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한자 高句麗
중문 高句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정의

기원 전후부터 서기 668년까지 존속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

개설

고구려는 기원 전후부터 서기 668년까지 존속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은 기원전 3세기 말에서 기원 전후의 국가 형성기, 서기 1~3세기의 초기 나부(那部) 체제기, 4~6세기 중반의 중앙 집권 체제기, 6세기 중반~7세기 중반의 후기 귀족 연립 체제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민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맥족설(貊族說), 예족설(濊族說), 예맥족설(濊貊族說), 부여족설(夫餘族說)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하던 예족[濊族, 穢族]에서 분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압록강(鴨綠江) 중상류에서 발흥하여 5세기 초반에 만주 중남부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석권한 다음, 5세기 후반에는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 진출하여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독자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예맥족의 여러 주민 집단을 하나의 역사체로 통합하는 한편, 한반도 중남부의 한족(韓族)까지 일부 포섭하여 한민족 형성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는 통일 신라와 발해를 거쳐 한민족에게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그러므로 근대 국민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구려사는 한국사임이 명확하다. 다만 고구려가 여러 종족을 포괄하며 광활한 영역을 운영하던 대제국의 면모를 온전히 파악하려면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국가 형성과 초기 정치 체제

고구려압록강 중상류의 산간 지대에서 건국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압록강 중상류의 주민 집단은 기원전 3세기 말경 철기 문화 보급과 더불어 적석묘(積石墓)라는 독특한 무덤을 축조하면서 원고구려 사회(原高句麗社會)를 형성하였고, 그 이후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75년경에는 한(漢)이 설치하였던 현도군(玄菟郡)을 요동(遼東) 방면으로 몰아내면서 나국(那國)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소노 집단(消奴集團)을 이어 이 지역의 맹주권을 장악한 주몽 집단(朱蒙集團)이 서기 1세기 중반을 전후해 다른 정치 세력의 대외 교섭권을 통제하며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 권력으로 등장했다.

고구려 초기의 국가 체제는 계루부(桂婁部) 왕실이 자치권을 지닌 4나부(那部)를 통해 통치력을 관철하는 나부 체제였다. 그리하여 초기 정치 체제는 계루부와 나부의 역관계를 조정하고 이들이 원활하게 통치력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국가 중대사는 계루부와 나부 대표자의 회의기구인 제가 회의(諸加會議)에서 의결했고, 대외 전쟁은 계루부가 각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통제하는 형태로 수행하였다. 계루부 왕권은 관등을 수여하여 나부 내의 다양한 세력들을 편제하는 한편, 왕 직속의 관원을 두어 왕권을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각 나부 역시 자체의 관원을 두고 내부의 일을 다스렸다.

한편 고구려는 일찍부터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했다. 한 군현에 대한 공격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1세기 말경 소자하(蘇子河) 유역의 제2 현도군을 혼하(渾河) 방면으로 몰아낸 다음, 2세기에는 예맥이나 선비(鮮卑)의 군사력까지 동원해 제3 현도군과 요동군을 대대적으로 공략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와 독자 세력권 구축

초기의 나부 체제는 3세기 중반 이후 중앙 집권 체제로 전환되었다. 먼저 형계(兄系)~사자계(使者系) 중심의 일원적 관등제를 정비하여 중앙 귀족화한 지배 세력을 국왕을 중심으로 편제하였다.

또한 종전의 나부 지역을 '곡(谷)'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편제하는 한편, 정복 지역에도 각 방면 교통로를 따라 지방 행정 구역을 설정하고 성곽을 축조해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에 따라 종래 예속민으로 인식되었던 피정복민도 고구려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로 국왕은 '태왕(太王)'이라는 초월적 존재로 부상했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小獸林王)대의 불교 수용,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은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를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실무 관원을 양성하기 위해 태학을 설치했고, 국가 운영의 준거틀을 마련하기 위해 율령을 반포했으며, 다양한 사상과 신앙을 통합하기 위해 불교를 수용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를 바탕으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추진했다. 마침 4세기 초 서진(西晉)의 붕괴로 5호 16국 시대라는 역동적인 국제 정세가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먼저 서북한의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을 점령하는 한편[313~314년], 330년대에는 송화강(松花江) 중류의 부여를 병합하였다. 다만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연(前燕)과의 각축전에서는 패하였고, 도성이 함락되기도 하였다[342년]. 이에 고구려는 전연과 서로의 국가적 위상과 세력권을 인정하는 형태로 외교관계를 맺은 다음[355년], 한반도 중남부를 비롯한 여러 방면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광개토왕대에는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오랜 숙원이던 요동 진출을 실현하는 한편, 서북방으로 거란[契丹], 동방으로는 숙신(肅愼)과 동부여를 공략했다. 남쪽으로도 백제를 공략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쳐 신라를 사실상 예속국으로 만들고 가야지역까지 위세를 떨쳤다.

이로써 고구려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광활한 판도를 확보했는데, 장수왕(長壽王)은 이를 원활하게 경영하기 위해 평양(平壤) 천도를 단행했다[427년]. 또한 남중국의 송(宋), 몽골초원의 유연(柔然) 등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어 신흥 북위(北魏)를 견제하다가, 460년대에는 북위와의 외교관계를 복원해 서북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런 다음 백제 도성을 함락시키고[475년], 신라 도성의 북방까지 진격했다[481년]. 북쪽으로도 유연과 함께 지두우(地豆于)를 분할 점령하여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록까지 진출했다. 고구려가 중국 대륙의 남북조나 몽골 초원의 유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독자 세력권을 구축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독자 세력권을 경영하기 위해 전통적인 천손족(天孫族) 사상을 바탕으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확립했다.

귀족 연립 체제로의 전환과 수·당과의 전쟁

6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를 둘러싼 대내외 정세가 급변했다. 내부적으로는 왕위 계승전의 격화로 귀족 세력이 심각한 내분에 빠졌다. 대외적으로는 나제(羅濟)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상실했으며[551년], 서북방에서는 북제(北齊)와 돌궐(突厥)의 군사적 압박이 심화되었다.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귀족 세력들은 공멸을 피하기 위해 3년마다 실권자인 대대로(大對盧)를 선임하는 귀족 연립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평양 시가지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해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신라와 밀약을 맺어 남쪽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다.

그런데 이 무렵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수(隋)가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것이다[589년]. 통일 제국 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와의 외교관계 개선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고 시도하다가, 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한 다음에는 요서(遼西) 지역을 선제 공격하며 공세로 전환했다.

한반도에서도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남진 정책을 재추진했다. 이로써 삼국의 각축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고구려 원정과 맞물리면서 점차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는 612년부터 614년까지 매년 100만 내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원정을 단행했다. 고구려는 입체적 군사 방어 체계와 청야수성(淸野守城) 전략을 바탕으로 거듭되는 의 침공을 격퇴했다. 이로써 는 원정의 후유증으로 멸망하였지만, 고구려의 국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唐)이 건국되었다[618년]. 당도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를 추진했는데, 초기에는 중국 대륙의 재통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강온 양면책을 구사했다. 이에 고구려도 강온 양면책으로 맞대응했는데, 이 과정에서 귀족 세력은 점차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졌다. 당은 중국 대륙을 재통일하고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서서히 고구려를 압박했으며, 대당 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점차 귀족 세력의 권력 투쟁으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론자의 대표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642년]. 연개소문은 천리 장성 축조를 통해 방어 체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당을 견제하기 위해 백제, 왜, 설연타(薛延陀) 등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이를 통해 645년 당 태종(太宗)의 원정을 격퇴하고, 거듭되는 게릴라식 침공도 물리쳤다. 그렇지만 648년 나당 군사 동맹이 결성됨에 따라 남북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665년 연개소문 사후 귀족 세력의 내분이 격화되는 가운데 나당 연합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보장왕(寶臧王)과 귀족 세력을 당으로 끌고 가는 한편,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고구려 옛 땅을 당의 판도로 편입하려고 했다. 반면 일반 백성은 대부분 고구려 옛 땅에 남아 그대로 살았다. 이들은 당의 지배에 저항하며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한반도 지역의 유민들은 신라와 연합하여 당군을 몰아내고 통일신라의 백성이 되었고[676년], 만주 지역의 유민들은 말갈(靺鞨)과 연합하여 당의 지배에 맞서다가 발해(渤海)를 건국했다[698년]. 그리하여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는 통일 신라와 발해를 거쳐 지금까지 한민족에게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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