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김간

한자 金簡
중문 金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성격 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활동한 조선 문신.
성별
본관 평안북도 의주(義州)
대표관직|경력 吏部尙書
출생 시기/일시 미상
활동 시기/일시 1750년(건륭 15)
활동 시기/일시 1772년
활동 시기/일시 1773년
활동 시기/일시 1777년
활동 시기/일시 1778년
활동 시기/일시 1792년
몰년 시기/일시 1794년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義州)
거주|이주지 청북경
정의

18세기 청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문신.

개설

조선의 대청 교섭(對淸交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역할을 하였다.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를 편찬하였고 청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활동 사항

김간의 연고지는 평안북도 의주(義州)로서 이곳에 선산(先山)이 있다. 그는 만주어에 능통하고 학식이 높았으며 할아버지 상명(尙明)은 각로(閣老)·대신(大臣), 아버지 삼보(三保)는 무비원경(無備院卿), 누이 동생은 건륭제(乾隆帝)의 귀비(貴妃), 동생 휘(輝)는 병부시랑, 아들 온포(縕布)는 호부상서 등을 지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하여 『영조 실록』·『정조 실록』에도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연행 일기(燕行日記)』를 살펴보면 이 중 연행사가 청에 가서 만나야 되는 중요한 인물로서 거론되며 조선의 대청 교섭(對淸交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국 측 문헌에서는 김간이 조선인이라는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만주정황기인(滿洲正黃旗人), 한군정황기인(漢軍正黃旗人)이라 하여 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한군정황기인이라고 한 것은 선조가 명말(明末) 의주(義州)에서 중국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한군기적(漢軍旗籍)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또 만주정황기인으로 기록된 것은 화외인[化外人: 중국에 귀화한 외국 사람]으로서 만주기적(滿洲旗籍)에 오르게 된 것에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청 교섭에서 김간은 할아버지 상명 때부터 막대한 방물(方物)의 견감(蠲減)·영묘(英廟)의 저책(儲冊)과 저군사위[儲君嗣位 : 왕세자가 임금에 즉위함]에 대한 문책을 해결시킨 것이나, 연행 사절이 중국에 갔을 때 조정중신(朝廷重臣)·석학(碩學)과의 면담을 주선시킨 것 등의 업적을 이루며 당시 조청 교섭(朝淸交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김간은 1750년(건륭 15) 내무부 주사(內務府主事)를 출발로 하여 1772년 내무부대신에 제수되었고 1773년 사고관무(四庫館務)의 부총재에 충임(充任)되었다. 1777년에는 호부만우시랑(戶部滿右侍郞)에 조보(調補)되고 1778년에는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를 편판(編辦)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무영전(武英殿)의 교각사(校刻事)를 실제적으로 담당하면서 목활자 인쇄 기술을 개량시켰으며 이에 대해 『무영전취진판정식(武英殿聚珍版程式)』이라는 저술을 남겼고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版叢書)』134종을 간행하였고 『요금원삼사어해(遼金元三史語解)』를 저술하였다.

사고전서의 편찬에 있어서도 독촉검사의 실무에서부터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목활자의 간행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고전서에 대한 공적으로 1785년 청정부(淸政府)의 경찰(京察)에서 2급(二級)이 가서(加敍)되었고 1792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조임(調任)되었다.

1794년(건륭 59)에 12월에 숨을 거두었다.

학문과 저술

『무영전취진판정식(武英殿聚珍版程式)』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版叢書)』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

『요금원삼사어해(遼金元三史語解)』

참고문헌
  • 변인석,「사고전서와 한국인 부총재 김간에 대하여」(『동양 사학 연구』10, 동양 사학회, 1976)
  • 변인석,「무영전취진판정식의 서지적 고찰」(『동양 사학 연구』24, 1986)
  • 변인석,「증보신판사고전서 조선 사료의 연구」(『민족 문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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