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

한자 盧伯麟
중문 盧伯麟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항일 비행사 학교 설립|임시정부 군무총장
출생 시기/일시 1875년 1월 10일
활동 시기/일시 1908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몰년 시기/일시 1926년 1월 22일 별세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황해도 송화군
거주|이주지 미국
학교|수학지 일본
활동지 미국캘리포니아 윌로우스
활동지 중국상해
정의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최초의 항일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등을 역임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개설

육군 무관학교장을 비롯하여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맡았던 노백린은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군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 총회장으로서 구국 교육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월로우스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盧泰然)·도인권(都寅權)·김훈(金勳) 등 무관학교 출신인 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 항쟁을 주창하였다. 1923년 1월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면직되고 후임에 박은식이 당선되자 박은식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로 추천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다.

가계

노백린은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시골 선비 노병균(盧秉均)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계원(桂園)이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도 컸으며 기골이 장대하였다. 매사에 침착하면서도 성격이 매우 호탕하였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한문 수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활동 사항

1895년에는 당시 내무대신인 박영효의 주창에 따라 이루어진 대한제국 정부 관비생으로 선출되어 일본의 정치·사회·문화를 배운다는 목적으로 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노백린은 도쿄에서 경응의숙(慶應義塾) 보통과와 특별과를 마치고 1898년 11월 성성 학교(成城學校)를 졸업했다. 이후 다시 일본 육군 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하여 신식 군사학을 배웠다. 1900년 10월 귀국한 노백린은 당시 원수부(元帥府) 회계국 총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어담(魚潭)·윤치성(尹致晟)·김형섭(金亨燮) 등과 함께 육군 참위에 임관되었다. 이후 한국 무관 학교 보병과 교관을 담당하며 군대 양성에 진력하였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남에 관전단(觀戰團)이 되어 중국의 대련(大連)·여순(旅順) 등지를 두루 돌아보고 귀국한 뒤 정위·참령·부령·정령으로 승진했다. 노백린은 육군 무관학교장을 비롯하여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1907년 8월 1일 한국 군대 해산으로 육군연성학교는 폐교되고 노백린은 군부 교육국장직을 맡게 되었다.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군권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1908년에는 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김홍량(金鴻亮) 등과 함께 해서 교육 총회(海西教育總會)를 조직하여 해서 교육 총회장으로서 구국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0년 6월 노백린은 박용만(朴容萬)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였다. 노백린김성옥·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백린은 즉시 중국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동년 4월 10일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월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이곳 교포인 김종림(金鍾麟) 등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설립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하였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직에 있으면서, 계속 미국에 머물러 비행학교육성에 종사하였다. 한편 노백린은 미국에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으나, 1920년 1월에 "전국민이 광복군 전투 대령에 참가를 당부”하는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해로 돌아온 노백린은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문제로 이승만과 안창호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이의 중재에 나섰다. 또한 안창호와 시국대책을 논의하여 임시정부가 소련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는 토의를 하기도 하였다. 노백린은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盧泰然)·도인권(都寅權)·김훈(金勳) 등 무관학교 출신인 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주창하는 한편 일반외교 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22년 1월 독립운동 선상에서 변심(變心)한 김희선(金羲善)과 소련 정부로부터 수령한 독립운동 자금을 공산계열의 조직을 위하여 사용한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 등을 성토하는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申圭植),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교통총장 손정도(孫貞道) 등 각료들과 함께 서명한 후 발표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등의 개최에 따른 독립운동 단체의 분열 수습하기 위하여 안창호·김덕진(金徳鎮)·최일(崔日)·한진교(韓鎮敎)·최창식(崔昌植) 등 주요 인사들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통일된 의견과 행동으로 조국 광복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12월에는 대통령 대리 겸 국무총리에 박은식(朴殷植)이 추대되고 노백린은 다시 교통 겸 군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면직되고 후임에 박은식이 당선되자 박은식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로 추천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다. 노백린은 교통 겸 군무총장직을 겸직하였다. 그러나 노백린은 상해에서 병을 앓다가 1926년 1월 22일 일생을 마쳤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 김후경,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광복출판사, 1983)
  • 『대한민국 독립유공 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이현희,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동방도서, 1987)
  • 박민영 외,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03)
  • 홍윤정, 「노백린의 항일독립운동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18, 1998)
  • 이현희, 「盧伯麟 장군의 獨立鬪爭硏究-美洲·하와이를 中心으로-」(『實學思想硏究』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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