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하촌[상지시]

한자 金河村[尙志市]
중문 金河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어지조선족향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자연촌
면적 140여㏊
가구수 45세대
인구[남/여] 97명
개설 시기/일시 1937년
야부리진 동쪽으로 5리정도 떨어져 있음
정의

흑룡강성 상지시 어지조선족향의 조선족 마을.

개설

금하촌은 1937년 만선 척식 주식 회사에서 마을을 형성한 후 조선족을 이주시켜 형성한 마을이다. 현재 중국 내 대도시와 해외로 이주하는 주민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족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 청년들이 부족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조선족 마을이다.

명칭 유래

고국의 금수강산 팔도 사람들이 모여 산다 하여 “금하”라고 이름 지었다.

형성 및 변천

9.18 사변이후 1937년 만선 척식 주식 회사는 일본인 나리다를 파견해 지금의 금하촌 자리에 마을을 형성할 계획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수림과 잡초가 무성했었다. 만선 척식 주식 회사에서는 강제로 한족 인부들을 모집하여 나무와 잡초를 제거하고 목재 등 건축 재료를 실어다 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만선 척식 주식 회사에서는 북만주에 가면 새집을 지어놓았으니 기름진 땅을 개간만 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생활난을 겪던 사람들과 연변의 안도, 길림의 화전, 모아산 등지에서 100여세대가 모여들어 34개 성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7년 만선 척식 주식 회사가 마을을 건설한 후, 조선과 연변 일대에 거주하던 조선족들이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금하촌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며 살았다. 1950년도에 들어서면서 서로 마음이 맞는 농호들끼리 호조조를 이루어 서로 도우면서 일을 하였는데 생산 적극성이 제고되고 마을 사람들의 부담도 점차 덜게 되었다.

1982년에 금하촌에서는 농업 생산 책임제를 실시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세대별 생산량 도급제를 실시하여 많은 재산이 개인소유로 되어 농민들의 생산열정이 크게 제고되어 농민들의 생활이 크게 좋아졌다. 1987년에 김락훈이 한국을 처음 방문 후에 친척방문, 노무, 연수, 결혼 등의 이유로 한국으로 출국하여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자연환경

초기에는 나무, 잡초들로 우거진 벌판이었지만 개간 후에는 강을 중심으로 논과 밭 형성된 마을이다.

현황

1987년 한국으로 153명이 이동하고, 39세대가 도시로 이사 가는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마을에는 31채의 집이 비어있고 140여㏊의 토지는 외지 한족들이 대신 경작을 하며 기존의 마을 사람들은 겨우 7세대가 5㏊만을 경작하고 있다.

촌에서 경영하던 3,000무 산림에서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1,000무의 초원과 수십년을 가꾸어오던 논과 밭이 점차 한족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2007년을 기준으로 인구는 45세대, 97명으로 대부분이 노인이며 젊은이들이 촌을 떠나는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학생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어 마을에 있던 학교도 문을 닫았다.

참고문헌
  • 한득수, 『상지시 조선 민족사』(상지시 조선민족사 편집위원회, 민족출판사, 2009)
  • 「‘명절’은 여전한데 ‘생기’는 자취감춰」(『흑룡강신문』, 2008. 3. 12)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