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자구 고분군

한자 蒿子溝 古墳群
중문 蒿子沟墓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청석진 호자구촌 2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군
양식 적석묘
크기 1호묘 남북 길이 35m, 동서 너비 25m, 잔존 높이 2.5㎥호묘 남북 너비 6m, 동서 너비 3m, 잔고 0.8m4호묘 남북 길이 5m, 동서 너비 3m, 높이 0.5m5호묘 남북 길이 8m, 동서 너비 5m, 높이 0.7m6호묘 길이 3m, 너비 3m, 높이 0.5m7호묘 남북 길이 10m, 동서 너비 6m, 높이 0.8m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11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 4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8년
소재지 길림성 집안시 청석진 호자구촌 2조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청석진(青石鎭) 호자구촌(蒿子溝村) 2조(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

개설

호자구 고분군은 동서 1.5㎞, 남북 1㎞가량의 작은 언덕 최남단에 적석묘 6기가 분포하는 적석묘(積石墓) 중심의 고분군이다. 대형묘인 1호묘가 서쪽에 자리하고 그 동쪽에는 중소형묘[M3~M7]이 분포하고 있다. 고분의 유형을 살펴보면, 1호묘는 남면에서 계장(階墻)이 확인되어 계장 석광묘(石壙墓)로 추정되는데 기타 5기[M3~M7]는 소형 적석묘이다. 일부 중국 학자는 용석(鎔石)과 함께 기와가 출토되고 1호묘 동쪽의 부속 시설물을 제대(祭臺)로 파악하여 1호묘를 3세기대 동천왕릉(東川王陵)에 비정하고, 기타 5기를 그 배총(陪冢)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석 석광묘에서 용석은 흔히 발견되고, 중소형 고분에서도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 왕릉으로 확정할 근거가 없다. 다만 1호묘 및 7호묘의 적석 분구에서 용석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른 시기 집안 일대 적석 석광묘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으로 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이른 시기로 추정된다.

위치

호자구 고분군은 길림성 집안시 청석진 호자구촌 2조 서북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고분군은 호자구 충적지 중앙의 동서 1.5㎞, 남북 1㎞가량의 작은 언덕 최남단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지의 높이는 평지보다 약 30m 정도 높다. 호자구는 동서 2.5㎞, 남북 1.5㎞의 충적 대지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남쪽에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하는 언덕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져 호자구 소학교가 위치하며, 청석진-집안 간 도로[集靑公路]가 소학교 앞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3년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고분 7기를 확인하고 편호하였다. 이후 2004년 11월 및 2005년 4월에 장복유(張福有)·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이 조사하면서 1983년 2호묘로 편호된 고분이 1호묘의 부속 시설임을 밝히고, 2호묘를 결호 처리하고 총 6기로 정리하였다.

고분군의 분포 상황을 보면, 1호묘는 대지 남단의 서쪽에 위치하며, 나머지 3호묘~7호묘는 모두 1호묘의 동쪽에 위치한다. 3호~5호묘는 1호묘의 동쪽 60m 지점에 남에서 북으로 배치되어 있고, 6호묘와 7호묘는 3~5호묘의 동쪽 6~15m에 북남으로 배열되어 있다. 2008년에는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집안시 박물관에서 세계 문화유산 등재 이후 보호 항목 주요 부분 보수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집안 내의 중요 고분 5기를 정리 조사하였다. 이때 호자구 고분군에 대한 재조사도 실시되었다.

호자구 1호묘는 1983년 조사에서는 방단 계제 적석묘(方壇階梯積石墓)로 파악했으나 2004년 및 2005년 조사에서 유단 적석 석광묘(有壇積石石壙墓)로 판단하였으며, 남면에서 계장을 확인하였다. 2008년 조사에서는 11층의 계장을 확인하고 계장 석광묘로 명명하였다. 그 외 3호묘~7호묘는 2004년 조사에서 동일한 유단 적석 석광묘로 판단하였으나 2008년 조사에서는 소형 적석묘 정도로 표현하였다. 2004년 및 2005년 조사에서는 1호묘의 동쪽과 북쪽에는 각기 돌무지가 확인되는데 이를 왕릉 관련 시설물로 파악하였으나, 2008년 조사에서는 무덤 동쪽에 위치하는 돌무지만을 제대(祭臺) 유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형태

2004년 및 2005년 조사를 기준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호묘[JHM1]는 유단 적석 석광묘로 평면은 장방형으로 남북 길이 35m, 동서 너비 25m, 잔존 높이 2.5m이며, 방향은 남편서(南偏西) 20°이다. 기단은 네 면이 모두 확인되는데 미가공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일반적으로 4~7층으로 축조하였다. 돌담[石墻]의 잔존 높이는 서쪽 중앙은 1.2m, 북쪽은 0.8m, 동·남쪽은 1.5m이다. 기단 밖에는 대형의 호분석을 세웠는데 다수가 홍갈색 화강암, 회색 화강암, 현무암 등으로 가공하지 않은 상태이다. 호분석의 크기는 남쪽은 지표에 드러난 부분의 높이 1.5m, 너비 1.2m, 두께 1m이며, 북쪽은 지표에 드러난 부분 높이 1.2m, 너비 2m, 두께 0.6m이며, 동쪽 및 서쪽은 높이 1~0.8m, 너비 0.8~0.6m, 두께 0.6~0.3m이다. 고분 서쪽면 남단과 고분의 남쪽면 사이에서 2줄의 돌계장(石階墻)이 확인되는데 서쪽면 남단의 계장은 서남 모서리에서 6m 지점에서 시작하고, 서쪽면 남단의 계장은 아래 단에서 1.5m 정도 들어간 위에 축조되었다. 분구는 다량의 산자갈과 소량의 강돌로 쌓았으며, 분구 중앙의 함몰 상태로 미루어 석광은 훼손이 심각하다. 분구 적석 사이에 다수의 암키와, 수키와 잔편, 용석(熔石), 불타서 변형된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1983년 조사 때에는 겹겹이 눌린 방추차 4점과 용석 등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고분의 북쪽은 농경지로 개간되며 훼손되었다.

3호묘[JHM3]는 유단 적석 석광묘이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남북 너비 6m, 동서 너비 3m, 잔고 0.8m이며, 방향은 남편서(南偏西) 20°이다. 기단석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동남 모서리에 1개만 확인되는데 길이 0.5m, 너비 0.3m, 높이 0.3m 정도의 미가공 자연석으로 축조되었으며, 농경지 개간으로 훼손되었다. 석광 및 용석을 비롯하여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분구는 다수의 산자갈에 소량의 강돌로 쌓았다.

4호묘[JHM4]는 유단 적석 석광묘이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훼손이 심각하여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현재 남북 길이 5m, 동서 너비 3m, 높이 0.5m로 확인되며, 방향은 남편서(南偏西) 20°이다. 기단석은 전부 없어지고 교란된 상태이며, 분구는 다수의 산자갈과 소량의 냇돌로 쌓았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5호묘[JHM5]는 유단 적석 석광묘이며, 장방형으로 훼손이 심각하여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현재 남북 길이 8m, 동서 너비 5m, 높이 0.7m로 확인되며, 방향은 남편서(南偏西) 20°이다. 기단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동북 모서리에서 1개가 확인되었는데 미가공의 자연석으로 기단석 크기는 길이 0.6m, 너비 0.4m, 높이 0.3m이다. 석광과 용석은 보이지 않았으며, 분구는 다량의 산자갈과 소량의 강돌로 쌓았다. 고분 동남 모서리의 파괴가 심각한데 1983년 조사에 의하면 비교적 큰 규모였으나, 수년간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원형을 상실하였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6호묘[JHM6]는 유단 적석 석광묘이며, 평면은 방형으로 훼손이 심각하나 현재 길이 3m, 너비 3m, 높이 0.5m로 확인되며, 방향은 남편서(南偏西) 20°이다. 기단석은 전부 없어졌고, 분구는 산자갈과 강돌로 쌓았으며,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7호묘[JHM7]는 유단 적석 석광묘이며, 평면은 장방형으로 훼손이 심각하여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현재 남북 길이 10m, 동서 너비 6m, 높이 0.8m로 확인되며, 방향은 남편서(南偏西) 20°이다. 고분의 네 주변에서 기단석이 확인되나 동·서 양쪽의 기단석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기단석은 크기가 다른 미가공의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최대 기단석은 길이 0.7m, 너비 0.4m, 높이 0.4m이다. 분구에서 凹자형 함몰 구덩이가 확인되는데 그 크기는 동서 길이 3m, 남북 너비 2m, 깊이 0.5m이며. 주위에서 용석이 확인된다. 분구는 산자갈과 소량의 강돌로 쌓았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밖에 1호묘의 동쪽과 북쪽에서 산자갈을 모은 장방형 돌무지가 발견되었는데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동쪽 돌무지는 1호분의 동쪽면 기단과 15m 거리에 위치하며, 양자는 평행하다. 그 규모는 남북 길이 40m, 동서 바닥 너비 3m 및 상부 너비 1m, 잔고 1m 정도이다. 돌무지의 남쪽 면은 석축의 기초부가 보이나 그 위에 쌓아 올린 돌은 농경지를 개간할 때에 쌓은 것이다. 기초석은 가공한 자연석으로 축조했는데 크기는 0.4m 정도이다. 북쪽 돌무지는 1호묘의 북쪽 20m 거리에 위치하며, 돌무지는 석축한 대형(臺形) 건축지로 동서 길이 약 30m, 남북 너비 4m이다. 현재 대부분 석재는 없어지고 나머지 기초석은 전부 대형 건축지의 서쪽에 놓여 있다. 농민이 파낸 구덩이에서 동서 방향의 기초부가 확인되며, 기초부는 가공한 화강암으로 축조되었는데 화강암 크기는 길이 0.6m, 너비 0.4m, 높이 0.3m이다.

한편 2008년의 간략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몇 개 수정된 내용이 있다. 1호묘의 서쪽면 남단과 남쪽면 사이에서 계장이 2단 확인되는데 2008년에는 남쪽면에서 11층을 확인하였다. 3호묘~7호묘의 고분 형식에 대해 규모는 작지만 1호묘와 동일 유형의 유단 적석 석광묘로 파악하였으나 2008년에는 단순히 소형 적석묘로만 기록하고 있다. 1호묘의 동쪽과 북쪽에 있던 돌무지를 왕릉 관련 시설물로 파악하였는데 2008년에는 북쪽 돌무지에 대한 언급 없이 동쪽 돌무지를 1호묘의 제대(祭臺)로 파악하였다. 그 외 3호묘~7호묘는 두 조사 모두에서 배총으로 추정하였다.

출토 유물

2004년 조사에서 1호묘의 적석 분구에서 암키와, 수키와 잔편, 용석, 토제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다량의 기와 파편이 더미를 이루며 산재하는데 완형은 없다. 대부분 점토질의 회색이며, 적색도 일부 있으며, 전반적으로 기와의 배면에는 새끼줄무늬[繩文]가 새겨져 있고, 기와 내면은 굵은 베무늬[布文]가 남아 있다. 손으로 문질러 만든 넓은 띠 형태의 문양과 단단한 도구를 이용하여 자른 가로 방향의 선각이 특징이다. 한편 2008년 조사에서는 무덤 표면에서 철제 편자[鐵馬掌], 철제 못[鐵釘], 석제 대패[石鏟] 등이 출토되었다.

2004년 조사된 기와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암키와[板瓦]는 호자구 1호묘에서 2점과 조각 일부가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새끼줄무늬이며 두꺼운 것[A]과 얇은 것[B]으로 구분된다. A형은 크기는 잔존 길이 17㎝, 잔존 너비 15㎝, 두께 2㎝이며, 회색으로 외면에 가는 승문, 내면에 베무늬가 시문되어 있다. B형은 잔존 길이 10㎝, 잔존 너비 5㎝, 두께 1.5㎝이며, 외면에 굵은 새끼줄무늬, 내면에 베무늬가 시문되어 있다.

끝암키와 역시 호자구 1호묘에서 출토되었는데 대략 다섯 유형으로 나뉜다. A형은 파손품으로 크기는 잔존 길이 13㎝, 잔존 너비 9㎝, 두께 2㎝이며, 니질의 회색으로 내면에 베무늬, 외면 전체에 새끼줄무늬가 시문되어 있으며, 단단한 도구로 눌러서 만든 2㎝ 넓이의 압인(壓印) 흔적이 있다. B형은 파손품으로 크기는 잔존 길이 14㎝, 잔존 너비 11㎝, 두께 2.1㎝이며, 니질의 회색으로 내면에 베무늬, 외면에 굵은 새끼줄무늬가 시문되었으며, 승문 상면에는 단단한 도구를 이용하여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줄무늬[線紋]가 있다. C형은 크기가 잔존 길이 10㎝, 잔존 너비 10㎝, 두께 2.1㎝이며, B형에 비해 새끼줄무늬가 약간 가늘고, 줄무늬가 약간 좁다. D형은 크기가 잔존 길이 8㎝, 잔존 너비 7㎝, 두께 2㎝이며, 니질의 회색으로 내면은 굵은 베무늬, 외면 새끼줄무늬가 시문되었으며, 새끼줄무늬 상면에는 단단한 도구를 이용하여 균일하게 눌러서 만든 줄무늬가 있다. E형은 크기가 잔존 길이 7㎝, 잔존 너비 6㎝, 두께 2㎝이며, D형에 비해 새끼줄무늬 상면의 줄무늬가 균일하지 않고 비교적 가늘다.

수키와[筒瓦]는 표면은 새끼줄무늬, 내면은 베무늬가 시문되었으며, 어깨 부분에 따라 A, B형으로 나뉜다. A형은 크기가 어깨 높이 0.5㎝, 잔존 길이 3.4㎝, 두께 2㎝이며, 회색으로 어깨가 낮고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이 사면원각형(斜面圓角型)이다. B형은 크기가 잔존 길이 17㎝, 어깨 높이 0.7, 어깨 길이 4㎝, 두께 1.5㎝이며, 회색으로 표면에 눌러서 문지른 M형 문양이 있고, 어깨부분이 약간 오목하게 들어가 있으며,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은 직각이며, 와설(瓦舌) 표면은 약간 돌기되어 있어 마치 첨형에 가깝다.

의의와 평가

호자구 고분군의 1호묘는 기단 바깥으로 호분석을 설치하고 계장을 구축하는 방식이 고구려 초기 왕릉급 무덤으로 언급되는 집안 마선구(麻線溝) 2378호묘 및 칠성산(七星山) 871호묘 등의 대형 적석묘와 유사하다. 다만 고분 남쪽면에서 비교적 낮은 곳의 모서리가 점차 네모져지고, 봉석 가운데 강돌이 보이며, 수키와의 어깨 부분이 점차 높아지는 것 등이 두 고분에 비해 조금 늦은 시기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분 연대는 대략 기원 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3호묘~7호묘는 1호묘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동일 유형으로 파악되므로 역시 기원 3세기경 고분으로 추정된다. 1호묘의 동쪽과 북쪽에 있는 장방형 돌무지는 능장류(陵墻類)의 왕릉 시설물로 추정되며, 최근 2008년 조사에서는 북쪽 장방형 돌무지를 제대로 새롭게 해석하는 등 왕릉과 관련된 유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3호묘~7호묘는 1호묘보다 규모는 작으나 동일 형식의 고분이라는 점에서 장군총(將軍塚)의 배총과 같은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호자구 고분군은 왕릉인 1호묘와 그 배총인 3호묘~7호묘로 구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보고서는 호자구 고분군이 고분 연대가 3세기경이며, 고분 규모와 부속 시설이 왕릉의 구비 조건과 부합한다는 것 등을 들어 1호묘를 동천왕릉으로 비정하였다. 이 밖에 위(魏)관구검(毌丘儉)의 환도성(丸都城) 침공 후인 247년(동천왕 21)에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묘사(廟社)를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는 점, 호자구가 국내성(國內城)의 동쪽(東川)의 중간에 위치하는 점, 호자구는 현재 시자구(柴子溝)로도 불리는데 이는 동천왕의 장지 시원(柴原)과 일치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잔존하고 있는 상태로 미루어 보고자의 견해대로 왕릉으로 볼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여러 기가 열상 배치되어 독립된 묘역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규모는 마선구 2378호와 칠성산 871호분에 비해 소형에 해당된다. 또한 연대 판단의 근거가 없다. 마선구 2378호분은 보고서에 의하면 1세기 전후로 비정하고 칠성산 871호분은 2세기경으로 비정하였는데, 이는 동일한 축조 기법이 200년 이상 지속된 것으로 본 것으로 축조 기법은 연대 판단의 적극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적석 분구에서 용석이 발견되는 것은 집안 일대 이른 시기 석광 적석총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며, 중, 소형분에서도 기와의 출토 예가 있다. 따라서 무덤 축조 형식이나 분구에서 기와가 출토된 점으로 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해석이며, 더구나 동천왕으로 볼 객관적 근거도 없다.

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中國地圖出版社, 1993)
  • 張福有·孫仁杰·遲勇, 「集安蒿子溝墓地調査與東川王陵考」(『東北史地』2006-3, 2006)
  • 孙仁杰·迟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 王志剛, 「集安市五座高句麗墓葬」(『中國考古學年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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