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동경성 전투

한자 東京城 戰鬪
중문 东京城战斗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동경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한·중 연합군이 일·만군을 공격하여 동경성을 점령한 항일 투쟁
관련인물/단체 지청천|한국 독립군|길림 구국군|중한 연합 토일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3년 6월 7일
발생|시작 장소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정의

1933년 6월 7일 한중 연합 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여 점령한 항일 투쟁.

역사적 배경

1932년 11월 하순 2차 쌍성보(雙城堡) 전투의 패배와 일본의 괴뢰 ‘만주국’ 수립 등으로 곤경에 처한 한국 독립군 지도부의 지청천(池靑天)·김창환(金昌煥)·신숙(申肅) 등은 그해 말 활동의 중심지를 종전의 북만주에서 동포들이 많이 사는 동만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중국 의용군인 길림 구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방안도 결정하였다. 이에 1933년 1월 13일 수백 명 규모의 한국 독립군과 길림 구국군 제14사는 합작하여 공동 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한중 연합 토일군([혹은 한중 토일 연합군, 이하 ‘연합군’으로 약칭함]’이라는 연합 부대를 결성하였다.

연합군은 그해 2월 10일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金尙德)을 남경(南京)의 국민당(國民黨) 정부에 특파하여 재정적 후원과 무기·탄약의 지원을 요청했다. 연합군은 그해 2월 경박호(鏡泊湖) 전투, 4월 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경과

이와 같은 전과의 여세를 몰아 연합군은 북만주의 영안현성(寧安縣城)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먼저 부근의 동경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동경성은 영안현 서남쪽에 위치한 발해(渤海)의 고도(古都)로서 방위상의 요충지이자 일(日)·만군(滿軍)의 식량 공급 기지이기도 했다.

1933년 6월 7일 저녁 지청천이 지휘 아래 연합군은 부대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동경성을 공격했다. 먼저 편의대가 성내에 침투하여 공격에 호응하도록 했다. 3시간 정도 혈전을 벌인 끝에 서문 공격을 맡았던 한국 독립군의 성내 진입을 시작으로 연합군이 승기를 잡았다. 일·만군은 북문으로 퇴각하였으나 매복 중이던 연합군에 거의 섬멸되었다.

동경성의 안전한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영안현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의 병력으로 선제 공격은 불가능했으므로 주력 부대를 각 요지에 분산 배치하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얼마 후 왕청(旺淸)·동녕(東寧) 사이의 산간 지대로 이동시켰다.

결과

연합군에 의해 일·만군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후 연합군은 입성하여 주민들을 위로하고 전리품을 수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빼앗은 식량은 이후 한국 독립군의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은 150여 명의 시체를 발해진 북쪽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에 파묻은 후 앞면에 ‘충혼비(忠魂碑)’, 뒷면에 ‘정기장산하(正氣壯山河)’ 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 8·15 해방 이후 중국 정부에서는 앞뒤의 비문을 모두 없애버리고 ‘발해 상경 용천부 유지’ 라고 써넣었다.

의의와 평가

동경성 전투는 이어서 6월 30일에 치러진, ‘1930년대 청산리 대첩’이라고도 불리는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주요한 바탕이 되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채근식, 『무장 독립운동 비사』(대한민국 공보처, 1949)
  •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독립운동사』 5 (독립 유공자 사업 기금 운용 위원회, 1975)
  • 조경한, 『白岡 回顧錄』(한국 종교 협의회, 1979)
  • 신재홍, 『독립군의 전투』(민족 문화 협회, 1980)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한국학 중앙 연구원, 1991)
  • 독립 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한국 독립운동사 사전』 1-2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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