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문화 예술의 혼과 발자취를 찾아서

한자 朝鮮族 文化 藝術의 魂과 발자취를 찾아서
중문 寻找朝鲜族文化艺术的魂与痕迹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개설

17세기 이후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중국 동북 지역에는 이렇게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한반도의 많은 예술도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유입되었으며, 오래 동안 타지의 생활과 중국 사회의 변화에 의해 그들만의 독특한 예술 양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 예술은 이 지역에서 줄곧 생활하던 조선족과 새로이 이 지역으로 유입된 한반도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 예술은 어느 것이 토착 조선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어느 것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초기의 조선족 예술은 기존의 민요에서 가사와 선율을 변화시켜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점점 중국 동북 지역의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직접 창작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20세기부터 중국이 해방(解放)된 1949년까지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족 예술은 대략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바로 학교 예술, 민간 예술, 그리고 군대 예술이 그것이다.

조선족 예술과 교육의 만남

중국 동북 지역에 있는 조선 민족 학교는 여러 가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 창가(唱歌) 수업을 개설하였다. 창가 수업의 교육 프로그램은 대부분 교사가 직접 만들었으며, 민족 정신을 함양시키는 내용과 열심히 공부하라는 주제가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당시 창가(唱歌) 수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통화현(通化縣)의 배달 학교(倍達學校), 화전자(樺甸子)의 광성 학교(光星學校), 명동학교(明東學校), 동흥 중학(東興中學), 대성 중학(大成中學), 그리고 삼일 학교(三一學校)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흥 중학(東興中學)대성 중학(大成中學)에서는 학생들에게 「애국가(愛國歌)」와 「권학가(勸學歌)」 그리고 「학도가(學徒歌)」 등의 창가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독립군가(獨立軍歌)」, 「용진가(勇進歌)」, 「소년군가(少年軍歌)」 등 독립군의 노래도 가르쳤다. 이러한 내용 이외에 당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노래도 창가 수업에서 발견되고 있다.

창가 수업에서 교육한 노래의 선율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노래 선율은 대부분 기존 음악의 선율을 차용하여 가사만 바꾼 양상이었으나, 후기에는 창작한 노래의 비중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중국의 다른 지역 학당에서 가르치는 학당학가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족 동요의 창작에 있어서 윤극영(尹克榮)은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윤극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동양 음악 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에 용정(龍井)으로 이주하여 동흥 중학(東興中學), 광명 中學(光名中學), 광명 여고(光明女高)에서 음악 교사를 담당하였다. 윤극영은 학생의 심리적인 특징을 고려하여 100여 곡의 동요를 만들었고, 음악 교재의 수록내용은 학생들의 성장 단계와 적합하게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저학년의 학생에게는 「작은 흰 토끼[小白免]」, 「봄 소풍[春遊]」, 「박수 친다[拍巴掌]」 등의 노래를 가르치게 하고, 고학년의 학생에게는 「고향의 봄[故鄕之春]」, 「얼음 송곳[冰錐]」과 같은 노래를 가르치게 하였다.

조선 민족 학교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학교에서 관악대를 조직하였다. 관악대는 서양악기로 연주하는 형식이었으나, 학교 교육의 실정에 맞추어 나라를 사랑하는 악곡들의 연주도 많았다. 1914년의 단오절에는 여러 조선 민족 학교의 학생으로 구성된 백여 명의 관악대가 「광복가」와 「애국가」를 연주하였는데 만 명이 넘는 관중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를 잇는 예술혼을 찾아서

안도현(安圖顯) 장흥향(長興鄕)에는 신촌 농악단(新村農樂團)이 있는데, 신촌 농악단의 발전 과정을 통해 당시 동북지역에서 조선족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엿보인다.

비록 우리가 지금 조선족 예술이라는 넓은 개념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모두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여기에서의 조선족 예술이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후에 중국 동북 지역 조선족 예술의 근간이 되었고, 이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촌 농악단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938년에 경상남도의 100여 호 가정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장흥향(長興鄕)에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신촌[새마을, 신둔]이라 부르는 곳이다.

신촌 사람들은 자기의 전통 예술을 지키기 위해 10여 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서울로 파견하여 농악에 사용되는 도구와 악기들을 사오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농악 예인인 이원보(李元寶)를 초청하여 농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 결과 18명으로 구성된 신촌 농악단이 조직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 만주국(滿洲國) 창립 10주년의 경연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1920년대부터 한반도의 많은 공연 단체는 중국으로 건너가 다양하고 활발한 공연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서울 OK예술단, 서울김희좌극단(金姬座劇團), 예원좌극단(藝苑座劇團), 춘향좌극단(春香座劇團) 등 예술 단체의 공연 사실은 중국 동북 지역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의 공연 성황(盛況)은 『간도 신보(間島新報)』1936년 3월 23일의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 OK 예술단은 1942년과 1944년 두 번에 걸쳐 신경[新京, 현재의 장춘]에서 공연을 하였다. 1942년의 공연에서 가수 장세정(張世正)이 일본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많은 관객의 지적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1944년에 백년설(白年雪)이 부른 신민요는 많은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 OK예술단은 「춘향전」을 무대 위에 올렸으며 남인수(南仁洙)와 이란영(李蘭影)이 각각 이몽룡과 춘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원좌극단(藝苑座劇團)은 용정(龍井), 도문(圖門) 등 지역에서 활발하게 공연을 펼쳤다. 지금까지도 많이 연창되고 있는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은 바로 이시우(李時雨)가 예원좌극단(藝苑座劇團)에서 활동한 당시에 창작한 노래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창작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어느 밤에 이시우(李時雨)는 한 여관에서 묵게 되는데, 옆방에서 한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이시우(李時雨)는 사연을 듣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하면서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통탄하는 감정을 실었다. 이 노래는 최초 예원좌극단(藝苑座劇團)의 장월성(張月星)이 처음 불렀고, 가사의 마지막 부분인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면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외에 1939년에 박정열(樸貞烈)이 중국으로 건너가 가야금 타령을 연주한 것과 최승희(崔承熙)의 「칼춤」, 「부채춤」, 「사당춤」 등 한국의 전통 무용을 길림(吉林)에서 공연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한반도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족의 예술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족 예술은 서양의 일부 요소를 참작하여 창작하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원래 조선족의 민요는 중국의 민요와 같이 모두 단일한 선율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시기의 것은 서양의 다성부(多聲部) 합창형식으로 연출된 경우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전통 음악을 연주할 때에 서양 악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35년 11월 11일에는 명신(明信)여자고등학교의 합창단이 「도라지」, 「한강수타령」, 「양산도」, 「냉면타령」 등 민요를 합창의 형식으로 공연하였고, 바이올리니스트 백고산(白高山)은 용정(龍井) 독주회에서 「아리랑과 「양산도」를 연주한 적도 있다. 1942년에 조두남(趙鬥南)이 신안진(新安鎭)에서 아코디언으로 「양산도」를 연주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서양악기와 더불어 서양의 연출방법으로 조선족의 전통 민요를 공연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서양악기와 서양의 연출 방법으로 조선족의 전통 음악을 공연하는 것은 당시 중국 학교에서 창가 수업의 성행과 기독교, 천주교를 통해 서양음악이 유입된 사회적 분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군대내 조선족의 예술을 찾아서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건너갔으며, 광복과 일제의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사는 많은 조선족도 군대에 입대하였으므로 군대에서의 조선족 예술도 하나의 군대 예술이라는 장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시기 군대에서의 조선족 예술은 주로 음악을 창작하는 것과 직접 음악 예술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음악과 공연의 내용면에서 보면 나라를 사랑하고, 광복의 의지를 다짐하고 항일 정신을 선양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당시 한반도와 중국의 특수한 사회 환경으로 볼 때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 노래는 매우 많았다.

이중에서 「용진가(勇進歌)」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용진가(勇進歌)」는 후에 「유격대진행곡(遊擊隊進行曲)」으로 바뀌었으며, 중국 동북 지역의 군대에서 광범위하게 불리운 노래로 군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군대에서 조선족의 예술을 극대화하는 공연이 있었는데, 바로 1940년 서안(西安)에서 10일 동안 공연한 창극 「아리랑」이다. 이 창극은 총 4막으로 구성되어 있고,「아리랑」이란 민요를 가장 중요한 선율로 사용하였다. 이 창극을 통해 중국 사람들에게 우리의 전통 민요 「아리랑」을 선보였으며, 나라를 사랑하고 일제에 대항하는 애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아리랑」 창극의 창작자는 한유한(韓攸韓)으로 부산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서 「신혁명군가(新革命軍歌)」, 「전사가(戰士歌)」 등의 노래를 창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1940년에 『광복군 군가집』[1, 2]도 출판하여 음악 예술을 통한 조국 광복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조선 의용군(朝鮮義勇軍) 제1 지대(第1 支隊)의 선전대(宣傳隊)는 한반도 사람들이 직접 공연의 형식으로 예술에 참여한 경우에 속한다. 당시에는 「양산도」, 「봄타령」, 「도라지」 등의 전통 민요를 이용하여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홍광지대지가(李紅光支隊之歌)」, 「팔로군진행곡(八路軍進行曲)」 등 창작곡을 공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조선 의용군 제1지대 선전대는 「칼춤」과 「승무」 등 민족 무용을 선보이는 동시에 「근거지건설무(根據地建設舞)」 등 한족(漢族)의 무용도 연출하였다. 이들의 활발한 공연 때문에 당시 임강(臨江) 라디오 방송에도 방송되어 중국 동북 지역의 군대에서 이름난 예술 공연 단체로 평가받고 있었다. 조선 의용군 제1지대 선전대는 합창, 무용, 창극, 연극, 관현악 합주, 오페라 등 다양한 형식으로 활발한 예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49년에는 북경에서 「법고춤」 등 무용을 모택동 등 국가 지도자 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

조선 의용군 제1지대 선전대를 제외하고 제3지대, 제5지대, 제7지대는 모두 조선족의 예술을 창작, 공연하는 중요한 단체였으며, 이들의 활동을 보았을 때 조선족 예술이 군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 金哲, 『中國朝鮮族音樂文化發展研究』(東北師範大學碩士論文, 2007)
  • 孫春日, 『中國朝鮮族移民史』(中華書局, 2009)
  •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 『중국 조선족 음악 문화사』(민족 출판사, 2010)
  • 樸蓮玉, 「黑龍江朝鮮族音樂發展藝術略考」 (『黑龍江民族叢刊』, 2009)
  • 中国音敎网 (http://www.csmes.org)
  • 百度 (http://www.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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