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琿春 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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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珲春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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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단체 | 장강호|혼춘 일본 영사 분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0년 10월 2일 |
발단 시기/일시 | 1920년 8월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0년 10월 21일~ 26일 |
발생|시작 장소 | 혼춘시 |
1920년 10월 일본이 중국 마적(馬賊)을 매수하여 혼춘(琿春) 일본(日本) 영사분관(領事分館) 을 습격하게 한 사건.
1919년 3·1 운동 직후 북간도 지역에서는 간도 대한 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군무 도독부(軍務都督府) 등 20여 개 독립운동 단체들이 설립되면서 활발한 무장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독립 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렸던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일본군은 1920년 8월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우고, 출병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일제는 1920년 10월 2일 중국 마적단을 사주하여 혼춘에 있는 일본 영사분관을 습격하는 이른바 ‘혼춘 사건’을 조작하였다.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토벌’하기 위하여 혼춘 일본 영사분관을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한·중·러 삼국 국경 지대에 위치한 혼춘에는 한민회(韓民會)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혼춘은 러시아와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들을 연계시키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혼춘은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와 독립운동 단체에 사건 혐의를 전가할 수 있는 지리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장강호(長江好)라는 중국 마적단 두목과 내통하여 혼춘 일본 영사분관을 공격할 것을 사주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일 400여 명의 마적단이 혼춘성을 공격하였다. 마적단은 오전 9시부터 4시간 동안 살인과 약탈을 자행,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수 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비어 있던 일본 영사분관을 불태웠다.
일제는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러시아 과격파 5명과 불령 선인 다수가 참여한 사건으로 몰고 갔다. 여기에 용정에 있던 간도 일본 총영사관은 여러 가지 허황된 사실을 날조하여 일본군이 간도를 침공하는데 ‘합법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데 앞장섰다. 우선 혼춘 사건 당일 간도 일본 총영사관의 사카이[堺] 총영사 대리·스에마쓰[末松] 경시(警視)·요코오[橫尾] 대위(大尉) 등 3인은 회동을 가지고, 혼춘 사건을 국지적인 문제에 국한시키지 말고 북간도 전역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를 탄압하기 위한 빌미로 삼고자 하였다.
그들은 외무 대신에게 일본군의 즉각 ‘출병’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중국 마적과 독립운동 단체들이 용정 일본 총영사관과 두도구 일본 영사분관을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외무성과 조선 총독부에 긴급 타전하는 한편, 조선군 사령관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침공은 이미 ‘혼춘 사건’ 당일인 1920년 10월 2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경원(慶源) 수비대 80명을 침입시키고, 이어 경원 헌병대에서 헌병 6명과 아베[安部] 소좌(少佐)가 이끄는 보병 1중대와 기관총 1소대 및 그 외에 훈융(訓戎)의 국경 수비대 30명까지 합해 3일 밤까지 혼춘으로 침입시켰다.
일본 정부는 10월 7일 각의로 ‘간도 출병’을 선언하였다. 간도를 침공한 일본군은 제19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시베리아를 침공한 제11·13·14사단 일부와 관동군까지 동원한 2만~2만 5천명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서 주력 부대인 제19사단은 모두 3개 지대를 편성하여 갑·을·병 3개의 작전 구역을 획분하였다. 혼춘 지역은 이소바야시[磯林] 지대, 왕청 지역은 기무라[木村] 지대, 용정과 화룡 지역에는 아즈마[東] 지대가 각각 담당하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화룡현 청산리의 백운평·천수평·완루구·874 고지·천보산 등 곳에서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끈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 청산리 대첩을 거두었다.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북간도 지역 한국 독립운동 기지를 철저하게 파괴하기 위한 ‘경신년 대참변’을 자행하고 일본 영사관 기관을 확장하고 조선인 민회를 설립하여 통치 기반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