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3·13 반일 시위 운동

한자 3·13 反日 示威 運動
중문 3·13 反日示威运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만세운동
관련인물/단체 배형식|김영학|간도 조선독립운동 의사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발생|시작 장소 길림성 용정
정의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같은 해 3월 13일 용정( 龍井)에서 간도 조선 독립운동 의사부가 주도한 반일 시위 운동.

역사적 배경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서북간도와 러시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거국적인 민족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연길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초에 기독교 대전도 회의 총회가 개최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민족 운동을 일으킬 준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사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 중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독립 선언서가 전달되자 민족 운동 계획은 한층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경과

용정 지역에서의 시위 계획은 2월 18일과 20일에 개최된 비밀회의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이들은 간도 조선 독립운동 의사부(議事部)를 조직하는 한편, 의사부에서는 3·13 시위를 지도하였다. 이들은 서울 및 각지에서 이미 독립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간도에서는 ‘조선 독립 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 선언을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대회장에 김학영, 부회장에 배형식 등을 비롯하여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또한 이들은 간도 거류 조선민족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 포고문」을 작성하였고 강봉우와 이지택에 의해 전해온 서울의 「독립 선언서」에 북만주조선 민족 대표자 17인을 첨가하여 등사하였다.

특히 독립 선언서와 대회 개최 통지서 등의 문건은 은진중학교 지하실에서 등사한 뒤 북간도 지역과 돈화 일대에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거사 당일에는 학교 교사와 책임자를 중심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지참하도록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3월 13일 용정 서전벌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기독교 목사 배형식의 사회로, 김영학이 독립선언서 포고문을 낭독했으며, 이어서 유예균, 배형식, 황지영 등이 연설을 하였다. 이때 간도 근교에서 축하회를 위해 용정으로 모여든 군중은 약 3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위가 대규모로 진행되는 가운데 일제와 중국 군경의 간섭으로 인해 시위대와 중국 경찰의 충돌이 있었으며, 중국 군경의 발포로 17명의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결과

이날 시위대가 해산된 후 구춘선(具春先)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은 국자가(局子街)에 머무르면서 일본 영사관과 결탁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연길 도윤 공서(延吉道尹公署)에 항의를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날 밤에 중요 지도자들은 연길에 모여 대한 국민회의 모체가 되는 ‘조선 독립 기성회’를 결성하고 북간도에서의 독립운동 세력을 조직화하기로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세 시위는 만주 각지로 확산되었는데 4월 16일까지 연길, 화룡(和龍), 왕청(汪淸), 혼춘(琿春)의 4개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한 인원만도 8만 6천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남만(南滿) 지역에서는 유하(柳河), 통화(通化), 장백(長白), 집안(輯安), 환인(桓仁), 관전(寬甸)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거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3·13 반일 시위 운동은 북간도 지역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급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그 힘의 원동력은 북간도 지역에서 교육 운동, 종교 운동, 사회 결사 운동을 꾸준히 성장시켜 온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북간도 지역에서의 3·1 운동 경험은 일제하에서 지속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과 조직의 기초를 닦았으며, 민족 공동체로서의 의식을 강화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김병기·반병률, 『국외 3·1 운동』(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9)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