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355년전, 나선정벌 조선군 이동로를 따라 격전의 현장을 가다

한자 355年前, 羅禪征伐 朝鮮軍 移動路를 따라 激戰의 現場를 가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54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58년
목단강송화강흑룡강 흑룡강성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
검푸른 흑룡강, 격전의 현장에 서다

2013년 7월 17일 늦은 오후, 답사팀은 먹구름 잔뜩 비낀 하늘과 검푸른 물결 넘실대는 흑룡강(黑龍江)을 찾았다. 필자가 한 손엔 ‘된장 술’, 또 한 손엔 카메라를 들고 이 을씨년스런 흑룡강 위에 선 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원지고 있는 355년 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바로 나선정벌과 조선군 조총수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선정벌(羅禪征伐)은 조선후기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2차례[1654년·1658년]에 걸쳐 파병한 조선군이 송화강(松花江), 흑룡강 일대에서 나선[羅禪, Russian의 音譯]을 정벌한 사건을 말한다. 17세기 중반부터 러시아는 자원이 풍부한 흑룡강 일대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조선은 청의 요청에 의해 흑룡강 일대의 러시아를 치기 위해 1654년[1차], 1658년[2차]에 걸쳐 파병하였다. 나선정벌은 조선군의 지략과 무력[조총술]으로 승리한[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전사, 특히 해외 파병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또한 2회의 나선정벌은 조선이 나선[러시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승리함으로써 정묘·병자호란 시 조선[조정]이 겪었던 정신적 피폐함을 일부 치유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찾은 이곳은 흑룡강성 동북부에 위치한 동강시(同江市) 삼강구(三江口)이다. 중국의 동삼공로(同三公路)가 시작되는 기점이자 송화강흑룡강의 합수 지점이다. 바로 이곳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이 조청 연합군과 러시아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답사팀이 이곳을 찾은 오늘은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날, 그러니까 음력 6월 10일이다. 답사팀은 이번 답사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전투가 벌어졌던 날, 그 현장에 서는 것’으로 잡았다. 시간 맞춰 도착하기 위해 답사 일정과 동선을 맞추었다. 왜냐하면 355년 전 전투에 참여했던 조선군의 고충과 이역만리에서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그 때 그 장소에서 그들의 심정으로 현장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답사팀은 지난 며칠 동안 두만강 너머 조선군의 출발지인 북한회령(會寧)을 조망한 후 연길(延吉), 왕청(汪淸), 영고탑(寧古塔), 목단강(牡丹江), 그리고 이곳 흑룡강 어귀까지 먼 길을 달려왔다. 답사 내내 나선정벌에 참여한 조선군의 심정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지난 며칠간 날씨가 좋았는데, 부금시(富錦市)를 지나 목적지인 동강시 삼강구에 들어서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바람도 제법 불었다. 답사팀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격전의 현장을 둘러보고 싶어졌다. 송화강흑룡강의 합수 지점 삼강구. ‘검은 용’이라는 흑룡강의 강 이름은 이 검은 물빛에서 유래하고 있다.

답사팀은 흑룡강 선착장에서 작은 유람선을 빌려 20여 리를 더 내려갔다. 흑룡강 물살을 거슬러 한참을 지나 유람선이 멈췄다. 문득 이곳이 전투가 벌어졌던 곳과 비슷한 위치라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러시아 국경인 섬이 길게 이어졌다. 강 가운데 붉은 부표가 서있다. 이 일대가 바로 조선군이 싸운 격전지였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던 격전의 현장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강이었다. 355년의 시공간을 넘어 여전히 강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신유(申瀏)의 『북정록(北征錄)』에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7명의 조선군 시체를 전투 다음날인 6월 11일에 동향끼리 짝지어 흑룡강변 모래언덕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유는 “아아! 이국 땅에 와서 모래벌 속에 묻힌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측은한 마음 이를 데가 없구나!”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적어두기도 했다. 답사팀은 엊그제 연길의 조선족 동포들이 준비해준 된장 술을 말없이 강물에 뿌렸다. 이곳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원혼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술을 강물에 뿌린 후, 아군과 대적한 220여 명의 러시아군 전사자들의 원혼을 위해서도 술을 부었다.

부디 흠향하시기를! 뱃전에서 잠깐 행한 의식이었지만, 답사에 참여한 모든 분들의 표정에서 경건함이 묻어났다. 몇 잔은 남겨 답사팀 전원이 음복 하였다. 조선인이 이역만리 전장에 왔다가 전사하여 불귀의 객이 되어 머무는 곳이니 이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한 술로 된장 술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된장 술’은 연변 조선족 기업이 ‘조선 된장’을 원재료로 개발한 토속주이다. 연길을 비롯한 중국 동북 지역에서 꽤 인기가 있는 민속주다. 필자는 ‘작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뱃전에 앉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약간의 파고가 있는 강물이며 강변의 모래톱과 언덕까지. 어느 순간엔 지나가는 유람선이 마치 도망치는 러시아군과 같았고, 멀리보이는 러시아변경의 섬 숲엔 강물에 빠져 숲속으로 달아났다던 러시아군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당시 치열했던 전장의 상황이 물결처럼 그려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되돌아보는 그날의 전투 장면

1658년 6월 10일, 전선 11척으로 무장한 러시아군이 흑룡강을 거슬러 오던 중 아군의 선단을 만났다. 적선은 단청이며 형태가 우리 배와 비슷했다. 러시아군은 10리를 더 후퇴하다가 강기슭에서 진을 갖췄다. 전투의 시작은 포격전이었다. 대포를 쏘며 공방전이 치열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자 아군은 적선에 근접하여 활과 조총을 쏘며 접전했다. 아군의 조총에 적군들이 쓰러지고 배 안으로 숨어버렸다. 숨어버린 적을 소탕하기 위해 조선군은 쇠갈고리로 배를 끌어 당겨 선체에 불을 질러 소탕했다. 도망가는 적과 백병전이 이어졌다. 전멸 직전에 '적선을 불태우지 말라'는 청나라 장수 살이호달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의 어이없는 명령에 당황하는 사이 조선군은 반격을 당하였다.

적선에서 되돌아오는 조선군을 쫒아 나온 러시아군이 쏜 총에 7명이 전사하고 1명이 다쳤다. 부상 당했던 1명도 끝내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조선군 대장 신유는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화전을 쏘아 적선 7척을 모조리 불태웠다. 적병 중엔 강물로 뛰어 내리는 자들도 있었다. 만약 여세를 몰아 싸웠다면 적 40여 명을 모조리 무찌를 수 있었으나, 살이호달이 식재지심[貪財之心, 재물에 욕심이 생김] 때문에 아군의 작전을 제지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신유는 청나라 장수의 오판으로 무고한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분개하였다. 살이호달은 병자호란 당시 물헌장[만주족 군제로 부원수를 가리킴]의 직함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인물로 매우 탐욕적이었다. 이날의 전쟁으로 적선 11척 중에 4척만이 남았고, 저녁에 적선 1척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조·청 연합군, 아니 조선군의 승리였다.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한 러시아측 보고서인 『17세기 노중 관계 자료집』(제1권 제103호)에 따르면, 러시아군 사망자 220명, 77명 부상, 95명 탈출의 기록이 있다. 신유의 『북정록』과 일치한다. 『북정록』의 기록적 가치가 돋보이는 점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남진과 조선의 운명

러시아군이 흑룡강까지 진출하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었는가? 15세기말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러시아는 17세기 중반부터 자원이 풍부한 흑룡강 일대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는 국가 재정의 10%가 모피에 의존한 것이었는데, 시베리아와 흑룡강[아무르강]일대는 모피 조달의 최적지였다. 시베리아 일대를 점령한 후 러시아는 당시 무역상이자 용병인 코사크족을 앞세워 세력을 점차 흑룡강 일대까지 확장하며 남진하였다. 이들은 1651년 흑룡강변에 알바진성을 구축하여 남진정책의 거점으로 삼았다. 1652년[효종 3년]에는 우수리강 하구에 아찬스크성을 구축하게 되면서 원주민인 아창족(阿槍族)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아창족은 청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청은 중원 내륙 공략에 군비를 집중했던 관계로 만주 수비에는 부실하였다. 영고탑 도통이 2천명의 병력으로 수차례 러시아군과 대적하였으나 번번이 총과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군에게 대패하였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청은 조선의 조총군을 앞세워 나선의 남진을 제지하려 했다.

조선군의 파병은 병자호란의 결과로 맺어진 「정축화약(丁丑和約)」에 따른 피할 수 없는 파병이었다. 「정축화약」(5조)에 “명을 정벌하기 위해 그대 나라의 군병을 요구할 때 기한 내에 보내라.” 라는 명목에 따른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경험했던 효종[당시 봉림대군]은 절치부심하며 북벌(北伐)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청을 치기위해 준비한 조총군 양성은 오히려 청을 위한 쓰임으로 바뀌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따를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이었다.

두 차례의 해외 파병, 나선정벌(羅禪征伐)

제1차 나선정벌은 청이 1654년[효종 5년 1월]에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면서 성립되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 측 사신이 전한 바, “나선은 영고탑 일대의 별종입니다.”라는 정보를 통해 러시아를 처음으로 인식하였다. 효종은 함경도 북우후 변급(邊岌)을 주장으로 삼고, 조선 정예군 150여 명을 영고탑으로 파병하였다. 이들은 1654년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너 4월 16일 청군과 영고탑에서 합류, 다시 후통강(厚通江)[혼동강(混同江), 지금의 송화강]에 이르러 러시아군과 접전하여 호통(好通)[지금의 의란(依蘭)]에서 격파하였다. 5월초 주위 5리의 토성을 쌓았다. 16일에 회군하여 6월 13일에 영고탑에 도착, 7월에는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제2차 나선정벌은 그로부터 4년 후의 일이다. 1658년(효종9년, 2월 19일)에 청은 또다시 조선에 조총군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병마우후 신유를 대장으로 삼아 정예군 200여 명, 초관(哨官)·기고수(旗鼓水)·화정(火丁) 등 65명을 선발하여 진용을 갖췄다. 이들은 5월 초, 3개월분의 군량만을 가지고 길림 영고탑으로 출전하였다. 조선군은 회령두만강을 건너고 부르하통하[연길]~영고탑에 도착하여 청군과 합류하였다. 해랑하(海浪河)와 목단강 합류지점에서 승선하여 수로를 이용하여 목단강송화강에 도착하였다. 조·청 연합군은 6월 10일에 흑룡강 합류지점에 이르러 흑룡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적선과 조우했다. 이곳에서 러시아 대장인 스테파노프와 오노프레이꼬 부대[선대]와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조총수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러시아 선(船) 10척을 불태우고, 오노프레이꼬를 비롯한 적군 22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조선군의 사상자로는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전투 직후 청의 요청에 따라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해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 12월 12일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회령으로 복귀하였다.

나선 정벌은 비록 병자호란 강화조약의 결과에 따른 해외파병이었지만, 병자호란의 치욕이후 북벌을 국시로 삼아 절치부심했던 효종에게는 이 두 번의 나선정벌이 조선의 군사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나선정벌은 조선이 러시아와 처음으로 군사적 접촉을 한 계기이자 두 번의 파병을 모두 승리로 이끈 해외 파병사의 중요한 경험이었다.

나선정벌 조선군 이동로, 오롯이 남아

나선정벌 조선군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현장 답사를 나서기로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미 2013년 1월, 일군의 연구자들이 모여 답사팀을 구성했었다. 당시 참여한 연구자는 국문학, 한문학, 문화콘텐츠학, 소설가까지 다양했다. 현장을 대하는 관점은 달랐을지라도 답사의 목적은 비슷했다. 필자는 전문성을 살려 영상 기록의 임무를 자청했다. 답사에 나서기 전 카메라와 노트북, 메모리를 충분히 확보했고, 특히 GPS 기기도 준비했다. GPS 좌표를 기록함으로써 역사 현장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수집하고 고증하는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정보들이 문화지도 구축의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는데, 이번 나선정벌 조선군 이동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확보하는 영상 기록물과 GPS 좌표 기록 역시 향후 「나선정벌 문화지도」를 구축할 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답사팀은 신유의 『북정록』에 근거하여 조선군 이동 경로에서 나타나는 지명의 확인과 남아있는 유적(공간)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1차적인 목표를 삼았다. 변급의 1차 나선정벌은 신유의 2차 나선정벌 노정에 포함되는 관계로 신유의 노정을 답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동안 ‘나선정벌 조선군이동로’에 대해서는 몇 편의 학술논문을 제외하고 현장연구에 대한 성과는 학계에 보고된 바가 거의 없던 관계로 당시 조선군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쉽지 않았다. 답사팀은 우선 신유의 『북정록』을 국역한 박태근선생의 『국역 북정일기』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 관련 고지도와 영상물[KBS한국사傳, 흑룡강의 200전사-신유] 등 여타의 문헌 자료를 참고하여 답사에 대한 사전학습과 준비를 병행하였다 .

나선정벌 조선군 이동로는 신유의 『북정록』을 근거로 크게 육로와 수로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현대 지명과 함께 구분하면, 육로는 함경북도 회령 집결~두만강~연길~백자령~마련하~석암~영고탑[청군 합류]~해랑하이며, 수로는 해랑하~목단강~의란~송화강~가목사~부금~동강[흑룡강 합수처]~흑룡강[격전지]까지 이다.

답사팀은 1차 답사[2013년 1월]에서 회령~두만강~삼합~연길~왕청~영고탑~해림~목단강 일대에 이르는 육로 구간을 답사하였고, 2차 답사[2013년 7월]에서는 회령~두만강~삼합~연길~왕청~영고탑~해림[해랑하와 목단강 합수처]~목단강~의란[1차 나선정벌 격전지, 목단강송화강 합수처]~송화강~가목사~부금~동강 삼강구[송화강흑룡강 합수처]~흑룡강[2차 나선정벌 격전지] 등 육로와 수로 전 구간에 걸쳐 답사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조선군 이동로는 약간의 지명변천, 도로개설, 옛길 멸실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잘 남아 있었다. 특히 목단강~송화강~흑룡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는-약간의 지형적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그 자리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다.

조선군의 이동 흔적, 그 때 그 장소

2013년 두 차례의 현장 조사를 겸한 답사가 진행되었다. 1차 답사[1월, 겨울]에서 옛 지명을 확인하고 몇 몇 공간들을 확인한 것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덕분에 2차 답사[7월, 여름]는 조선군이 숙영했던 마을 두어 군데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경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당시 조선군 이동 경로도 원형에 가깝게 재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1차 답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고라이령 넘어 대립자(大砬子)에서 용정(龍井) 초입 선바위에 이르는 옛길, 모아산 서북쪽을 끼고 돌아 연변대학 병원으로 이어진 옛길, 연길~길심령~백초구(百草溝)~왕청을 잇는 옛길, 관제묘가 있었다던 노묘촌(老猫村)에서 노송령촌에 이르는 백자령 옛길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이 옛길들은 신유의 『북정록』에 기록된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특히 ‘60여리나 빽빽하게 늘어선 잣나무와 전나무 숲이 하늘을 가려 종일 걸어도 해를 볼 수 없었다.’던 백자령 옛길을 만났을 때의 감동은 컸다. 백자령은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큰 산의 고개다. 지금은 고개명이 노송령으로 바뀌었고, 신작로가 옛길을 대신하고 있다.

2차 답사에서는 1차 답사에서 찾을 수 없었던 백자령 옛길의 일부를 고지도와 구글지도, 중국 전자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답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끊어진 백자령 옛길의 위치를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현장에서 주민들의 증언과 안내 도움을 받아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곤 했다. 현장 답사 중에 마을 어귀에 벌목하여 쌓아둔 전나무의 길이가 10m가 넘는 것을 보니 신유의 기록이 틀림이 없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백자령 옛길은 전나무 잣나무가 울창한 삼림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지명도 백자령에서 노송령으로 바뀌었고 산전체가 삼림공원으로 지정되어 옛길의 전부를 걸을 수는 없지만, 공원 안으로 들어가 길을 확인하였다. 일부 구간은 당시 나선정벌에 나선 조선군의 심정이 되어 직접 걸어보기도 하였다. 355년 전의 그날처럼 매우 더웠다. 백자령 옛길을 가로질러 난 철로는 연길과 목단강을 연결하는 철로다. 과거 일본군의 군수물자, 목재를 수송하던 철도였기도 하거니와 철로 변에는 일본군이 사용하던 초소의 흔적이 더러 남아 있어 이곳이 과거 만주국의 일부였음을 새삼 생각게 하였다.

석암진(石岩鎭)석두참(石頭站)은 목단강을 넘는 나루터다. 『북정록』에는 조선군이 영고탑 전문 도착 전에 건넜던 나루터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군은 나루터에 도착한 오후부터 건너기 시작하여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모두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더딘 이유는 조선군이 도강할 때는 작은 마상선이 5척이 있었지만, 배가 작고 비좁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건너도 다 못 건넜다고 했다. 지금도 넓디넓은 목단강을 건네주는 철선이 있다. 겨울 답사에서는 얼음 위를 걸어 조선군이 도강했던 마을로 갈 수 있었으나, 여름 답사에서는 뱃사공 아주머니가 당겨주는 철선을 타고 건넜다. GPS 기기로 거리를 측정했더니 강폭이 150m가량 되었다. 물살도 제법 거세편이어서 도강이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루터의 역할은 그대로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만 변하고 있는 셈이다. 철선을 타고 목단강을 건너는 동안 조선군의 모습을 상상했다. 강이 얕아서인지 멱 감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의 물장구가 시원하게 느껴졌지만, 문득 강행군에 시달리며 달려온 조선군은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석암진 나루를 건너 해랑하진 옛 길을 따라가면 조선군이 청군과 합류해야하는 1차 목적지인 영고탑성에 도착한다. 지금은 구가(舊街)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영고탑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답사팀은 조선군이 숙영했다는 성 북벽의 바깥에 있는 공터들을 둘러보았다. 옆으로 해랑하가 흐르고 공터엔 옥수수만 무성했다. 이곳에서 청나라 장수는 조선군 조총수들을 청군에 배속시킴으로서 신유의 지휘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영고탑은 조선후기 고지도나 문헌에 빈번하게 등장할 정도로 조선 지식인들의 관념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지리 공간이었다.

수로에서의 공간도 확인하였다. 영고탑을 출발한 조선군이 배를 타기 위해 이동했던 해랑하와 목단강의 합수 지점, 1차 나선정벌의 격전지였던 의란현목단강송화강 합수 지점, 2차 나선정벌의 격전지 흑룡강 등을 모두 확인했다.

미련으로 남은 미답지, 다시 짐을 꾸려야 하는 이유

답사팀은 고지도와 문헌 자료, 지역 주민들의 도움[구술 증언]을 받아 옛길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2차 답사에서 확인한 수로 구간은 현지 사정상 배를 이용할 수 없었던 관계로 강변의 지방도와 옛길을 따라 답사하였다. 답사 과정에서 『북정록』에 기록된 지명들의 상당수가 당시 만주어나 지역 방언의 음차 표기이기 때문에 현대지명과 대조하는데 어려움도 있었다. 답사과정에서 박태근 선생의 『국역 북정일기』에 수록된 세세한 지명 풀이 주석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여전히 미답 지역도 있다. 일정이 빠듯하여 조선군이 숙영하며 주둔했던 목단강변의 선응기가선, 송화강변의 약사가선, 열벌가선 등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목단강-송화강-흑룡강에 이르는 삼강은 민족의 강, 혈연의 강이다. 지금으로부터 355년 전, 조총과 3개월치 군량을 메고 4,000리 북만주 일대를 내달렸던 조선 조총수 200여 명과 신유장군의 사연이 세 강 위에 흐르고 있다. 그들이 걸었던 노정은 청대의 역참로이자 무역로였다. 그런가하면 근대 시기 조선인이 좀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던 북방 이주 경로이기도 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잊혀 지게 마련이다. 답사를 마치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왔지만, 355년전 역사 공간의 미답지에 대한 미련이 여전하거니와 노정에서 만난 조선족 노인들과 스러져가는 초가집들이 어른거렸다.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또다시 답사팀을 꾸려야 하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 『북정록(北征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비변사 등록(備邊司謄錄)』
  • 『배시황전(裵是愰傳)』
  • 박태근 역, 『국역 북정일기』(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0)
  • 계승범, 『조선 시대 해외 파병과 한중 관계』(푸른 역사, 2009)
  • 반윤홍, 「비변사의 나선정벌 주획에 대하여 : 효종조 영고탑 파병절목을 중심으로」(『한국사 학보』11, 고려사 학회, 2001)
  • 권혁래, 「북정록과 나선정벌 연구-회령∼목단강 구간을 대상으로」(『열상 고전 연구』37, 열상 고전 연구회, 2013)
  • 이승수, 「아무르강 위에서 황어의 귀환을 상상하다-신유의 북정록」(『대산 문화』 가을, 대산 문화 재단, 2013)
  • DVD(KBS 한국사傳, 흑룡강의 200 전사-신유)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