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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학기에 문 닫을 처지에 놓인 흥화향 조선족 학교의 가슴 아픈 이야기

한자 9月 學期에 門 닫을 處地에 놓인 興華鄕 朝鮮族 學校의 가슴 아픈 이야기
중문 处于在9月学期闭门的兴华乡朝鲜族学校的故事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수화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8월
흑룡강성 수화시 북림구 흥하조선족향. 동경127°05″ 북위46°53″
흑룡강성 수화시 북림구 흥하조선족향

흥하조선족향은 동경 127°05″ 북위 46°53″, 흑룡강성 수화시와 32㎞ 떨어진 북림구 북부에 위치하여 있다. 흥하는 약민하(諾敏河) 남안에 위치하여 평원 와지(洼地)에 속하고 지세는 평탄하다. 해발 158-162m이고 흑토청(黑土層)이 비교적 깊어 대부분 흑개토(黑鈣土)로 수전 생장에 적합하다고 한다. 기후는 대륙성 계절풍 기후여서 4계절이 분명하고 연평균 기온은 2℃로 일조 시수는 2,781시간, 축적 온도는 2,589℃, 무상기(無霜期)는 130일 정도, 강우량은 540㎜, 지세는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 장방형이다.

향 총면적은 21㎢이고 경작지 면적은 2만 4,480무, 임지 면적은 2,760무, 산림 면적은 865.8무이다. 수면 면적은 450무로 전시에서 유일한 조선족향이며 국가 그린 사무청에서 수여한 AA급 녹색 식품 수전 생산기지이기도 하다.

흥하향은 2개 행정촌 7개 자연툰 13개 촌민 소조가 있다. 현재 총 978호, 3,763명[그중 외지 노무 수출 2,271명]으로 조선족 인구 98.7%로 전향의 70% 이상이 한국과 친연 관계가 있다고 한다. 농민 95.5%이상이 벽돌 기와집에 살며 전화, 케이블100%, 인터넷100% 가능하다. 상수도를 가지고 있는 집은 60%, 인구 증가율은 –31.5%이다.

흥하향의 상징 둥글황소 조각상-흥하역사

흥하향으로 들어서는 큰 길목에 이 고장의 상징으로 서있는 둥글 황소 조각상은 찾아오는 고향 사람과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둥글 황소 아래에는 “개척”이라고 적혀있고 뒤에는 1996년 9월 28일 흥하향 정부가 둥글 황소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즉 1933년 이 땅에 온 선배들은 흥하벌을 개척하여 땅을 개척하여 처음으로 벼 재배에 성공하고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 전쟁과 항미 원조 전쟁에도 열혈청년 262명이 중국 인민 해방군과 지원군에 나섰고 그중 22명이 열사로 된 영광의 땅이라고 한다. 그들은 황소처럼 근면하고 억척스럽게 분투하여 이 땅을 개척하고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21세기 우리 후대들의 선배들의 개척 정신을 이어받아 개혁개방 시기 훌륭한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새겼다.

때문에 둥글소는 개척자의 상징이며 마을의 상징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입구에는 또 중국석유 제일 주요소가 있다. 남쪽으로 계속 가면은 흥하향 정부층사가 있다. 필자는 향장 김건화씨의 안내대로 부향장을 찾아 소개를 듣고 흥하조선족향 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흥하조선족향은 역사 문화가 유구한 민족 특색의 향진이다. 1931년 일본 제국 주의가 동북을 침략한 후 강제적으로 조선의 수많은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일본동업권업공사건설은 강덕 원년(康德 원년)[1934]에 설립되어, 귀만 선척식 회사[歸滿 鮮拓殖]와 조선 총독부 “조선 이민회 설립계획”을 제정하여 매년 2만호에 약 10만 명을 만주에 이주시키리려 하였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는 동북에서 반일 독립운동 단체와 조선인의 왕래를 단절하기 위하여 “집단 부락”과 “안전 농장”을 꾸리고 9.18 사변과 1932년 송화강 대홍수 중에서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 그리고 중동 철도연선에 산재해 있는 조선인 농민들을 “집단 부락”과 “안전 농장”집결시켰다. 흑룡강성 경내에는 일제가 꾸린 “안전 농장”이 모두 53개나 되였다. 그중에는 조선 총독부 산하의 소위 “안전 농장”이 2개가 있었다.

즉 주하현[지금의 상지시]의 하동안전 농장과 수화안전농장이었다. 구역 명칭을 수화 안전촌 농무기 연합회로 고치고 구역 내 자연툰을 9개 기(楔)로, 강덕(康德) 3년[1936년] 촌공소를 건립, 기(楔)를 9개툰, 12개 자연툰으로 하였다. 1945년 해방후 1949년 정부 건립시 흥하 신민 2개촌, 신민촌은 후에 근로촌으로 고쳤다. 1956년 흥하는 고급 농업 생산 합작사, 근로 고급 농업 생산 합작사로 고쳤다. 1958년 10월 24일 쌍하가 인민 공사로 설립시 흥하는 쌍하공사로 합병하여 흥하 작업구로 되었다.

1962년 인민 공사가 설립되고 1974년 전공사는 동풍, 흥하, 신흥, 근로 4개 생산대대로, 1981년에는 강남, 흥하, 중흥, 근로 4개 촌으로 , 1982년 수화가 시로 될 때 흥하조선족향으로 되었다. 흥하는 선배들의 근검 분투하고 특히는 개혁개방 정책아래 흥하 조선족향의 각항사업은 신속하게 발전하여 향소재지가 소도시 진 규모로 발전하여 수화시 인근 마을의 손색없는 중요한 집거지로 되었다.

마을의 희망과 꿈이었던 흥하향 조선족 학교 9월에 문을 닫아야 할 안타까운 현실

노민하의 젖줄기로 목을 적시며 무연히 펼쳐진 송북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수화시 흥하조선족향을 필자가 잊지 못하는 것은 9월 학기 당장 문을 닫아야 할 흥하조선족향 중학교 때문이기도 하다.

1934년에 설립되어 오늘 이때까지 흥하학교는 설립하여서부터 흥하향의 희망이고 자랑이었다. 그러던 학교가 당장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3명의 학생으로 지탱하던 학교는 눈앞에서 문을 닫아야 했다. 향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하고 노인협회 어르신들은 필자를 데리고 학교주위를 둘러보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흥하향의 조선족 인구는 3,700여 명, 2개 행정촌에 6개 자연촌, 소학교와 중학교를 합쳐 학생이 겨우 70명인 작은 향이지만 77년의 휘황한 역사를 기록했으며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도시 진출과 해외 취업으로 인구가 격감하면서 흥하학교 학생 수는 해마다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문을 닫을 위기까지 직면하였다. 학교 마당은 풀이 무성하고 교실은 텅비여 있었으면 한쪽 귀퉁이에 노인 협회가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한때는 이곳이 흥하의 희망이고 흥하의 기쁨이며 미래였던 자랑스러운 곳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노인들은 안타까워하고 당국자들은 어찌하였으며 좋을지 모른다. 발전 중에 있는 나라로서 농촌의 도시화 진출은 불가피한 추세이다. 하지만 집체화 때부터 부유한 향으로 원근에 소문났고 현재까지 순순한 민족 집거지와 자치를 유지해왔던 향이 학교까지 문을 닫게 되니 향장은 도시화 정책에 쫓아 민족을 단합시키고 민족의 얼을 지키며 수화를 대외에 홍보하고 외자를 적극 유치하며 흥하 민속 풍정원 건설[民俗風情園], 현대 마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흥하향 노무 귀향자 정착지 건설에 박차

흥하조선족향에서는 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고향을 애써 지켜가기 위해 노무 귀향자 정착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0여 년 내 흥하향 에서는 국내외 노무 수출을 새로운 산업으로 삼고 적극 추진하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2012 년 말까지 국내외 노동 인력이 연 1,521명으로 이는 전 향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그들의 연간수입은 약 4,000~5,000만원에 달한다. 하지만 손에 돈을 쥔 귀향자들이 고향에 투자 할 대신 뿔뿔이 고향을 떠나는 바람에 수십 년 간 피땀으로 가꾼 마을이 날로 황폐해지고 인심이 흩어져 고향을 지켜갈 사람을 찾기 힘들게 되었다.

지난해 흥하향에서는 문제의 엄중성을 심각히 인식하고 그 원인을 냉철히 분석했다. 돈을 벌기 위해 몇 년 씩 고향을 떠나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고 고향에 돌아온 이들이 고향의 양호한 생활, 투자 환경을 동경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라는 것을 터득하고 농사 환경 마련, 토지 양도 정책, 정착지 건설 등 면에서 일련의 조치를 강구해 귀향자들에게 최대한 편리를 도모해주는데 힘을 기울였다. 향에서는 지난해부터 농업 규모화, 기계화를 염두에 두고 농토를 규모화 영농호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통일적으로 전향의 토지 양도 연한을 3년 이내로 조절하고 토지 도급 관리 권한을 향경영 관리소에 부여하여 토지 양도를 규범화했고 50ha 이상 도급호에게 우선권을 주는 등 일련의 규모화 영농 부축 정책을 실시하여 귀향자들의 영농 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많은 일자리를 창출 할 수 있는 민속촌 건설 계획을 세우고 실속 있게 추진했다. 한편 외자 유치 우대 정책을 내오고 외자를 적극 유치, 민속촌 기틀 대문을 세우고 민박집을 지었으며 민속촌 주변에 식물원을 건설했다. 올해 또 수화시 건안 회사의 천만 원 자금을 유치하여 민속가옥 등 일련의 특색 건물 건설 사업을 본격적으로 재촉하고 있다. 이 밖에 귀향자들에게 양호한 생활, 투자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지난해 상급 관계 부문으로부터 전문 자금을 얻어다 향소재지 중심 거리를 아스팔트화 했고 올해는 또 수화 시내로 통하는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고 있다. 향에서는 또 도산령 전서업 유한 회사의 2,400만원 자금을 유치하여 향소재지의 중심위치에 현대 가원(現代家園)건설 공정을 다그치고 있다.

현대 가원은 전문 귀향자들을 상대로 일떠세우는 건물로서 외관으로부터 실내 구조에 이르기까지 한국 풍격을 그대로 살렸고 뜨락에 정자, 인공산, 임지, 녹지, 화단 등 풍경과 아늑한 휴식터까지 마련해 귀향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흥하향 귀향자 정착지 건설의 실질적인 진척과 더불어 지난해 귀향한 김종국 등 몇몇 귀향자들이 고향 마을 건설에 뜻을 두고 명년에 300~400ha 규모 농사에 나설 의향 밑에 준비 사업에 서두르고 있는가 하면 박홍광 등 가정에서는 민족 풍미를 위주로 한 음식점이며 민속 가옥 등을 경영할 타산으로 준비 사업을 다그치고 있다. 향정부의 적극적인 인도와 우대 조건의 출범으로 고향 정착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흥하향 현대 가원 건설 전면 가동

수화시 북림구 흥하조선족향현대 가원 건설이 6월 19일 정식 가동되어 2013년 10월 30일에 준공될 전망이다. 현대 가원은 흥하향 중심 거리에 위치, 부지 면적은 6,000㎡이고 건축 면적은 2만 4천㎡이다. 5층[1층은 상가이고 2층부터 5층까지는 주택]으로 된 현대 가원은 중국의 전통적인 건설 풍격과 조선 민족의 전통적인 건설 풍격을 접목시켜 조선 민족 문화 특색을 뚜렷이 살리며 봉페식 관리를 실시하고 실내에는 한국 온돌을 장치, 유선 텔레비전, ADSL 광대역, 전화, 상하수도를 온전히 갖추며 1주일에 두 번씩 더운물을 공급한다. 아파트 단지의 정원에는 가로등, 잔디밭, 화원을 건설하고 건강 단련 기재들을 완전히 갖추어 주민들에게 아늑한 환경과 단련 장소를 마련해 조선족 최적 거주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흥하향 당위서기 겸 향장 김건화은 “흑룡강성 사회주의 새농촌 건설의 시범향인 수화시 북림구 흥하 조선족 자치향이 새마을 건설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새마을 건설의 일환으로 마을마다 통하는 향촌도로 수축과 민족을 향소재지에 집중시키는 조선족 집거 아파트 건설, 깨끗한 향소재지 만들기를 중점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향 산하 조선족 근로촌과 흥하촌을 위주로 20만원의 도로수축 자금을 마련해 수화시에서 향으로 잇는 부분적인 도로와 조선족 두 개 촌과 7개 자연툰으로 통하는 길을 아스팔드 길로 수축해 촌촌마다 사통 팔달의 도로망을 구축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흥하향에서 수축한 아스팔드 연장길이는 17㎞에 달합니다. 조선족 인적이 점차 사라지는 황폐한 조선족향을 살리기 위해 천팔백만 원을 투자해 4층짜리 5동의 아파트 흥하가든을 건설해 흩어진 조선족을 한곳에 집중시켜 흥성거리는 조선족향의 부활을 도모했습니다. 깨끗한 환경 마련이 조선족향의 고유 특점이라고 고집하고 깨끗한 향소재지를 만들기에 진력했다.

벼짚재를 깨끗이 건사하기 위해 집집마다 비닐 자루를 배급해 통일적으로 처리하도록 했으며 북림구 환보국과의 특수한 인연을 이용해 환보 자금 50만원을 쟁취해 쓰레기 수총차를 마련한 기초 위에서 도로 양 옆의 쓰레기통 200여 개도 연말 전으로 들여올 전망입니다.” 향장과 향정부에서는 흥하조선족향을 살리기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가? 향장의 소원이 이루지면 얼마나 좋을까?

계승과 발전 만남과 홍보—흥하향 개척70돌 경축

오곡이 무르익는 2005년 8월, 수화시 흥하조선족향에서는 개척 70돌을 맞이하여 사상 가장 성대한 고향 잔치를 펼쳤다. 250여 세대 농호가 집단적으로 흥하벌을 찾아 봇짐을 풀고 첫 보습날을 박은지도 어언 70년이나 되는 흥하조선족향은 최근 연간 한국 바람, 도시 진출, 출산 격감으로 많은 노력이 고향을 떠나고 가구와 인구가 대폭 줄어드는 놀라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현실을 걱정하며 머리를 앓던 향당위와 정부에서는 마침내 묘책 하나를 구상해냈는데 그것인즉 고향의 명절을 만들어 흩어져가는 민심을 돌려세우고 고향 사람들에게 신심과 활력을 주입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하고 마련한 것이 흥하향 개척 70돌 경축행사였다. 2005년 8월 6일, 전향의 잔치가 펼쳐지는 흥하벌은 명절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흥하향으로 들어서는 큰 길목에 이 고장의 상징으로 서있는 둥글황소 조각상은 찾아오는 고향 사람과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경축행사장인 흥하 학교 운동장 에는 명절복 차림을 한 흥하향의 남녀 노소와 가깝게는 수화시, 하얼빈시, 멀리는 북경, 청도, 심수하며 흥하향을 떠났던 고향사람들로 너른 운동장을 메우고 있었다. 거기에다 경안, 철려, 수릉, 북안 등 인근 현시의 조선족 노년 협회들에서도 단체로 축하하러 달려왔고 지어 멀리 화천현 성화조선족향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채색기가 나부끼고 플랜카드를 드리운 기구들과 색색의 고무 풍선이 하늘을 메운 그 속에 방송을 타고 고향 자랑이 울려 퍼진다." 1934년 선배들이 개척한 흥하벌은 땅이 생겨 처음으로 벼농사가 있게 되었고 더불어 해방 후 전 성 수전 재배에 큰 공헌을 기여해왔습니다... 흥하향은 또 해방 전쟁과 항미 원조 전쟁에만도 열혈 청년 262명이 중국 인민 해방군과 지원군에 나섰고 그중 22명이 열사로 된 영광의 땅입니다..." 김정덕 향장의 고향자랑은 흥하향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레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심을 만끽하는 순간으로 변했다. 하늘을 진감하는 예포 21발이 울렸다. 그러자 당위서기 김남호는 "선배들의 우량한 전통을 이어받아 흥하향을 진흥시키자"고 힘주어 말하며 경축 행사의 개막을 선포했다. 둥글황소의 영각 소리처럼 힘찬 그 호소는 고향의 정을 안고 설레는 흥하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계승과 발전, 만남과 홍보"를 주제로 만들어낸 뜻 깊은 명절 행사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흥하향 개척 70돐 경축 모임에 이어 5개 현시 조선족노년협회의 문예공연, 전향 체육 운동 대회가 잇따랐고 세대별로 펼쳐지는 '동갑들 띠모임', '동창생모임'으로 크고 작은 잔치판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개혁개방 후 도시 진출과 해외 취업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마을이 피폐해지는 현황에 비추어 흥화향은 3년 전부터 수화시 북림구와 각계 인사들의 대폭지지 하에 해마다 체육 문예경연대회를 열어 흩어지는 민족을 단합시키고 민족의 얼을 지키며 수화를 대외에 홍보하고 외자를 적극 유치하며 흥화 민속 풍정원 건설, 현대 마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흑룡강 신문사이진산 사장은 축사에서 여러 조선족향을 다녀왔지만 흥화향처럼 순수한 민족 간부들로 조직되어 단합되고 현실적인 민족향은 흔치 않다며 흥화향의 지속적인 발전을 희망했다. 수화시 북림구 당위 최봉림 부서기와 흥화향김남호 서기의 특별 초청으로 대회에 참석한 하얼빈시 한상회유구준 회장은 비록 규모가 작은 향이지만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순수한 민족의 얼과 때 묻지 않은 끈끈한 민족의 정을 만끽할 수 있다며 감개 무량해했다. 이번 운동회는 수화시와 북림구 해당 민족 간부들과 사회 각계인사 그리고 300여 명 노무 귀향자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3일간의 치열한 각축 끝에 육상 경기에 근로 3조, 남자 축구에 흥화2조, 여자축구에 흥화촌, 남자 배구에 흥화3조, 여자 배구에 근로3조, 크로케에 흥화1조가 각기 우승을 따냈다 .

참고문헌
  • 『흥하향 촌지』(흥하향정 부, 2005)
  • 류충걸·김석주·김화, 『흑룡강성조선족 인구와 경제』(연변인민출판사, 2008)
  • http://www.hljbeilin.gov.cn/zhuyaodanwei/ShowArticle.asp?ArticleID=907
  • 『흑룡강 신문』(http://www.hljxinwen.cn/)
  • http://baike.so.com/doc/55743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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