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동 조선족의 주거 공간 변화-한국성 아파트로 모여드는 조선족들

한자 丹東 朝鮮族의 住居 空間 變化-韓國城 아파트로 모여드는 朝鮮族들
영문 Transformation of Living Spaces Among Dandong’s Korean Chinese – Congregation of Korean Chinese around Hanguk Sung Apartments
중문 丹东朝鲜族的居住空间的变化-朝鲜族集居的韩国城小区
분야 생활·민속/생활|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단동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0년대 이후의 변화상 서술
정의

단동 조선족들이 기존의 조선족 거리로부터 최근 한국성 아파트로 모여드는 주거 공간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

개설

단동 시내의 외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압록강을 따라 도시가 길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00년대 전후 중국의 개발구식 명칭으로 변화 양상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곳은 압록강 단교 중심으로 반경 약 2-3㎞의 압록강변 근처이다. 그리고 이곳이 단동 시내의 중심가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1990년대 네 집단의 삶의 터전은 소위 압록강변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족 거리였다.

하지만 2010년 전후 조선족들은 한국성과 주변 아파트 단지로 주거 공간의 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아파트 단지들과 주변에 북한 사람을 제외한 조선족과 한국인, 북한 화교 등 세 집단의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단동의 압록강변 조선족 거리

압록강단교 중심으로 반경 약 2-3㎞의 압록강변은 단동 시내의 중심가이다. 이곳은 시간에 따른 외형적 변화를 지속적으로 나타내 왔는데, 이로 인해 압록강변에서 안쪽으로 걸다보면 구역이 바뀔 때마다 시대가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 가운데 1990년대 의 주요 삶의 터전은 소위 압록강변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족거리’였다. 이 명칭이 사용되는 범위는 중국 거리명인 일마로(一馬路), 이마로(二馬路), 삼마로(三馬路) 지역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의 바로 옆에는 좁게는 국경 무역, 넓게는 중·조 무역 및 3국 무역과 관련된 단동 해관, 기차역이 있다.

조선족 거리에는 2003년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까지 조선족 학교가 있었다. 2000년대 전후 조선족 거리 가운데 일마로(一馬路)에 집중된 사무소와 상점들이 북한사람을 손님으로 상대하였다. 그리고 한국 식품만을 취급하는 꼬마 식품도 조선족 거리에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건설된 8층 이하의 아파트와 주변의 숙박업소 등은 2000년대 전후 조선족과 북한인, 북한 화교, 한국인 네 집단이 거주 혹은 정착하는 과정에서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이처럼 경제 활동과 주거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조선족 거리와 주변은 단동에서 네 집단이 모여들게 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네 집단은 조선족 거리의 아파트에 거주 혹은 호텔이나 여인숙을 포함한 숙소(주로 북한사람)에 장기간 투숙을 하면서, 바로 밑에 있는 네 집단이 운영하는 식당들에서 서로 만나고, 무역 사무실과 상점에서 국경 무역을 도모하곤 했다. 그리고 밤이면 북한 화교와 조선족이 주로 운영하는 주점에서 사업 이야기를 연장해서 하곤 하였다.

조선족 거리는 1990년대 전후 단동시내에서 토박이 조선족 3,000여 명 가운데 대부분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단동에 처음으로 8층 아파트들이 건설된 곳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단동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행 안내 책자에 주로 이곳은 “조선족 거리”로 명시하였다. 2006년쯤에는 단동과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와 안내 책자들 중에는 이 거리를 “단동코리아타운”으로 적어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동에서는 실질적으로 “단동 코리아 타운”이라는 거리 지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경제 활동을 주로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부르기에는 다른 색깔, 즉 북한 사람과 북한 화교, 조선족이 공존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들의 색깔이 더 강하다. 북한 식당을 제외하고는 간판 이름만을 보고서 네 집단 가운데 누가 운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단동 조선족 거리의 한국어 간판

단동의 토박이 조선족이 북한 사람을 상대로 경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어 간판과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동의 토박이보다 한편으로는 한국어 사용이 능숙한 타 지역의 조선족과 북한 화교가 단동에 이주를 하면서 중·조 국경 무역 교류에 동참을 하게 되었다. 이런 토대에서 대북사업을 원하는 한국 사람도 개입을 하게 되면서, 단동에는 다양한 한국어 간판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거리 풍경에 대해서 단동사람은 네 집단이 단동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양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북한사람의 영향 즉 북한과의 교역 때문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한다.

2012년 현 시점에도 한국어 간판의 내용들은 주로 북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이 주로 구입하는 상품명들이 상점의 유리창에 표기되어 있다. 한국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들도 북한 사람 그리고 조·중 무역을 하는 북한 화교와 조선족을 상대하기 위해 한국산임을 명시한다. 이에 반해서 농수산물을 제외하고 북한 제품임을 내세운 간판들은 소수이다. 이유는 북한 농수산물과 제품들은 단동 시내를 거치지 않고 보세 무역 방식들을 통해서 바로 한국으로 유통되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이 연관되지 않은 한국어 간판은 단동 한국인회, 한국 문화원, 한글학교, 한국 교회뿐이라는 말도 있다. 이와 같이 단동 시내에서 한국어의 활성화의 근간인 네 집단의 경제 교류의 방식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변화가 없다.

단동의 조선족 거리의 한국어 간판들의 등장 배경에는 처음에는 북한 사람을 상대로 한 경제 교류와 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원주필’(볼펜), ‘불소강’(스텐재질), ‘액틀’(액자), ‘중국료리’(요리), ‘몸까기’(다이어트), ‘색텔레비’(칼라TV) 등의 간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들 표현은 한국에서 거의 사용치 않는 북한 말들이다. 2006년에는 ‘부산 갈비’, ‘한성 통닭’, ‘현풍 할매집 곰탕’ 등이 거리에 보이지만, 2002년도에 나온 잡지의 전화번호 안내에는 ‘청류관’, ‘금강산 술집’, ‘송도원’, ‘묘향산’, ‘만경봉’, ‘평양 오락 중심’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북한식 표기와 지명 이외에도 간판에 한국어 음만 붙여 만든 것들이 있다. ‘삼마로 약점’(약방), ‘쌍면 테프’(양면 테이프), ‘각종 장식 판 피발’(도매), ‘방도문’(방범문) 등은 중국어 표현을 그 음만 한글로 바꾼 예이다. 그리고 맞춤법 표기가 틀린 것이 많다. ‘단동시초선무역부’(단동시조선무역부), ‘이발(이빨)치료’, ‘굴고기용 도구’(불고기용도구), ‘머사지’(마사지) 등이 있다. 위의 한글 간판의 표현들은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북한 화교나 조선족에게는 익숙하면서 실재로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조선족 거리의 만남의 공간들

북한 화교는 국경 반대편 북한에 있는 북한 사람과 친척들의 연줄을 무기로 조선족과 한국 사람의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 나간다. 나머지 세 집단보다 중국에 기존 관계망이 있는 조선족은 두개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장점을 활용해서, 북한사람 혹은 한국 사람 가운데 한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관계망을 넓히곤 한다.

이러한 네 집단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바쁘게 살다보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도 “기차역과 해관 앞에 가면 서로 만날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곳 주변에는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사람들에게 줄 선물세트를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이러한 관례를 단동 사람은 “상감”을 준비한다고 말한다. 인민폐 50원, 100원, 500원짜리 등으로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포장되는 종이 박스에 과일, 과자, 술, 음료수, 사탕 등이 채워진다.

단동은 수고비를 주고 물건을 부탁하면, 북한의 평양에 물건을 전달하는 일을 부탁하는 것이 기차역과 세관에서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도 가능한 곳이다. 따라서 네 집단의 사람들이 기차역과 세관 앞에는 조·중 국경을 넘나드는 물건을 주고받기 위해서 모여든다. 이 공간들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북한 사람과 그들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한국 사람, 북한과 중국을 왕래하는 북한 화교와 조선족들이 만나서 교류를 하는 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네 집단은 식당, 다방, 회사, 사무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두개의 국경을 넘나드는 삼국 무역에서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런 만남의 주된 이야기 소재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을 직간접적으로 경유하면서 북한과 한국으로 유통되는 물건과 제품들에 대한 것이다. 국경 무역과 남북 경협의 공식적인 교류 방식을 활용하는 것을 논의한다. 때로 그들은 우회적인 방법을 의논한다.

그 이외에도 일터에서도 그들은 만나고 교류하고 있다. 네 집단이 관련된 회사들이 있고 그 중에는 또 하나의 개성 공단이라는 별칭으로 통하는 조·중 합자 회사 또는 남·북 합자 회사들이 산재해 있다. 두 회사는 기본적으로 북한사람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고 세 집단의 자본이 투입되어 나온 제품과 결과물은 중국과 한국에서 주로 소비된다. 공식적으로 중국회사이지만 사장은 한국 사람이다. 중간 간부는 중국어 통역과 북한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북한화교와 조선족으로 구성된다. 북한 사람은 바이어와 주재원의 자격으로 방문한다. 그들은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만나고 경제적 이윤을 함께 창출하고자 노력한다.

이와 같은 유형의 회사에서 일상적인 풍경은 삼국 만남의 연속이다. 이 회사의 스케줄은 한국과 북한에 맞추어져 있다. 북한의 명절과 기념일은 생산 일정 관리에 필수이다. 한국에 있는 거래 회사가 휴일일 경우, 한국으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기 때문에 회사 직원들은 한가하다. 회사의 벽면에는 단동-인천 배와 단동-평양의 국제 열차 시간표가 있다. 직원들의 책상에는 북한 공장 생산 일정과 한국의 홈쇼핑 광고 일정이 표시되어 있다. 한국과 북한에서 보내온 의류 샘플들이 옆 사무실에 쌓여 있다.

사장인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온 대기업 직원을 상대하기 바쁘다. 직원인 북한 화교는 북한에 있는 공장에 전화를 수시로 하고 북한 공장에 파견을 가기도 한다. 중국 세관 업무만 전담을 하는 한족도 있다. 봉제 용어와 관련되어, 한국 사람이 조선족에게 설명을 해주면 조선족은 중국 세관과 북한 공장에 보낼 문서를 작성한다. 북한에서 물건이 나오는 날이면, 한족 직원들까지 동원되어 작업해야 한다. 한국 사장은 이전에 거래했던 북한 공장의 직원이 단동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는 “통일 보험”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사장은 그들과 언젠가 다시 거래를 할 때를 대비해서, 그들에게 접대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조·중 국경에 대한 한국 사회의 폐쇄적 이미지와 선입견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사람과 북한 사람의 국민 정체성이 그들의 교류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조선족 거리의 변화상

2010년 전후에도 단동에서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중국식 지명 그대로 “삼마로”로 말하면, 택시기사는 “조선족거리”라고 확인을 한 뒤, 네 집단의 식당과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알아서 운전을 해서 간다. 하지만 이 지역은 2004-2005년부터 네 집단이 중심이 된 주거지의 역할이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2003-2004년부터 단동의 압록강변을 따라 20-30층 고층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단동시내는 스카이라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네 집단의 사람들 가운데 조선족 거리를 떠나 국경 너머 신의주가 조망되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 결과 단동의 삼마로 주변에서 네 집단이 모여 살면서 경제활동을 하던 시기에서, 북한사람을 제외한 세 집단의 주거지가 분화되어 압록강변의 고층 아파트(한국성 주변)로 이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2010년 전후 이 지역에 대해서 단동사람은 “조선족 거리”가 아닌 “조선 거리”로 호명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의 명칭의 변화는 단순히 조선족거리의 네 집단의 주거지 역할의 축소만으로 생각할 수 없는 면들이 있다. 2011년 7월 이 지역의 변화상은 다음과 같다.

2009년 2월 단동의 한인회가 조선 거리에서 벗어나 한국성으로 옮긴 이후, 바로 아래층에 있었던 한국식당은 영양 돌솥밥(돌솥 비빔밥)을 좋아하는 북한 사람이 자주 찾는 식당이 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식 삼계탕을 주 메뉴로 하는 식당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그 이유 역시 북한 사람이 많이 찾는 것이 주요한 창업의 이유라는 점을 단동 사람은 알고 있다. 한국 관광객은 단동에서 주로 북한 식당(대부분 압록강변에 위치) 혹은 중국 식당을 이용하는 여행 코스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까닭에 조선거리에서 한국 관광객이 식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에 북한 사람이 단동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조선거리이고 이곳에 있는 식당들이다. 네 집단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단동에서 공유하는 삶은 거의 없지만, 불고기와 김치를 좋아하는 것이 똑같다고 말한다. 2011년 개업한 조선족이 식당 주 메뉴 선택과정에서 특히 고려한 사항은 네 집단이 좋아하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김치를 얼마나 맛있게 만들 것인가와 북한사람이 좋아하는 오리고기를 추가한 점이다.

기계류 등을 주로 판매하던 일마로에는 “조선 명화 작품 구입”, “각종 쌀, 밀가루, 콩기름 등을 판매 수출”, “잠바, 치마, 샤쯔, 내의”, “조선 무역”, “컴퓨터” 등의 광고 문구들을 가게 유리창에 표시한 가게들이 늘어났다. 3~5년(2007년 전후) 전과 비교를 했을 때 상품들이 다양해졌고, 실제로 전시를 해놓은 모습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세관 주변은 “변압기, 정전압주파수안정기” 등 전문 용어들이 여전히 가게의 상품 품목으로 간판에 표현되고 있다. 북한사람이 좋아하는 문구를 가게 옆면에 크게 적어 놓고, 북한에서 온 손님을 상대하는 가게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또한 거리의 구석구석마다 한국 식품을 도소매 한다는 광고를 하는 가게들이 예전보다 많다.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북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은 숫자가 줄어든 모습이다. 한국 식품과 조선 무역을 하는 가게들이 한 건물에 공존하기도 한다. 북한사람이 주 고객인 한국산 주방 용품 도매 가게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한편 2011년부터 이 거리에 대해서 단동시 정부는 “조한 풍정 거리” 건설 방안을 내놓았다. 거리 풍경을 조선족의 스타일로 통일하고 조선(북한)과 한국의 민속 전통 문화를 살려 홍보 간판도 바꾼다는 것이다. 이 거리의 입구에는 “조한 풍정 거리” 간판을 내걸 수 있는 조형물이 설치되고 있다.

주거 공간 변화: 조선족 거리에서 한국성으로

2003년을 기점으로 단동은 압록강변을 따라 집중적으로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성이라는 브랜드를 표방한 아파트 단지(1,800세대)가 “단동의 새로운 코리아타운", “단동은 중국, 한국, 조선 3개국 무역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선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분양하여 2006년 5월 완공되었다. 한·중 수교 이전에는 오직 조·중 관계만이 존재하였던 단동이라는 국경지역에 한국성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2009년 초 단동 한국인회가 조선족 거리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분양 광고에서 표현되고 있는 “새로운 코리아타운"에 대한 역할 기대는 2011년 전후 미완으로 남아 있다. 조선족 거리와는 달리 지역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한국식품 가게 3개, 조선족과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들만이 중국 사람과 더불어 이곳에 그들이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한국성 주변에 있는 “한국성 대시장(韓國城大市場)”은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중국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중국 물건으로 가득찬 시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성 분양 초기 한국에서 저축한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한 조선족이 분양 붐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2011년 전후 실질적으로 단동의 조선족 거리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 사람 가운데 비교적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한국성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성 이외에도 강변을 따라 건설된 다양한 지역의 고층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 사람은 중국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주로 조·중 국경 무역 파트너가 마련해 준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하나의 아파트 단지에 모여살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주의 특성상 단동시내의 외곽의 공장 내에 속한 한 건물에서 함께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조선족 토박이가 주거의 주류를 차지한 토대에서 시작한 조선족 거리와 같이, 2000년대 전후 네 집단이 같은 지역에서 모여 살면서 경제 행위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지역은 2011년 전후 단동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비록 한국성 주변이 조선족과 한국 사람의 주거지의 중심지 역할을 일정 부분 행하고 있지만, 중국사람의 거주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중국의 신시가지[개발구] 성격이 더 강하다.

앞으로 살아갈 곳 단동 : 조선족

조선족에게 단동은 ‘앞으로 살아갈 곳’이라는 의미가 크다. 단동의 조선족은 단동 토박이 조선족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조선족 사이에 살아가는 방식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각각 있다. 토박이들은 단동의 중국사회에서 정·관계 진출이나 인간관계의 폭이 중국 사람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중에서 1980년대부터 대북 사업을 하여 부를 축적한 층이 꽤 있고, 타 지역에서 이주한 조선족보다는 평균으로 따져보면 생활수준이 높다. 대북사업에서 단위가 큰 사업들을 하는 사람들이 북한 화교와 타 지역에서 이주한 조선족보다 많다.

한편 그들은 1980년대에는 북한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지만, 1990년대부터는 단동을 찾기 시작한 한국 사람을 상대해 나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는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쳐왔다. 가령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무역에 종사하는 조선족은 북한사람의 인맥이 중요한 반면, 한국과 북한 사이의 남북 무역을 단동에서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조선족에게는 한국 사람과의 인맥이 더 중요하다. 전자에 해당하는 조선족은 단동의 한국 사람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사람에게 일부러 말하지는 않는다. 후자의 조선족은 조·중 국경을 직접적으로 넘나드는 것을 조심하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두 개의 모국이자 출신국들인 한국과 북한 가운데 한쪽에 무게중심을 둔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0년 전후, 조선족 가운데 공무 여권과 일반 여권을 이용하는 방식들을 동원해서 한국과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이와는 달리,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조선족이 단동에 온 이유는 한국 사람보다는 북한사람 때문이다. 그들의 고향인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 이미 알고 있던 북한 인맥을 활용해서 단동에서 대북사업을 하기에, 대부분 단동의 토박이 조선족과 인맥이 겹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조선족은 젊은 세대가 중심을 이룬다.

단동의 토박이 조선족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조선족의 공통점은 단동에 살면서 북한 혹은 한국을 활용해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 가운데 오늘날 단동의 삶 이전에 한국에서 경제 자원을 마련한 사람도 있다. 이들 역시 다시 돌아오고 이주를 결심한 이유는 중국에 살면서 한국과 북한의 인맥을 활용해서 경제적 이익을 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단동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은 동북 3성의 조선족 인구가 갈수록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단동시내의 조선족 인구가 1990년대 말 4,000여 명에서 2010년 전후 8,000여 명 이상으로 늘어난 배경이 된다. 그들은 출신국[한국]으로 재이주를 하는 방식을 택하기보다는 거주국[중국]에서 출신국인 한국과 북한을 활용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참고문헌
  • 강주원,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 국경도시 단동을 읽는 문화인류학 가이드』(파주시: 글항아리, 2013)
  • 강주원, 「중조 국경 도시 단동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서울 대학교 인류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12)
  • 강주원, 「중국 단동에서 네 집단의 삶의 궤적: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사람」(『재외 한인 연구』 29, 재외 한인 학회, 2013)
  • 강주원, 「한국어를 공유하는 네 집단의 국민·민족 정체성의 지형: 중·조 국경 도시 단동의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통일 문제 연구』상반기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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