심양 오애 시장(五愛市場)’이라고 쓰여 있다. 옆에 있는 ‘용천 상사’에는 ‘심양-인천 상사 직영’이라고 쓰여 있다.

심양의 오애 시장은 심양 오애가(五愛街)에 위치한 소비재 위주의 2차 도매 시장이다. 중국 잡화 시장 가운데 절강성의 의오(義烏)에 시장에 이어 판매액 기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는 의류, 잡화, 신발, 모자, 원단, 가방, 장갑, 침상 용품, 가전, 미용 제품, 식품 등 2만 여 종이 거래되고 있다. 한국의 물품을 심양에서 도매로 판매하고 있다. 단동에서도 주문을 받는 형식으로 무역이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의류를 판매하는 ‘일심 한 장(一心韓裝)’, ‘한국 벽지’, ‘한국 바지’, 한국 식품 판매점인 ‘한국 명가 식품’ 등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상품을 판매하는 곳은 모두 한국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조한 풍정가는 한국의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대부분이며, 음식점이나 술집은 적다. 조-한 거리의 조선, 즉 북한은 없는 듯하다. ‘오늘의 약속 진달래 술집[今日有約 진달래 酒吧]’은 간판의 명칭을 볼 때 북한 술집을 표방한 조선족이나 한족의 가게인 듯하다.

중국에는 44개 정도의 북한 식당이 있다. 북한에서 국영으로 운영하는 곳이며 북한에서 파견된 종업원들이 음식이나 술을 판매한다. 단동의 북한 음식점은 단동 고려관으로 압록강변에 위치해 있다. 순대, 김치, 나물, 된장국, 잡채, 돼지고기 두루치기 등의 북한 음식이 상에 오르는데, 이들은 한국보다는 중국 조선족 식당의 음식과 더 유사하다. 북한의 음식을 맛보면서 북한 종업원들의 노래와 춤 등을 감상 할 수 있어서 한국 관광객들의 관심이 높은 곳이다.

심양의 배후 도시, 단동

‘조한 풍정가’는 현판의 내용과는 달리 한국의 상품을 도매하는 심양 오애 시장의 무역 거점지이다. 북한의 풍정은 찾기 어렵다. 인천 국제 여객 터미널에서는 매일 인천에서 단동으로, 단동에서 인천으로 여객선이 오고가고 있다. 중국인이 선호하는 한국 상품을 인천에서 단동으로 배로 들여와 중국 동북 지역 최대의 소비재 시장인 심양으로 운송하고 있다.

심양은 북경과 천진 등 경진(京津) 경제권과 인접하고 있으며, 대련, 창춘, 하얼빈 등지로 향하는 중국 동북 지역의 철도 및 고속도로망이 통과하는 지역이다. 이처럼 중국 동북 지역 내륙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심양은 육상 물류의 중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배후에는 단동이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동북 지역의 경제 상황과 함께 단동 ‘조한 풍정가’가 앞으로 어떠한 변화를 맞이할 지 기대된다.

중국 동북 3성의 중심, 심양

명조 말기,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진 만주족[여진]은 명나라의 간접 통치를 받고 있었다. 조선의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하여 명은 만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건주 여진의 족장 누르하치는 1588년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점차 명나라의 변방 국가들에 대한 세력은 더욱 쇠락해져갔다. 이 틈을 기회로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 일대의 여진족을 완전히 통일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정하였다. 1619년 살이호[薩爾滸,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심양을 점령하였으며, 1625년 후금의 수도를 심양으로 정했다.

심양이라는 명칭은 심양 남부를 흘러 지나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의미의 ‘심수지양(瀋水之陽)’에서 유래된 것이다. 만주어로는 ‘무크덴(Mukden)’이라고 하며, 성경(盛京, 셩징), 봉천[奉天, 펑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청조는 순치 원년(順治元年)인 1644년 북경으로 입관[入關, 수도를 북경으로 옮김]하였는데, 이후 심양은 제 2의 수도로서 만주 지역 일대를 관할하였다.

오늘날 심양은 중국 동북 3성 가운데 가장 큰 도시이다. 중국요령성의 성도(省都)이며 중국 동북 지역 경제, 문화, 교통, 군사의 중심지이다. 과거 동북 지역은 중공업 기지로,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부터 동북 진흥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영 중공업 기업이 밀집해 있는 심양을 동북 진흥의 중추 도시로 지정했다. 중앙 정부 지원에 힘입어 심양은 노후 산업의 현대화와 경제 구조 전환에 착수했으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양은 중국 동북 3성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반경 100㎞ 이내에 위치한 안산(鞍山), 무순(撫順), 본계(本溪), 영구(營口), 요양(遼陽), 철령(鐵嶺)등 배후 도시 6개와 상호 경제 통합을 통해 ‘대심양 경제권’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6년 10월, 상해 푸둥 신구, 천진 빈하이 신구, 허난성 정주(鄭州) 정둥허우(鄭東后)에 이어 전국 4번째의 국가급 신구로 지정되어 심양시 북부에 선베이(瀋北) 신구 설립이 허가되었다. 이곳은 중국 동북 지역 노후 공업기지 개선 모델 지역으로 100만 명 규모의 신도시 건설이 계획되고 있으며, 앞으로 심양 경제권의 확대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심양의 잠재력은 상업 유통 부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내륙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심양은 주변의 중소 도시는 물론, 멀리 흑룡강성, 길림성, 내몽고와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의류 잡화 제품을 취급하는 총 24개의 도매 시장이 있는데, 오애[五愛, 우아이] 시장은 전국 2위의 도매 시장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도매 기능이 잘 발달된 심양의 내수 시장을 겨냥한 한국 기업들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LG 전자, 태평양 화장품, SK 가스[가스 충전소] 등은 대표적인 기업이며 이밖에 할인 마트[메가 마트], 아파트 건설[SR 건설], 금호 렌트카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기업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던 대련은 그 매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이에 비해 심양은 인구가 많고 주변 배후 도시가 발달되어 있는데다가 인건비, 지가(地價), 물가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조선족이 밀집해 있는 서탑(西塔)은 또 하나의 흡인 요인이 되고 있다.

서탑의 축제 ‘심양 한국주’

심양 서탑가에 직경 2.5m 가 넘는 거대한 밥솥이 등장했다. 이 밥솥에는 시금치, 미나리, 콩나물, 고수풀 등 30여 종의 나물이 무지개처럼 펼쳐져 있다. 중간에는 90㎏의 쌀로 ‘2014 심양 한국주[2014 沈陽 韓國周]’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이 거대한 비빔밥은 2014명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2014년 ‘중국 심양 한국주’ 축제와 ‘심양 서탑 미식 문화제’를 상징한다. 축제에 앞서 등산 대회, 축구 대회, 한국 패션쇼, 중한 문화 교류원 개관식, 전통 혼례식, 김치 담그기 등 행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서탑가의 훈춘로 북쪽으로부터 시작하여 황고구 장가가로 향하는 500m의 구간에는 ‘중한 미술가 민족 민속 벽화 거리’가 조성되었다. 거대한 비빔밥, 그리고 중국과 한국 미술가가 함께 힘을 합쳐 그린 민속화는 ‘서탑’이라는 공간에 중국 한족과 조선족, 한국인이 모두 하나가 되어 화합하고 함께 어우러지자는 의미와 상징의 표현이다.

2014년 7월 18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진 ‘중국 심양 한국주’는 13회를, ‘심양 서탑 미식 문화제’는 3회를 맞이하였다. ‘중국 심양 한국주’는 심양시 인민 정부와 심양 한국 총영사관에서 주최하고, 심양시 화평구 인민 정부, 심양 한국인 상회에서 주관하는 축제로 2002년 처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관과 주최가 중국과 한국, 서탑의 인민 정부와 이 지역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탑의 특징을 잘 설명해준다.

서탑은 심양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길림성 연길에 이어 조선족의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요령성의 심양이며, 심양에서도 서탑이다. 중국요령성의 조선족들은 압록강을 건너 초기에는 단동 지역 농촌에 집거했다가 인근의 도시로 옮겨갔다. 그 다음에는 그 지역의 큰 도시로 이동했다. 그 후에는 다른 지역의 대도시로 이주하는 이동의 경로를 통해 다수의 조선족들이 심양에 집거하게 된 것이다. 서탑은 심양시 화평구의 22개 가도[街道, 한국의 동(洞)에 상당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로 1998년, 13개 주민 위원회와 321개 주민조, 가구 6,457호, 주민 2만 2,690명이 있었다.

심양시 서탑 가도와 한인

서탑 가도의 면적은 1만 7,600평[0.58㎢]에 달하였다. 1992년 이후 ‘조선족 민족 특색 경제’라는 것을 중심으로 외자를 끌어들였고, 새로운 경제 성장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99년 10월까지 기업 486개, 사영 기업 30개, 독자 기업 30개, 국유 사업소 31개, 유한 회사 65개, 개인 상점 330개, 가판 시장 2개[서탑 고려 특면 상품가, 서탑 상무구], 상업용 노점 가판대 180개가 들어섰으며 종사 인원이 3,900명에 달했다. 2000년 말까지 상주 인구가 8,659호, 23,498명에 달했고 유동 인구는 436호, 4,269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유동 인구는 대부분 조선족이며 상주 인구 가운데 조선족은 1,705호 5,017명에 달하여 전체 주민의 18.2%[유동 인구를 포함하면 39.5%]를 차지하였다.

서탑 가도는 2003년 북시 가도의 2개 사구를 흡수했다. 동쪽으로 남경가까지 확장하여 가도 면적이 0.99㎢[3만평]으로 증가하였다. 2006년을 기준으로 서탑 가도의 상주 인구는 14,436호 41,436명이며, 조선족이 전체 인구의 19%에 달한다. 서탑에는 약 8,000명의 조선족이 있으며, 이와 같은 규모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투자 기업이 168개, 일일 소비 인구가 1만 8,000명, 야간 소비 인구가 8,000명에 달하는 것은 서탑의 경제 규모를 말해주고 있다.

초기 서탑에는 조선족들이 집중되어 살았으며, 그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외자 유치에 적극 노력했다. 중국으로 진출하기를 원했던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미리 다져놓은 터전 서탑을 통해 진입이 용이 할 수 있었으며, 조선족이 구사하는 이중 언어를 통해 소통이 원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서탑의 조선족 자영업자는 한국인 기업가와 결합하면서 발전해 나아갔으며, 북한 경제와 중국 한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점차 조선족과 한인의 배태(胚胎)는 경쟁과 배제를 낳기도 했으며, 북한 경제와 한족까지 서탑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서탑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서탑의 많은 조선족들은 서탑에서의 경제 활동보다는 한국을 비롯한 해외로 인력이 송출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서탑의 경제적 상황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조선족의 쇠퇴와 함께 한국 기업의 쇠퇴를 낳았고, 많은 부분에서 조선족과 한인의 상권은 한족의 상권으로 교체되었다.

여전히 서탑의 밤은 화려하다. 왕조룸싸롱 KTV, 청기와, BOSS, 동해회집, 한백쇼핑, 만상뀀선, 화로화구이, Angelin us Coffee, 롯데리아, 목단관과 대동강 맥주 등의 간판이 즐비하다. 서울강남 한복판의 밤보다 환하며 조선족, 한국인, 한족, 북한사람들이 모두 같이 어우러져 있다.

2014년 ‘중국 심양 한국주’ 축제의 비빔밥은 서탑의 모습 그대로이다. 밥을 담은 그릇은 서탑가이며 나물과 밥은 세 나라 두 민족을 상징한다. 그리고 커다란 숟가락으로 비비는 행위는 과거 서탑의 발전을 다시 이루기 위해 선의의 경쟁으로 화합하자는 의미이다.

쿠팡[CK 엔터콘텐츠 그룹]은 2013년 심양의 오애 시장과 업무 제휴를 맺었다. ‘오늘도 난 잘 삽니다’라는 전지현씨의 광고처럼,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오애 시장의 상품 사기에 나선 것이다. 쿠팡은 오애 시장과 브랜드 상품 개발 기획과 중국 백화점 브랜드 사업에 관한 제휴를 체결하고 의류, 패션, 잡화 등 다양한 상품 공급을 위한 공동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매 시장인 오애 시장! 단동의 조한 풍정가의 배후 도매 시장이자 서탑 경제의 새로운 미래로 성공하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 이동진, 「조선족의 자영업 활동 : 심양시의 두 조선족 집거지 경제를 사례로」(『한국 지역 지리 학회지』14-5, 2008)
  • 이평복, 「동북 진흥 정책의 중심 도시 선양」(『Chindia Journal』, 2007)
  • 문종철, 「한인의 단동 이주와 생활」(『사학지』45, 2012).
  • 『서탑 가도 판사처』(2006)
  • 「심양 서탑」(『길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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