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

한자 金立
중문 金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권업회|간민회 발기|한인사회당 선전부장|고려공산당 상해파 비서부장
출생 시기/일시 1880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활동 시기/일시 1915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몰년 시기/일시 1922년 2월 6일
출생지 함경북도 명천
거주|이주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학교|수학지 한성
활동지 경성
활동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활동지 북간도 국자가
활동지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활동지 북간도 훈춘
활동지 북간도 훈춘
활동지 나자구
활동지 러시아이르크츠크
활동지 중국상해
정의

일제 강점기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

개설

김립은 서북학회, 신민회 등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북간도간민 교육회, 간민회, 연해주의 권업회에서 활동하였다. 3·1 운동 이후 한인사회당과 신민단의 합동, 모스크바 국제공산당에의 한인 사회당 대표 파견, 통합 상해 임시정부에의 참여, 임정 특사파견과 모스크바 차관 획득의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립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활동 사항

김립의 본명은 김익용(金翼瑢, 金翼庸)이다. 가명으로 왕진덕(王鎭德)을 썼고, 자는 인삼(仁三)이며 호는 일세(一洗)이다.

김립은 어린 시절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으며 서울로 올라와서 같은 고향 출신인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다니며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서북학회와 신민회에 가입하여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일제강점 직전인 1910년 초 김립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고 1910년 4월 17일 개척리한민 학교에서 개최된 안중근 추도회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1910년 8월 23일 일제가 한국을 강탈하다 이에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유인석(柳麟錫), 이상설(李相卨), 오주혁(吳周爀)등이 중심이 된 성명회(聲明會)에 참여하였다.

1911년 초 김립은 북간도 국자가(局子街)로 이동하여 길동기독학당(吉洞基督學堂)을 설립하였으나 자금 운영의 문제로 계봉우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블라디보스토크로가 1911년 6월 1일 권업회(勸業會) 발기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12년 신해혁명 이후 북간도 훈춘 지역에서 간민교육회의 교육장려원으로 활동하며 신식교육과 기독교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13년 1월 13일 간민 교육회 회원 25명과 같이 간민회(墾民會)를 발기하고 연길(延吉), 화룡(和龍), 왕청(汪淸), 훈춘(琿春) 4개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였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노령 연해주 지역의 모든 한인 활동이 제한되자 김립이동휘·계봉우·도성·김하구·조장원 등과 함께 만주로 떠나 1915년 6월 나자구(羅子溝)대전 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립은 1916년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갔다가 나자구 무관 학교에서 독일장교를 고용했다는 ‘독일정탐’ 혐의로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러시아 2월 혁명 후인 1917년 5월 23일 석방되었다.

이후 김립은 1918년 4월 한인 사회당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선전부장을 담당하였다. 3·1 운동이후 김립은 새로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입된 이동휘, 남공선, 현순, 김성겸과 함께 상해로 이동하였다. 한편 1920년 11월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이 제공한 활동자금을 치타로 운반한 한형권으로부터 자금을 인수하여 상해(上海)로 운반하였는데, 이때 사적으로 유용하였다는 의혹을 받아 일명 국제 공산당 자금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1921년 김립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 사회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고려 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여 비서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그 해 6월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발생 후 상해파 고려 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1922년 2월 혼자서 상해본부를 지키다가 레닌이 제공한 자금을 임시정부에 반환하라고 주장한 오면직(吳冕稙)과 노종균(盧宗均)에 의해 상해에서 암살되었다.

참고문헌
  • 김준엽·김창순 공저,『한국 공산주의 운동사』1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1967)
  • 허근욱, 『민족 변호사 허헌』(지혜네, 2001)
  • 반병률,「김립과 항일 민족 운동」(『한국 근현대사 연구』32, 한국 근현대 사학회, 2005)
  • 『대동 공보』(1910.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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