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3·13 운동

한자 3·13 運動
중문 3·13运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반일만세시위운동
관련인물/단체 정동 학교|명동학교|충렬대|연길교구 김영학목사|배형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발생|시작 장소 만주 용정
기념장소 만주 용정
정의

1919년 3월 13일에 용정 일대에서 조선인들이 거국적으로 행했던 반일 운동.

개설

용정 3·13 반일 운동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제와 직접 맞서 싸운 사건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 또한 규모와 지속 기간이 가장 크고 길었던 항일 운동으로써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간도 조선인들의 향후 항일 투쟁 노선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용정 3·13 반일 운동의 주역들이 묻혀 있는 용정 동남쪽 합성리 공동 묘지인 ‘3·13 반일 의사릉’은 현재 용정시중점문물보호대상(龍井市重點文物保護對象)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애국심 교육의 현장이자 용정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로 인정을 받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07년 8월,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朝鮮統監府間島派出所)가 세워지던 무렵, 간도와 연해주에서는 의병들의 무장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08년 한 해에만 의병 세력은 일본군들과 1,451회의 무장 충돌이 있었고, 의병수가 69,804명에 달했을 정도로 간도와 연해주에서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그 의병 운동의 중심에 용정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해삼위, 海蔘威)가 있었고, 주변의 조선인 마을들이 의병들의 군자금과 의병 투쟁의 근거지가 되어 주었다.

1919년 3월. 일제의 우세한 화력 앞에 한반도와 간도, 연해주 지역의 한민족들이 다시 항일을 위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연해주에서, 그리고 간도에서 항일 만세 시위 운동이 발발한 것이다. 그 해 3월 13일, 간도의 용정 중심가에서도 이른바 '용정 3·13 반일 운동'(龍井 3·13 反日 運動)이 일어났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체포당해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은 90년이 지나고 있건만 사라지지 않고 ‘3·13 반일 의사릉’(3·13 反日 義士陵)과 함께 연변 조선족 사회의 역사적인 아픔으로 간직되어 오고 있다.

경과

1907년 8월,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이후 일본 총영사관)가 설치되었다. 일제의 총영사관 설치는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일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용정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은 그 날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일제는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항일 투쟁에 직면해야 했다.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일제와 이를 막으려는 처절한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1919년 3월 13일, 용정 시내 한 복판에서 일제와 용정 조선인 시위대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른바 역사적인 '용정 3·13 반일 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간접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이어 나온 윌슨(T.W.Wilson)의 민족 자결권 원칙, 이웃 러시아에서의 반봉건과 반압제의 기치를 내건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 하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해외의 한민족들에게 직접적인 투쟁의 불씨로 작용했던 것은 1919년 서울에서 발생한 3·1 만세 운동이었다. 일제의 진압으로 많은 인명이 상하고 쌍방은 격앙되었다. 서울의 만세 운동의 불씨는 삽시간에 간도로 이어졌다. 간도의 조선인 사회에서도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고 항일 만세 시위의 불길이 타올랐다. 마침내 3월 13일, 용정 한복판에 3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항일 집회와 시위를 위해 모여들었다.

사건 당일 날, 새벽부터 연변 각지에서 용정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산둔진(開山屯鎭)정동 학교(正東學校) 교원들과 학생들은 12일 밤에 주먹밥을 싸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와 명동학교(明東學校)에 도착했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들 300여 명이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했다. 본래 집회 예정지는 영신 학교(永新學校) 앞 공터였으나 나중에 동북쪽으로 700m 떨어진 서전 대야(瑞甸 大野, 지금의 용정 제1 유치원 부근)로 옮겨졌다. 그날, '정의, 인도'가 쓰인 대장기와 태극기, 중화민국기를 든 3만여 명의 간도거류 조선인들이 서전 대야에 모여 반일 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15세 소년 임민호(林民鎬)가 울린 천주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연길 교구 목사 김영학(金永學)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김영학이 먼저 간도 거류 조선인 일동으로 된 '독립 선언 포고문'을 낭독했고, 애국지사들인 유례균(劉禮均), 배형식(裴亨植)과 황지영(黃志英, 여자)이 차례로 한, 중 두 나라 공동의 원수인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스런 침략 행위에 대해 성토 연설을 했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대회장에는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 소리가 수시로 울렸고, 힘차게 치켜 든 주먹들이 하늘을 향해 숲을 이루었다.

결과

3월 1일 시위 운동의 후속 조치로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다. 3월 상순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 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 양상을 보여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데는 지식인·청년·학생층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서울 등 도시 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다. 경기도 부천의 혈성단, 대구의 혜성단, 조치원청년단 등이 그 예이다. 이들과 함께 광범한 민중이 비타협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 대회가 열렸으며 전차종업원, 경성 철도 노동자 등은 파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했다. 서울·평양·선천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철시(撤市) 투쟁을 벌였다. 농촌에서는 횃불 시위와 산 위에서의 봉화 시위가 벌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시위를 확산하는 만세군이 등장했다.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쓸었던 시위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5만 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일본측 발표).

국내에서의 시위 운동에 호응하여 간도·연해주·미국 등지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의 독립 선언식이 최초였으며,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의 독립 선언 경축 대회로부터 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연해주에서는 3월 17일 대한 국민 의회 주최로 독립 선언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 주로 모금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재정이나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선전 활동을 지원했다

의의와 평가

이 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친일 지주·예속 자본가를 제외한 전 민족적 항일 독립운동이자 계몽 운동, 의병 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 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 일제의 무단 통치가 끝나게 되어 민족 해방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며, 운동 이념상에서 복벽 주의가 청산되었고 민주 공화제 이념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그 결과 공화제 형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승국 식민지에서는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제국 주의 민족 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해방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하여 독립 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 운동을 처음 준비했던 33인이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가 독립을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타협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했던 점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 내적 원인이었다.

운동과정에서 드러난 이러한 한계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3·1 운동의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으면 민족이 해방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도 촉진되었다.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차 공감을 얻어갔다.

참고문헌
  • 김철수, 강룡범, 김철환, 『중국 조선족 력사 상식』(연변인민출판사, 1998)
  • 용정 3·13 기념 사업회 외, 『룡정 3·13 반일 운동 80돐 기념 문집』(연변인민출판사, 1999)
  • 백민성, 『유서깊은 해란강반』(연변인민출판사, 2001)
  • 전광하, 박용일, 『세월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2)
  • 용정 3·13 기념 사업회,『룡정 3·13 기념 사업 20주년 사진집-의사릉의 향연』(용정 3·13 기념 사업회, 2009)
  • 김춘선 외, 『중국 조선족 혁명 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 김철수, 『중국 조선족 통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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