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한자 渤海
영문 Balhae
중문 渤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698년~926년
한반도 북부, 길림성 동북부, 흑룡강성, 러시아연해주 일대
정의

698년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大祚榮)이 중국만주 지역에 세운 나라.

개설

발해국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이 지난 698년 고구려의 옛 영토였던 계루고지(桂婁故地)인 동모산(東牟山)을중심으로 나라를 세운 후 926년 요(遼)나라를 세운 거란(契丹)에 멸망당할 때까지 229년간 나라를 유지한 왕조이다. 처음에 발해(渤海)의 국호는 진국(振國)이라고 했으며, 713년 고왕(高王)대조영의 책봉 후에는 나라의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영토

해동성국(海東盛國)발해는 사방 5천리, 편호 10여 만, 승병 수만의 군사를 갖춘 국가였다. 발해가 건국된 이후 말갈의 무리들과 고구려인들이 속속 귀화해 왔다. 대조영은 성력(聖曆) 연간에 돌궐과 신라로 사신을 보냈다.

발해가 건국한 동모산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이 천리 떨어진 곳으로서 대조영은 부여(夫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해북제부(海北諸部)로의 영토를 확장하여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월희 말갈(越喜靺鞨)과 접경하였으며, 동북쪽으로는 흑수 말갈(黑水靺鞨)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

이후 무왕(武王)대무예(大武藝)에 이르러서 대조영대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개척하여 흑수 말갈을 비롯하여 동북의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 신속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 건국 이후의 영토 확장은 대체로 무왕 시기에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10대 선왕(宣王)대인수(大仁秀) 시기에는 다시 해북제부로의 영토 확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 3대 문왕(文王)이 사망한 이후 9대 간왕(簡王)에 이르기까지 25년간 6명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을 거치면서 크게 위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왕은 또한 건국 이후 비약적으로 확장된 강역에 천도를 거치면서 5경 15부 62주의 행정 제도를 편제하였으며, 유학과 불교를 발전시켰으며 대외적으로 천손 의식을 표방하면서 발해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을 형성하였다.

제도

발해는 건국 이후 끊임없이 중원의 당나라로 학생들을 보내어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히게 하여 해동성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은 문치를 지향했던 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의 3성,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신(信) 6부와 문서를 관리하는 문적원(文籍院), 교육을 담당하는 주자감(胄子監) 등의 중앙 통치 기구를 마련하였다. 중앙에는 또한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 좌우웅위(左右熊衛), 좌우비위(左右羆衛),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 등 10위의 군사 제도를 마련하였고, 관료들에 대한 품계와 그에 따른 관복 제도, 개국공(開國公)·개국남(開國男) 등과 같은 봉작 제도도 마련하였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발해국은 건국주인 1대 고왕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15대 대인선(大諲譔)에 이르기까지 총15명의 왕이 계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2대 무왕으로부터 10대 선왕까지 8명의 왕들에는 무왕, 문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 선왕이라는 묘호가 전하며, 2대 무왕으로부터 11대 대이진(大彛震)까지 인안(仁安), 대흥(大興), 보력(寶曆), 중흥(中興), 정력(正曆), 영덕(永德), 주작(朱雀), 태시(太始), 건흥(建興), 함화(咸和)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통로

발해에는 동경(東京)용원부(龍原府)에 일본도(日本道), 남경(南京)남해부(南海府)에 신라도(新羅道), 서경(西京)압록부(鴨綠府)에 조공도(朝貢道), 장령부(長嶺府)에 영주도(營州道), 부여부(扶餘府)에 거란도(契丹道) 등 5개의 교통로가 있었다. 발해의 주요 교류 대상국은 중국의 당나라와 일본이었는데, 발해가 존속한 기간 동안 당나라로는 140여회 정도의 왕래가 있었고, 일본으로는 35회에 걸쳐 사신을 교류하였다.

당나라나 일본으로의 교류는 정치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적인 목적에 의한 교류도 빈번하여 당나라로 간 발해 왕자가 시장에서 교역을 허락받았다든가 예불을 청하였다든가 하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일본으로의 교류 과정은 초기의 정치·군사적 목적에서 벗어나 점차 경제적인 이윤 추구로 그 목적이 바뀌어 갔다.

발해의 특산물로는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곤포, 책성의 메주,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베, 혹주의 면, 용주의 주, 노성의 벼, 미타호의 잉어, 환도의 오얏, 낙유의 배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특산품은 상기의 교통로를 통해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에서 수출되었다.

유민

발해는 대이진, 대명충 시기의 중흥을 지나 점차 쇠락하였고, 마침내 대인선 시기에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수많은 발해국의 유민들이 중국, 돌궐 등으로 유입되었는가 하면, 또한 고려로 망명해 갔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왕자 대광현(大光顯) 등이 주변국으로 망명해갔으나 터전에 남아있던 수많은 유민들에 의한 부흥 운동도 이어졌다. 서경압록부에서 일어난 후발해국(後勃海國)과 그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 발해 중심지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흥료국(興遼國)과 대발해국(大勃海國) 등이 그것이다.

유적

발해국의 영토 내에는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은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에 위치한 상경성(上京城)임은 재론이 필요치 않는다. 이밖에도 구국에는 동모산으로 비정되는 성산자 산성(城山子 山城), 오동성(敖東城) 등이 있으며, 중경(中京)에는 서고성(西古城), 동경(東京)에는 팔련성(八連城)이 있고, 5경 주변에는 발해의 방위와 지역의 통치를 위해 설치된 많은 성터가 있다.

또한 5경의 주변에는 발해의 왕실 귀족묘를 중심으로 수많은 고분군들이 남아있다. 육정산 고분군(六頂山古墳群), 용두산 고분군(龍頭山古墳群), 삼령분(三靈墳) 등이 그것이며, 앞으로 검토가 필요한 대형 고분군으로는 화룡(和龍)의 북대 고분군(北大地古墳群), 영안(寧安)의 홍준어장 고분군(虹鱒魚場古墳群), 대주둔 고분군(大朱屯古墳群) 등이 있다. 또한 5경이 위치했던 자리에는 많은 사찰 유적이 남아있는데, 구국의 묘둔 사찰지[廟屯廟址], 화룡의 동남구 사찰지[東南溝寺廟址], 군민교 사찰지[軍民橋寺廟址], 동경의 오일 사찰지[五一寺廟址], 양종장 사찰지, 신생 사찰지[新生寺廟址], 흑룡강성 영안시의 1~9호 사찰지, 남대묘(南大廟) 등이 있다.

또한 러시아연해주에는 일본과의 교류의 기점인 염주(塩州)크라스키노성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상경을 비롯한 도성 유적은 발해의 도성제의 변화 및 그에 담긴 사상을 엿볼 수 있고, 사후 세계를 반영하는 고분 유적을 통해서는 발해의 장속, 관념은 물론 발해국의 문화 예술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

계승성 및 연구 한계

발해국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고, 황제국이었다.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열국에 붙어 여러 번방을 거느리고,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였다”라고 한 것은 발해국의 정체성이 고구려, 더 거슬러 올라가 부여와 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발해 구국인 길림성돈화시에 위치한 육정산 고분군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 공주(貞惠公主)묘가 발견되어 발해 건국 초기 왕실 귀족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무덤의 양식이 고구려의 고분 양식인 석실분으로 조영되어 있다. 또한 그곳에서 출토된 묘지석에서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라는 문구와 황상, 성인 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용두산 고분군 M13에서 발견된 왕관을 통해서도 발해국의 위상을 능히 엿볼 수 있다.

『구당서』에는 발해국에 “자못 문자와 서기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발해국에는 기록을 위한 문자도, 글로 적은 역사책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과의 국경으로 늘 정예 병사를 두어 지키게 했던 부여부를 함락시킨 지 불과 10여일 만에 발해국의 심장부인 상경성이 함락되어 멸망당한 까닭에 발해국 자체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발해국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문헌 자료로서는 『구당서』『신당서』 등 일부 중국 축 역사서와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紀)』 등 주변국에서 발해에 관해 기록한 편린의 사료를 이용하지 않을수 없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 중국 측의 자료에는 발해말갈열전(渤海靺鞨列傳) 또는 발해열전(渤海列傳)이 입전되어있어 발해국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일본 측의 자료에는 외교 관련 기록이 많아 양국간의 관계 및 당시 동북 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최근 들어 발해국의 영토였던 북한, 중국, 러시아에서의 이루어진 고고 발굴의 결과물들이 축적되어 문헌 기록의 공백을 메우는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발해사에 대한 이해는 문헌 자료의 결핍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고고발굴을 통해 보고된 발해 존속 기간의 모습을담고 있는 많은 고고학적 유적, 유물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검토를 진행한다면 해동성국발해의 모습을 복원하고, 발해국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책부원귀(冊府元龜)』
  • 『무경총요(武經摠要)』
  • 『속일본기(續日本記)』
  • 『유취국사(類聚國史)』
  • 『정혜 공주 묘지(貞惠 公主 墓誌)』
  • 『정효 공주 묘지(貞孝 公主 墓誌)』
  • 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신서원, 1994)
  • 송기호, 『발해 정치사 연구』(일조각, 1995)
  • 임상선, 『발해의 지배 세력 연구』(신서원, 1998)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2007)
  • 김진광, 『발해 문왕대의 지배 세력 연구』(박문사, 2012)
  • 김진광, 『북국 발해 탐험』(박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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