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심양에서 만난 조선의 왕세자-소현세자와 강빈의 행적을 찾아서

한자 瀋陽에서 만난 朝鮮의 王世子-昭顯 世子와 姜嬪의 行蹟을 찾아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심양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7년~1644년
심양 심양 조선관
산해관 산해관
북경 북경
중국 동북 지역 만주족의 흥기와 정묘·병자호란의 치욕

16세기후반 동북 아시아는 격동의 시기였다. 천하의 중심으로 군림했던 명(明)이 쇠퇴의 조짐을 보이면서 당시 중국 동북 일대를 기반으로 흥기한 누르하치[努爾哈赤]는 만주 일대 여진부족을 통합하였다. 그는 후금(後金)을 세워 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7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맺어 온 명과 신흥세력인 후금의 사이에서 매우 복잡 미묘한 외교적 상황을 맞게 되었다. 요동을 넘보기 시작한 후금을 제어하기 위해 명은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을 거절할 수 없었던 조선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조선군 1만 3천여 명을 파병하였다. 1619년 무순(撫順)의 살리호 전역[명군에 배속되어 참전한 조선군은 심하(深河)일대에서 패전, 항복하였으므로 ‘심하전역’으로 불린다.]에서 후금은 명군에 크게 승리하였다. 이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의 균형추가 급격히 후금으로 쏠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즈음에도 조선은 여전히 유교적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후금을 오랑캐로 여기는 인식이 더욱 팽배해졌다.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이러한 친명 배금 정책은 견고해졌고, 이는 곧 닥쳐올 전쟁의 신호탄이었다. 결국 1627년 후금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었다. 이후 후금과 조선은 ‘형제 의약’을 맺었다.

지속적으로 대명 공략에 나선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연호를 숭덕으로 바꾸어 조선에게 조공을 바칠 것과 신하의 예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조정은 명분론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들의 대립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1636년 12월, 청황제 황태극이 팔기의 주력인 철기를 비롯하여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호란이었다. 청군은 일사천리로 한양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인조는 부득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전황을 살피며 항전의 의지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청군 진영을 오가며 전쟁의 종료를 위한 노력들이 계속 되었지만, 여전히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들의 명분싸움이 극심했다. 간간히 임금을 위해 항전한 의병들의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철옹성으로 여겼던 강화도가 1637년 1월 20일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충격이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수항단에서 청태종황태극 앞에 ‘삼배구고두’의 치욕적인 항복례를 행하였으니, 남한산성 항전 47일만의 일이었다.

청의 볼모가 된 소현세자와 강빈, 심양으로 향하다

패전국의 치욕은 항복 이후의 과정이 더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강화조약에 의해 세자와 왕자, 조정 관리들의 자제들이 청의 볼모가 되어 그들의 수도인 심양으로 붙잡혀 가야했다. 주전론자로 분류된 삼학사[윤집(尹集), 오달제(吳疸濟), 홍익한(洪翼漢)] 역시 심양으로 압송되어 구금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아 심양 서문 밖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향했던 조선인은 왕세자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의 수가 6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당시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崔鳴吉)이 남긴 문집 『지천집(遲川集)』 권17 제7 책2에 따르면,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 만 명이나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도 『비어고(備禦考)』 5권에서 “심양으로 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게 붙잡힌 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니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청군이 자행했던 노략질의 실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는 아이, 노인, 특히 여성들에게 극심하게 나타났으니, ‘환향녀’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강빈, 말을 타고 입성하다

소현세자 일행의 심양 입성 과정을 살펴 볼 요량으로 혼하(渾河)와 혼하 나루를 찾았다. 혼하는 혼후강, 심강 등으로 불렸다. 심양 남쪽을 가로지르듯 흐르는 강으로 흡사 서울의 한강을 연상케 한다. 현재 혼하강 양안은 신도시 건설 붐으로 상전벽해를 이루고 있다. 과거 외지인들이 심양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혼하 나루에서 배를 타야했고, 소현세자 일행 역시 이 혼하 나루에 당도해서 청측의 영접을 받은 후에라야 심양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양장계(瀋陽狀啓)』[1637년 4월 13일조]에 따르면, “1637년 4월 10일 10시경, 심양강에 이르렀더니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등 20여 명이 무리 100여 명을 이끌고 강가에 마중을 나왔다. 백사장에 장막을 치고, 건너편에 따로 장막을 쳐 놓고 우리를 맞이하는 잔치를 벌였다.” 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심양 일기(沈陽日記)』에서의 묘사는 좀 더 자세한데, 당시 세자빈 강씨가 청으로 부터 당했던 수모도 기록되어 있다. 『심양 일기』[1637년 4월 10일조]에 따르면, “용골대 등이 성 밖 5리쯤에 장막을 설치하고 준비를 하는 중이니 ‘천천히 오라’하였다. 장막에서 1마장 정도 떨어진 곳에 갔을 때 청역 김돌시가 와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잔치를 베풀어주는 것이고, 여러 장수들이 여기에 있으므로 곧장 말을 타고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하므로 세자가 걸어서 들어갔다. 용골대가 또, “황제께서 빈궁과 대군부인이 가마를 타고 입성해서는 안 된다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배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성 밑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객관으로 들어갔다. 여인, 특히 왕실의 여인이 말을 타는 것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배종하던 신하들이 극렬항의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심양 조선관과 소현세자, 조선 정부를 대신하다

1637년 4월,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후 조선 사행의 객관이던 ‘동관’에 임시로 거처하다가 한 달 후인 5월에 새로 건축한 예부 관할의 ‘심양관[조선관]’으로 거처 옮겼다. 이후 심양 조선관은 1637년~1644년 세자가 영구 귀국하기까지 약 8여 년간 소현세자와 강빈, 봉림대군 내외의 숙소 겸 조선의 대청 외교에 관한 대리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관은 세자시강원을 주축으로 조정의 6조의 체계를 가진 ‘분조’의 개념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조선관 활동을 통하여 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입장을 대리하였고, 강빈은 대명 전쟁과 수렵에 종군한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조선관의 살림을 운영해야 했다. 특히 소현세자는 심양의 황궁과 각 아문을 오가며 조선 정부를 대신한 정치 외교적 사무를 대리했다. 소현세자 일행이 청황제의 궁에 처음 들어간 것은 심양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의 일이다. 그 후에도 매월 5일, 15일, 25일 왕궁의 제삿날과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치거나 하면, 입궁하여 대접받고 진과연(眞瓜宴)이라는 잔치에 초대되기도 했다. 청측에서는 진기한 새나 짐승, 꽃이 들어오면 심심풀이로 즐기라고 세자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또한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도 보게 하여 청의 군사력을 은연 중 과시하기도 하였다.

영조, 조선관의 모습을 그려오도록 명하다

당시 심양 조선관의 형태[구조]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성경통지」에 조선관 건물의 배치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대문은 남쪽으로 나 있으며 문간채가 3칸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남향으로 5칸의 정방(正房) 이 있어 세자와 대군이 기거했다고 한다. 또 그 양편으로 5칸씩 나란히 상방(廂房)이 있어 수행한 조신들이 살림을 맡은 호방(戶房), 외무를 맡은 예방(禮房), 마필(馬匹)을 관장하는 병방(兵房), 조선관의 수선을 도맡은 공방(工房) 등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영조는 1761년 사행단으로 참여한 정사 홍계희 일행에게 심양조선관을 그려오도록 하였는데, 당시는 현종 탄강[1641년] 120년이 되던 때였다. 현종은 봉림대군이 세자와 함께 조선관에 생활하던 시기에 조선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조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화원으로 참여한 이필성이 그린 「심관구 지도」가 명지 대학교 LG 연암 문고에 소장된 『심양관 도첩』(제 3폭)에 담겨 있다. 이필성이 그린 심양 조선관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새롭게 중수한 상태의 모습이었다. 소현세자가 머물던 조선관은 세자의 귀국 후 조선 사신들의 찰원[숙소]으로 사용되었다. 조선관의 옛 터가 현재 대남문 안 골목에 남아있다. 1907년 「심양 지도」와 1924년 「최신 심양 지도」에 고려관호동, 고립관[고려의 발음인 ‘가오뤼’와 같다]의 명칭이 정확히 남아있고, 옛 터에는 지금 심양시 공로 건설 개발 총공사와 합불보보 유치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조선관 옆에는 문묘와 취생 서원[심양 서원]이 있고, 남변문에는 사행이 심양성에 들어설 때 의관을 갈아입었다던 ‘관제묘’의 터도 보인다.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 조선인 이주의 역사로 남아

심양 남변문 밖 시장에서 피로인의 인신 매매시장이 선 것은 1637년 5월 17일의 일이다. 『심양 일기』[1637년 5월 17일]와 『심양장계(瀋陽狀啓)』[1637년 5월 24일]에 따르면, 청측 에서 붙잡아온 조선인을 날마다 성 밖에 모아놓고 몸값을 치르고 데려가게 하였는데, 청인들이 요구하는 값이 너무 비싸서 그 가족들이 공적 속환을 호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만갑이 기록한 『남한 일기』[또는 丙子錄]에도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 명이나 되었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로 잡힌 이는 포함하지 않았으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가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치부책으로 삼았다. 조선인들은 청인들의 농장이나 가정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다. 여성들의 경우 처첩으로 삼거나 높은 가격으로 매매하였다. 이렇게 팔려간 조선인들은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잡혀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당하거나, 체념하고 머물러 살아야 했을 것이다.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다던 장소는 현재 남탑 공원으로 조성되어 심양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연행사들이 심양성에 입성하다가 남탑 일대에 이르면 반드시 당시의 치욕적인 일 들을 상기하곤 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들이 들렀던 광자사와 남탑[라마 백탑]이 남아 있어 답사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금 중국지역의 조선인 이주의 역사를 17세기, 즉 정묘, 병자호란 시기까지로 올려 잡고 있는 배경에 바로 당시 청나라의 일원으로 남아 살아온 조선인들의 후예들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조선인의 후예임을 상징하는 족보와 성씨, 동성 통혼 금지 등 조선 민족의 문화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그 후손의 일단이 요령, 길림, 하북 지역에 산재하고 있다. 그들은 ‘박가보’, ‘김가촌’ 등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굽히지 않은 절개, 삼학사의 흔적도 있어

조선인 노예 시장 못지않게 애달픈 사연은 삼학사의 순절에 대한 이야기다. 『심양 일기』[1637년 4월 19일]에는 “용골대가 윤집, 오달제를 뜰에 끌어다 놓고 생살 여부를 물었다. 재신이 살려 주기를 간청 하였으나 듣지 않고 죽였다.”고 했고, 『심양장계』[1637년 5월 24일]에는 “지난 4월 19일 용장이 아문(예부)에서 윤집. 오달제를 끌어내어 황제의 명을 전하며 회유했으나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학사가 심양에 끌려와 처형되기 전까지 구금되어있던 장소는 예부 관할의 어느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삼학사의 처형 장소에 대해서는 『충렬공유사(忠烈公遺事)』에 기록이 보이는데, “심양 조선관을 나와 북쪽으로 조금 가면 네거리가 나오고, 서쪽으로 돌아서면 청초기 육조가 들어서 있던 아문(衙門) 거리다. 이 아문 거리의 끝이 바로 척화신인 삼학사(斥和三學士)가 처형되기 전까지 갇혀 있었던 예부(禮部) 건물이다. 그들은 심양 외성(外城)의 서문 밖에 끌려가 처형됐는데, 그곳은 오랑캐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문 밖 외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이 일대 역시 아파트 단지와 공원[중산 공원]이 들어서 옛 흔적을 전혀 찾을 길 없지만, 1920년대 일본군이 제작한 심양지도에 옛 형장이 표기되어 있어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일제시기에 만주, 심양에서 삼학사를 현창하는 사업들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발해 대학 교정에 남아있다. 바로 「삼학사비 중수비」이다. 발해 대학의 설립자인 고천문갑 학장의 비석 발굴과 한국 기업[독지가]의 후원으로 비석의 복제 본을 제작하여 한.중 양국에 세웠다. 현재 발해 대학에 삼학사를 상징하는 정자인 학사정과 자료전시관이 소박하게 꾸려져 있다. 천문갑 학장 서거 후 관리가 부실하여 이마저 온전치 못한 상태라고 전해진다. 이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필요하다.

속환된 조선인 거두어 청의 땅에 ‘조선식 농사’를 짓다

심양 볼모 생활이 5년째로 접어들면서 청은 용골대와 청역 정명수 등을 통해 ‘직접 농사지어 자급자족 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심양 일기』1641년 12월 12일에 처음으로 조선관의 식량을 자급자족하라는 청황제의 명이 전달되었다. 당시 조선관에서 청으로부터 불하받은 야판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동남쪽에 위치한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새(老家塞) 두 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사하보(沙河堡) 근처의 150일 갈이, 무순지역의 사을고(士乙古) 근처 중 150일 갈이를 농토로 제공했는데,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처음엔 모두 농사짓기를 거부했다. 거부의 이유는 분명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기회의 상실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조선관의 관료들이 연일 청 조정과 용골대 등 실무자들에게 농사의 부당함을 항변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청측에서는 이미 다른 나라의 질자들에겐 1년 만에 농사짓도록 했지만, 조선에겐 특혜를 주어 이만큼 왔으니 이젠 직접 농사짓는 일을 미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강빈과 소현세자는 결국 농작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강빈은 조선인을 속환하여 농사일을 거들게 하고 농작물의 수확에 따른 인부들의 격려도 잊지 않았다. 농사수확의 결과를 조선정부에 알리는 문헌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관에서 농사일을 관장하는 일에 강빈의 역할이 지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당시 농사를 지었던 5곳의 농장지는 어디에 있을까? 농장지는 일부 지명만 전한다. 문헌과 고지도, 근대 지도 등을 토대로 현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하보는 옛 지명대로 남아있다. 왕부촌은 왕부관둔-흥농촌으로, 노가채는 노관채-노과새로 바뀌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명의 변천은 만주국시기, 문화 혁명 시기에 바뀌었다고 한다. 특히 흥농촌, 노과새 일대는 조사당시에도 마을마다 수전[벼농사]에 모심기가 한창이었고, 모심기하는 마을마다 조선족 마을이 있었다. 중국 동북 지역에 수전을 전한 것이 조선 민족이라 했던 말이 여기서도 확인되는 듯싶어 반가웠다. 『심양장계』에 왕부촌과 노과새의 위치를 잘 기록하고 있는데, 1932년 일본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무순」[만주1:100,000 봉천15호]지도에 지명이 남아있고, 위치 역시 『심양장계』의 기록과 유사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대는 청대에도 관용 농장지역으로 활용되던 공간이었다. 지금 이 일대는 신도시 건설 붐으로 농지 측량이 진행 중이다. 더욱 정밀한 조사와 관련 연구가 시급하다.

관소 무역으로 조선관의 재부 늘려

심양 조선관에서 이루어진 관소 무역은 명·청 간 전쟁 수행 중에 전쟁물자의 확보가 다급해진 청의 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현세자 일행에게 호감을 보여 온 팔왕[아제격] 및 제왕들의 조선 물품 거래 요구가 점차 확대되었다. 이들은 국법으로 사사로운 교역을 금함에도 불구하고, 측근을 통한 잦은 안부와 제철 과일, 물건들을 보내 ‘잘 지내자’는 마음을 전하였다. 팔왕이 측근을 시켜 몰래 은 500냥을 보내 2백냥으로는 호피.수달피. 청서피. 꿀. 잣 등을 사고, 3백냥으로는 무명을 사달라고 한 일은 관소 무역의 신호탄이었다.

강빈이 조선관에서 청측의 요구로 조선의 물품을 교역할 당시의 상황을 『인조실록』[인조23년 6월조]에서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하고, 곡식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무역 활동은 명·청 전쟁으로 전쟁 물자와 경비 를 부담해야하는 조선관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다면 나름대로 경제적인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호재였을 것이고, 어쩌면 이를 넘어서 재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조선관 무역은 조선조 국제 무역의 한 장면이었다. 강빈은 국제무역을 경험하고 주도했던 여성 CEO격이었다.

당시 조선관 무역의 주요한 파트너였던 팔왕의 원찰[팔왕을 모신 사찰]이 심양성 북쪽에 ‘대법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대법사는 ‘팔왕사’로 불리기도 한다. 사찰 대웅전의 동쪽에 별도의 팔왕사라는 전각이 있고, 그 안에 갑옷을 입은 팔왕의 소상이 모셔져 있다. 심양에서 소현세자 일행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이러한 관계 인물과의 연계 공간도 함께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공간을 재구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볼모 생활의 고단함, 기록(장계, 일기)으로 남겨

심양 조선관의 볼모 생활을 기록한 사료(史料)는 조선 조정에 보낸 『심양장계』와 『심양 일기』가 있다. 『심양장계』는 소현세자 등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그를 수행한 시강원의 신하들이 승정원에 보낸 장계를 수록한 문헌이다. 『심양장계』와 별도로 조선관의 세자와 일행들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바로 『심양 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을 ‘세자시강원’에서 정리한 일기(日記)이다. 일기는 일기체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매일 매일의 날씨와 학문에 관한 강론을 비롯한 일상의 동정, 본국과의 연락, 수행한 신하들의 사정 등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에 거주하며 겪은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하였다.

주요 내용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명·청 전역 종군, 황제의 사냥 동행, 청의 조선 군대 징발 요구와 조선의 대응, 임경업의 군대징발과 탈출문제, 청태종의 죽음, 청의 북경 천도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심양 상황에 대한 조선 조정에서의 반응들이 『인조실록(仁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서도 관련 기사가 보인다. 심양에서 조선관의 흔적을 찾거나 농사 경작지의 동선을 찾는 일, 무역 활동의 상황들은 이러한 기록물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기에 현장 조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밀한 현장 조사의 필요성이 있다. 현재 이러한 역사 공간들이 지역 개발 과정에서 무차별, 무계획적으로 사라지고 훼손, 멸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왕세자 일행 동선, GPS 좌표로 남아

『심양장계』와 『심양 일기』, 그리고 고지도와 각종 자료를 동원하여 심양 지역에 산재한 조선 왕세자 일행의 심양 행적을 추적하였다. 혼하 나루터, 조선관 옛 터, 농사 경작지 위치비정, 조선 대신들이 억류되었던 심양의 각 아문 터, 조선인이 팔려간 노예 시장 터, 심학사의 순절 추정 장소, 조선 사행의 숙소, 관소 무역을 촉발했던 팔왕 아제격의 유적 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강빈 일행의 행적은 심양에서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황제를 따라 크고 작은 전투에 종군하거나 사냥행사에 참여하였고, 청 입관 후에는 북경에서 머물기도 하였으니, 그들의 행적에 대한 공간적 범위도 확대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행적을 추적하는데 있어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이 남긴 기록은 절대적이었다. 필자는 그 역사의 현장을 기록사진과 GPS 좌표로 기록하였다. 다행히 이러한 현장 영상 기록과 GPS 좌표 기록 작업을 통해 역사 현장의 외형은 사라진다 해도 그 공간적·지리적 위치는 남을 것이다. 단정 지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기에 ‘비정’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심증’과 ‘개연성’의 확보, 즉 ‘연계 고리’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스럽기도 하다. 지속적인 현장 조사와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점이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의 볼모가 되어 중국심양에서 약 8년간의 생활을 해야 했던 소현세자와 강빈은 당대 조선이 처한 현실을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처했던 인물들이었다. 심양은 후금과 청의 수도였고, 청이 입관한 이후로는 청의 배후도시로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공간이다. 명·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왕세자[빈]로서 겪었던 볼모 생활의 흔적들이 아직도 심양의 이곳저곳에 지명으로, 옛 터로 남아있다. 이러한 조선의 왕세자와 세자빈, 왕자, 조선의 피로인[볼로로 잡혀와 청의 땅에서 살아간 조선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현장]을 살펴본다는 선조들의 정신과 흔적을 잊고 사는 후세인의 반성이며,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되살리는 일이다. 더구나 심양은 17세기중엽, 심양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한중 교류의 한 상징이 아니던가.

참고문헌
  • 『심양장계(沈陽狀啓)』
  • 『심양 일기(沈陽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비변사 등록(備邊司謄錄』)
  • 나만갑, 『남한 일기(南漢日記)』
  • 나만갑, 『병자록(丙子錄)』
  • 박지원, 『열하 일기(熱河日記)』
  • 정약용, 『비어고(備禦考)』5
  • 최명길, 『지천집(遲川集)』
  • 계승범, 『조선 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 관계』(푸른 역사. 2009)
  • 한명기,『역사 평설 병자호란』1·2(푸른 역사. 2013)
  • 신춘호, 「‘소현세자빈 강씨’ 역사 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소고」(『인문 콘텐츠』17, 인문 콘텐츠 학회, 2009)
  • 신춘호, 「심양 코리아타운 ‘서탑’과 한국 문화」(『재외 한인 연구』 24, 재외 한인 학회. 2011)
  • 『1924最新奉天市街图』
  • 『1927년 沈阳地图』
  • 姜念思, 『瀋陽史話』(瀋陽出版社, 2008)
  • 「浑河官渡与十里码头」(『时代商报』, 2009. 12. 14)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