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洪範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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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洪范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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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대표경력 |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에서 승리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1월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6월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28일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21일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월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10월 25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추모 시기/일시 | 1984년 11월 |
추모 시기/일시 | 1989년 5월 26일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
거주|이주지 | 함경북도 삼수, 갑산 |
거주|이주지 |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
거주|이주지 |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시 |
활동지 | 함경도 삼수 갑산 |
활동지 | 연해주 |
활동지 |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
활동지 | 길림성 왕청현 |
활동지 |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
활동지 | 모스크바 |
활동지 | 모스크바 |
묘소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 |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국내에서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1920년 10월 21일~26일에는 완루구(完樓溝) 전투, 어랑촌(漁郞村) 전투, 고동하(古洞河)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안남도 평양의 외성(外城) 서문안에 있는 문열사 앞마을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9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단양 이씨와 혼인하였다.
홍범도는 함경도 삼수·갑산·북청 일대에서 포수생활을 하다가 1907년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 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급 화약류 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그해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는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을 처단하였다.
1910년 6월 홍범도는 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연해주에서 ‘13도의군’ 조직에 참여하여 의원(議員)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5월에는 불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독립운동 단체 권업회의 조직을 주도하였으며, 부회장에서 선임되었다.
홍범도는 1915년 밀산(密山) 십리와에 있던 권업회의 농장에서 농사와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항일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5월 28일 안무(安武)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를 결성하고 사령부부장에 취임하였으며,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홍범도는 1920년 10월 21 청산리 전투가 시작되자 독립군 연합부대를 이끌고 완루구·어랑촌·고동하전투 등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1922년 1월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한인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27년 10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홍범도는 1937년 9월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옮겼으며, 1948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시로 이주하였으며, 1943년 10월 25일 75세 일기로 서거하였다.
홍범도의 묘소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시에 있다.
1962년 한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84년 11월 크즐오르다시의 홍범도 묘소에 반신 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시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