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주 사건

한자 賓縣 事件
중문 宾县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목단강시 영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만주 지방 독립운동노선을 둘러싼 갈등에서 발생된 사건
관련인물/단체 신민부 군정파|신민부 민정파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8년 10월 20일
종결 시기/일시 1928년 11월
발생|시작 장소 빈주
종결 장소 길림성 영안현
정의

1928년 10월 20일 신민부 군정파의 보안대가 빈주(賓縣)에 거주하는 한인 40~50여 명을 공격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24년 7월에 길림(吉林)에서 개최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一會議籌備會)의 결과 남만주(南滿洲)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었다. 이에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1925년 1월 목릉현(穆陵縣)에 모여 부여족 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한 결과 동년 3월 10일에 영안현(寧安縣) 영안성(寧安城) 내에서 신민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신민부는 1925년 10월 총회에서 관할 구역내에 거주하는 한인 각 호(戶)마다에서 대양(大洋) 6원을 호조(戶租)로 받았고, 납부하지 못하면 ‘반동분자’·‘의단분자’라며 ‘보안대’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주 한인들이 중국 관헌에게 세금을 내면서 신민부에도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영안현(寧安縣)의 입적간민호회(入籍墾民戶會)·아성현(阿城縣)의 청년 연합 자치회·사회주의 운동 단체에서는 신민회의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과

1927년 2월경부터 신민부는 한인들의 교육 문제 등에 신경을 집중하려는 민정파와 군사유일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활동한 군정파로 나뉘었고, 별도의 조직체계를 갖고 있었다. 군정파는 보안대를 동원하여 의무금을 징수하고, 납부 거부에 대해서는 군사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1928년 10월 20일 이백호를 비롯한 보안대원 수명은 빈주에서 의무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보안대는 지역주민 40~50명이 납부를 주저하며 자위책을 협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해 유연동(柳淵東)·김봉진(金鳳鎭)·김유문(金有文)·장문숙(張文淑) 등이 보안대에 의해 사살되고, 여러 명의 주민이 부상당하였다.

보안대가 저지른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부 군정파의 지지기반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북만주지방 6개 현 16곳의 대표들은 11월 하순경 영안현에 모여 최경한(崔京漢) 등의 주도로 ‘북만주민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김좌진 등의 죄악을 열거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경쟁관계에 있던 민정파도 김좌진 등이 “반혁명의 주구”라고 성토하며 적대적 감정을 공공연하게 표출하였다. 이로써 신민부의 군정파와 민정파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결과

빈주 사건 이후 분열된 신민부의 민정파는 정의부의 다수파가 주도하던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에 합류하였으며, 군정파는 1928년 12월 ML그룹이 주도하는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와 혁신의회(革新議會)에 합류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조선민족발자취편집위원회 편,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 : 불씨』(민족출판사, 1999)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한국독립운동사사전』4(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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