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세계를 보는 창, 연행-그 현장을 가다

한자 世界를 보는 窓, 燕行-그 現場을 가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시대 조선/조선 후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80년
명대의 역참 구련성~요양
연행 압록강~요양~심양~산해관
연행(燕行), 세계를 보는 창(窓)

전통 시대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국제 사회, 즉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는 사행(使行)[이하 이 글에서는 연행(燕行)으로 통칭]이었다. 연행은 곧 세계 인식의 창(窓)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 외교의 기조인 사대(事大)와 교린(交隣) 정책에 따라 중국과 일본 등에 사신(使臣)을 보냈다. 전통 시대 국제 외교의 틀이 바로 연행이었다. 이들 사신은 명대(明代)엔 조천사(朝天使), 청대(淸代)엔 연행사(燕行使)라 불렸다. 한편, 교린 정책에 입각하여 일본으로 보낸 사신은 통신사(通信使)라고 하였다. 조선과 청 양국의 외교 관계가 공식화 된 시점은 조선이 청나라의 칸[汗]을 황제로 인정한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연행이 이루어진 시기는 청이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긴 1644년부터 마지막 연행이 떠났던 1894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중국 연행을 다녀 온 이들 관료,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 견문의 소회를 남겼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바로 사행기록(使行記錄), 즉 연행록(燕行錄)이다.

연행록(燕行錄), 기록 유산적 가치 커

당대 연행에 참여했던 관료들은 조선 시대의 지배 계층으로 조선조 통치 철학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지식인들이었다. 장부로 태어나서 좁은 조선 땅을 벗어나 드넓은 중원을 경험한다는 것은 일생 일대의 기회요, 평생의 꿈이기도 했을 터! 연행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날그날의 일기로 기록하였고, 또한 여행의 소회를 시와 문장으로 남겼다.

이러한 기록을 일반적으로 ‘사행 기록’이라 불렀다. 시기마다 명칭은 달랐다. 원대에는 「빈왕록」, 명대에는 「조천록」, 청대에는 「연행록」이라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연행록’으로 통칭한다. 이러한 연행록은 국왕에게 보고용으로 작성되는 공적 기록과 연행원이 개인 문집에 남긴 사적 기록으로 구분된다. 기재되는 내용 또한 공적 기록은 정보 보고, 사적 기록은 견문의 감상과 소회를 담고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공적 기록은 서장관이 복명(復命) 시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하는데, ‘별단’, ‘문견별단‘으로 불린다. 흔히 연행록의 백미로 꼽히는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의 『열하 일기(熱河日記)』는 당시 박지원이 정식 수행원이 아닌 자제 군관 자격으로 참여하여 기록을 남겼기에 사적 기록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문학·역사·사상적 측면에서 매우 뛰어나 조선후기 지식인층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열하일기』는 그 이전의 연행 기록인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 연행 일기(老稼齋燕行日記)』, 홍대용(洪大容)의 『담헌 연기(湛軒燕記)』와 더불어 ‘연행록의 삼가(三家)’로 널리 알려졌다.

연행록은 한반도에서 연경(燕京)[북경]으로 이어지는 연행 노정이라는 특정한 공간[육로·해로]을 중심으로 약 6~ 700여 년의 시간과 1,700여 회에 이르는 사신 왕래 속에서 얻어진 여행 기록이다.

연행록의 수도 약 1,000건 이상으로 추정되나 현재 임기중 교수에 의해 보고되고 있는 연행록의 수는 약 560여 권에 달한다. 연행록에는 한중 외교사는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 인식, 전쟁, 무역, 경제, 문화 교류, 선진 문물의 체험, 인적 교류 등 여행을 통하여 체험한 소회들이 자유롭게 기록되어져 있다. 때문에 인류가 보유한 수많은 문헌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기록유산이다. 그런 점에서 연행록 역시 ‘세계 기록 유산’에 포함될 만한 가치를 가진 기록 문헌이라고 하겠다.

연행 노정(燕行路程), 문화 교류와 소통의 길

연행을 통하여 정치·외교적 활동 이외에 중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교류와 소통들이 있어왔다. 당대 국제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던 연행 활동의 이해를 전제로 당시 지식인들이 외국을 경험했던 견문의 공간이자 조선과 명(明)·청(淸) 간의 문화사적 교류가 빈번하게 진행되었던 소통의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연행 노정(燕行路程)은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 역사와 문화가 스며있는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연행 노정은 중국과의 가장 밀접했던 외교 연행로이자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던 문명 교류의 통로였다. 특히 중국 동북 지역의 요령성을 관통하는 연행 노정은 전통 시대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역사성과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고 의미를 찾고자 할 때 반드시 살펴야 할 대상이다. 아래에서 연행 노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연행 노정의 출발과 도강(渡江)

사신단이 출발에 앞서 임금께 하직한 후,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방물을 준비하고,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사대(査對)를 하였다. 사대는 중국에 보낼 표(表)와 자문(咨文)을 점검하는 일이다. 사대를 마치면 모화관과 홍제원(弘濟院)에서는 조정의 동료들과 가족 친지들의 전별연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고양(高陽)-파주(坡州)를 거쳐 임진강(臨津江)을 건너고 개성(開城)~평양(平壤)~안주(安州)~숙천(肅川)~의주(義州)에 이르는 십여 일간의 국내 여정을 마친다. 의주에서 도강 날짜를 정하여 조정에 장계를 보내고 나면, 도강 날 아침부터 의주부윤과 서장관의 입회하에 압록강(鴨綠江) 모래 사장에서 엄격한 세단계의 물품 검사를 마치면, 구룡연(九龍淵) 나루에서 배를 타고 도강을 한다.

사신단의 중국 지역 내 여정을 크게 세 단위로 분류해보면, 초절(初節)[압록강~심양(瀋陽)], 중절(中節)[심양~산해관(山海關)], 종절(終節)[산해관~북경]로 구분할 수 있다. 초절과 중절은 지금의 행정 구역으로 요령성(遼寧省) 지역이고 종절은 하북성(河北省)과 북경시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 글에서는 요령성을 경유하는 초절과 중절 구간인 압록강~심양~산해관 구간의 연행 노정과 주요 공간들을 중심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연행 노정의 초절, 압록강~심양

초절 구간을 구체적인 지명을 따라 구분하면 압록강~구련성(九連城)~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설리참[설례참(薛禮站)]~통원보(通遠堡)~초하구(草河口)~연산관(連山關)~회령령(會寧嶺)~청석령(靑石嶺)~낭자산(狼子山)~요양(遼陽)~영수사(靈水寺)~십리하(十里河)~심양 지역에 이르는 구간이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도강하면 본격적인 중국 지역 연행 노정 구간에 진입한다. 연행 노정은 조선 정부나 사신이 마음대로 바꾸지 못했다. 중국에서 정한 노정을 따라야 했다. 그 노정은 주로 역참(驛站)에 근거하고 있는데, 원대(元代) 중국 동북 지역 역참 루트인 동팔참(東八站)이 기본을 이루었다. 동팔참이란 ‘요양 동쪽의 여덟 개 참’ 이란 의미로, 조선과 중국의 접경 지역인 구련성[鎭江城]에서 탕참~봉황성~진동보[鎭東堡, 薛禮站]~진이보[鎭夷堡, 通遠堡]~연산관~첨수참(甛水站)~요동(遼東)에 이르는 역참(驛站)을 말한다.

연행 기록마다 동팔참의 위치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712년 김창업의 『노가재 연행 일기』에는 봉성에서 요동까지, 1798년 서유문(徐有聞)의 『무오 연행록(戊午燕行錄)』은 책문에서 심양까지라 했고, 1832년 김경선(金景善)의 『연원 직지(燕轅直指)』에서는 책문에서 영수사(迎水寺) 까지로 인식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리 개념에 대해 다소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지리 개념은 크게 동팔참의 틀 속에서 인식되고 있었다. 동팔참은 연행 노정과 일치하고 있다. 그 현장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의주 통군정(統軍亭) 아래 구룡 나루에서 배를 탄 사신단은 압록강 도강 후 구련성 들판에서 노숙하였다. 청은 그들의 조상이 흥기한 발상지로 여겨 압록강에서 책문까지 약 150여리를 사람이 살지 않는 봉금(封禁) 지대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국경의 관문인 책문에 이르기까지 1~3일 가량은 구련성과 탕산성(湯山城), 온정평(溫井坪)[오룡배(五龍背)] 일대에서 노숙해야 했다. 탕산성 마을 뒤 탕하변에는 황해도 평산의 총수산(蔥秀山)과 닮은 기암 괴석이 서 있는데, 사신단은 그 개울 앞에서 밥을 지어먹고 노숙하며 고국에 대한 향수에 젖기도 하였다. 책문은 변문(邊門), 고려문(高麗門), 가자문(架子門)이라 부르는 관문으로 조·청 간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식되던 곳이다. 봉황성장(鳳凰城長)의 허락을 얻고서야 책문에 진입할 수 있었고, 이곳부터 조선 사신에 대한 청의 공식적인 접대가 이루어졌다. 사신단은 봉황성과 봉성시(鳳城市)를 지나 조선인이 송참(松站)이라 이름붙인 설례참의 찰원(察院)에서 숙박하였다. 동팔참의 진이보(鎭夷堡)인 통원보(通遠堡)에는 옛 역참의 흔적이 남아있다. 연암박지원일행은 이곳 통원보 마을에서 여름장마로 며칠간 발이 묶였는데, 이때 박지원은 중국의 풍속과 제도, 민간문화를 꼼꼼히 기록하였다. 초하구와 연산관을 지나면 연행 노정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회령령[지금의 마천령(摩天嶺)]과 가장 험준한 고개인 청석령을 지나 요동에 이르게 된다.

회령령과 청석령의 고개는 지금도 산악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청석령은 옛길의 흔적이 가장 온전히 남아있어 옛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남다른 감흥을 갖게 하는 곳이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의 볼모가 되어 청석령을 지날 때 읊었던 ‘음우 호풍가(陰雨胡風歌)’는 이후의 사신단에게 비분감을 심어주어 늘 회상하게 만들었다. 사신단이 청석령 고개를 넘다 우마차가 넘어지고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는데, 더러 첨수참 입구의 탑만촌(塔灣村)에서 호랑곡(虎狼谷)으로 우회하여 낭자산참(狼子山站)에서 합류하는 노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청석령 서쪽고개는 임시 도로 활용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하고 돌[靑石]이 널려 있어 사람만 다닐 수 있다. 청석령 고개에는 영험한 관제묘가 있었다는데, 그동안 터만 남았다가 2012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다. 『열하 일기』에 언급되는 관제묘이다.

석문령(石門嶺) 고개를 넘어 냉정촌(冷井村)과 고려총(高麗叢)의 낮은 산을 끼고 돌면 본격적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바로 요동벌이다. 연암이 ‘한바탕 크게 한 번 울만 한 곳’으로 묘사한 ‘호곡장론(好哭場論)’의 무대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요동벌판은 요하(遼河) 서쪽의 요서(遼西)벌판 의무려산(醫巫閭山) 일대까지 이어진다. 아미장(阿彌莊)에서 사신단은 팀을 나누어 일군은 목창(木廠) 나루에서 태자하(太子河)를 건너 숙소참인 영수사로 향하고, 일군은 구요동(舊遼東)으로 들어가 연행의 장관인 ‘요동 백탑(白塔)’을 관람한 후 영수사로 이동하였다. 영수사에서 난니포(瀾泥鋪)~십리하(十里河)를 거쳐 백탑보(白塔堡)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며 쉰 후, 혼하(渾河) 나루를 건너 심양성에 들어갔다.

병자호란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심양조선관에서 8년간의 볼모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심양을 거쳐 간 많은 사신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비분강개하고 시문으로 소회를 남기기도 하였다. 당시 심양 조선관은 대남문안 동쪽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벽 아래에 있었으니 청나라 측의 감시도 수월하였을 것이다. 세자가 영구 귀국한 후에는 한동안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심양시 공로 건설국 건물과 합불보보 유치원이 들어서 있다. 1924년 일제에 의해 제작된 「봉천지도(奉天地圖)」에 ‘고려관(高立館)’, ‘고려관 골목길[高麗館胡同]’ 이라는 명칭으로 그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구련성에서 심양에 이르는 ‘초절’ 구간은 연행 노정의 여느 구간보다 조선의 산하(山河)와 닮은 구석이 많은 지리적 특징이 있었다. 높은 산과 고개, 하천이며 기암괴석도 조선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홍경모(洪敬謨)는 『총수산기(葱秀山記)』에서 “동팔참의 산천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강역은 다르지만 기맥이 상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연암은 『열하 일기』에서 봉황산과 조선의 명산을 비교했고, 고구려안시성(安市城)의 위치를 비정하기도 했으며, 청석령, 요동 일대를 지나면서 북방 고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사의 강역이 펼쳐진 공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신단이 임무를 마치고 요동에 들어서면 조선의 산천과 너무나 닮아 있는 이곳을 지나며 고국을 향하는 심리적 안정을 얻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병자호란의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향하던 소현세자, 강빈(姜嬪), 봉림대군 부부, 재신관원들, 그리고 수십만의 조선인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심양까지 끌려왔던 통한의 사연이 지금도 전하는 곳이다. 연행 노정에서 옛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 바로 ‘초절’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연행 노정의 중절, 심양~산해관

연행 노정의 중절은 심양성을 벗어나 서북 방향으로 이어진다. 영안 석교(永安石橋)~요하[遼河, 주류하, 거류하]~신민(新民)~이도정(二道井)~반랍문(半拉門)~소흑산(小黑山)~광녕성(廣寧城)[북진묘(北鎭廟), 의무려산]~여양(閭陽)~십삼산(十三山)~대릉하(大凌河)~금주(錦州)~소릉하(小凌河)~송산(松山)~행산(杏山)~탑산(塔山)~영원성(寧遠城)[조대수(祖大壽), 조대락(祖大樂) 패루]~동관역(東關驛)~중후소(中後所)~맹강녀묘(孟姜女廟)~산해관에 이르는 노정이다. 산해관까지 보통 열하루 길이 소요되었던 중절 구간은 연행 노정에서 가장 지루하고 힘든 구간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영안석교는 청태종황태극의 재위시인 1641년 건설한 석교로 길이 37m, 너비 14.5m에 이른다. 아치형 교각 3개가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교량이다. 그 아래로 포하(蒲河)가 흐르는데 지금도 옛 정취가 잘 남아있다. 영안 석교의 완공식 축하 행사에 청 황제를 따라 소현세자가 참여했다는 기록이 『심양 일기(瀋陽日記)』에 전한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박제가는 영안 석교를 중건할 때 이곳을 지나갔다. 요하는 거류하(巨流河), 주류하(周流河)로 부른다.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지리적 공간이자 고구려 강역의 경계로 삼았던 곳이다. 사신단은 거류하를 건너 거류하보성에서 숙박했다. 필자를 비롯한 연행 노정 답사팀이 수차례 거류하성의 토성 흔적과 도강처의 위치를 찾아 현지조사를 한 바 있다.

심양 외곽의 요하 일대는 북방 몽고 지역에서 불어오는 잦은 황사로 사신들의 발목을 잡았다. 연행록에는 요하 일대에서 모래 폭풍을 만나 일주일 가까이 움직이지를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엔 모래가 입안에 씹힐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 만주족들은 그들이 사는 집도 환경에 맞게 개조하였다. 이로 인해 사신단이 요서 지역을 지날 때 매우 독특한 형태의 가옥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의 가옥처럼 대들보가 있다거나 지붕이 팔작이나 맞배의 형태가 아닌, 너른 마당과 같이 일자로 펼쳐진듯한 지붕의 가옥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무량옥(無樑屋), 일자옥(一字屋)이라고 하였다. 이는 북쪽의 몽고 사막에서 불어 닥치는 모래 먼지며 바람이 지붕에 걸리지 않고 통과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가옥들은 요하를 지나 소흑산 일대부터 산해관 내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도정~반랍문~소흑산 구간은 봄이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을 이루었던 곳이자, 여름철이면 장맛비에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넘쳐 사신단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구간이었다. 흑산은 의무려산으로 가기 전의 작은 도시다. 요양과 규모가 비슷하다. 사신단은 이곳에서 돼지를 잡아 나눠 먹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험준한 산과 하천, 끝없는 요동요서의 황톳길을 짐수레 끌고 오기까지 고단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은 더 멀다. 따라서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사기를 북돋아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요서 벌판의 끝자락에 길게 펼쳐진 의무려산 연봉들을 바라보며 행군하다보면 이내 광녕성으로 진입한다. 지금의 북진시(北鎭市)이다. 광녕성은 명대 동북 방면의 주요 군사기지로 ‘유주중진(幽州重鎭)’이다. 명말에는 이성량(李成梁) 장군이 중국 동북 지역을 장악했던 주둔처로 성안에 이성량의 패루가 웅장하여 연행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성량 장군의 아들 이여송(李如松)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조선을 도왔던 인물이니 조선 연행사들에게는 이곳이 각별했을 것이다.

광녕성 서쪽으로 북진묘와 의무려산이 있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산신을 모신 곳이다. 김창업과 홍대용도 동쪽 협문을 이용하여 북진묘에 들어가 유람하였다. 의무려산은 북진묘에서 약 5㎞가량 더 들어가야 한다. 이곳은 모두 사신단의 유람처였다. 특히 1617년 이정구는 『의무려산기』를 남겼다. 이로부터 100년 후인 1713년 김창업은 관음각에서 묵었고, 1725년 조문명이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의무려산과 각별한 이는 아무래도 홍대용일 것이다. 1776년 의무려산을 찾은 홍대용의무려산을 유람하고 각별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실옹(實翁)’과 ‘허자(虛子)’가 의무려산에서 세상사와 학문에 관한 문답을 벌이는 내용을 글로 지었는데,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이 글은 18세기 조선이 이룩한 동아시아 지성사의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홍대용은 이 글을 통해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해체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의무려산은 600m 높이의 바위산이다. 기암 괴석들이 많아 흡사 금강산이나 월출산을 연상시킨다. 백두산, 천산과 더불어 중국 동북 지역의 3대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의무려산 산속에는 김창업과 홍대용이 머물렀던 관음각(觀音閣)과 복숭아 향기 가득했었을법한 도화동(桃花洞)이 남아 있어 옛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대릉하와 관외사성인 금주~송산~행산~탑산으로 이어지는 노정은 명·청 교체기 가장 격렬했던 전쟁터였다. 심양에서 볼모생활 중이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곳 금주, 송산 전투에 청 황제를 따라 종군하기도 했다. 연암은 이곳을 지날 때 당시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면서 ‘어육지장(魚肉之場)’으로 묘사한바 있다. 연행 노정은 관외사성을 지나 영원성으로 이어진다. 영원에 못미처 사신단이 잠시 들러 차를 마시고 쉬어가던 곳이 ‘영녕사(永寧寺)’라는 작은 암자였다. 연행록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간이자, 지명이다.

최근 현장조사에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퇴락한 영녕사를 확인하였다. ‘다붕암(茶棚庵)’으로도 기록되던 영녕사다. 영녕사는 길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 관리를 하는 모양인지 암자 안에는 작은 불상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관운장 소상이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영녕사에서 쉰 사신단은 곧장 영원성 동문을 이용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영원성은 지금의 흥성(興城)이다. 지금은 중국내 보존이 가장 잘 된 4대 고성의 하나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있지만, 이곳은 명청 교체기 청의 기세를 꺾어 명에 마지막 승리를 안겼던 명장 원숭환(袁崇煥)과 후금(後金)누르하치[努爾哈赤]의 일대 격전이 치러졌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승가도를 달리던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의 결사 항전 의지와 홍이포(紅夷砲)의 위력 앞에 부상을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누르하치는 이때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몇 개월 후 사망하였다. 사신단이 영원성에 이르면 당시 원숭환과 누르하치의 일대 격전에 대한 논평도 많이 했지만, 당시 명장들이 후금으로 투항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기록이 영원성에서 본 조대수, 조대락 패루에 관한 인상이었다. 영원성 동문으로 들어간 사신단은 성안 사거리의 고루를 지나 남문 방향의 관도(官道)에 우뚝 서 있는 조대수·조대락 패루를 보게 된다. 명장 조승훈·조대수·조대락 일가의 공훈을 기려 세운 2개의 패루다. 패루의 기묘하고 대단한 위용에 놀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신단은 조씨 패루를 통하여 명의 멸망과 쇠퇴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다. 공훈을 자랑한다지만, 나라를 배신한 장수였으니 오히려 욕되다는 것이었다.

1653년에 이곳을 거쳐간 동지사 심지원(沈之源)도 “황제의 일을 전달하는 관도에 감히 일개 장수가 자신의 패루를 세울 정도니 명의 기강이 해이해진 이유를 알겠다.”고 하였다. 명·청 교체 이후 이곳을 지나던 대부분의 사신들이 비슷한 견해를 연행록에 남기고 있다. 사신단이 영원성 내에서 숙박하는 경우 더러는 조승훈의 옛집을 이용하기도 했다. 1608년 최현도 이곳에서 숙박했음을 『조천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패루 서쪽에 있다던 조씨 고거는 현재 방직공장으로 변하여 옛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다행히도 문헌기록과 주민들의 구술 증언으로 그 위치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신단은 영원성을 거쳐 맹강녀 사당을 찾아 그녀의 원혼을 위로하고 맹강녀 전설을 상기하곤 했다. 이어지는 연행 노정은 산해관과 천하 제일관으로 이어진다. 산해관으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연행의 종절 구간은 산해관 무령(撫寧)~영평부[영평성, 이제묘(夷齊廟)]~풍윤(豊潤)~고려보(高麗堡)~옥전(玉田)~계주(薊州)~통주(通州)~동악묘(東嶽廟)~조양문(朝陽門)~옥하관(玉河館)에 이르는 구간이다.

산해관은 약 6,000㎞에 달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자 시발점이다. 산해관은 중원의 주요 관문이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에 입각해서 문명과 비문명, 중화와 오랑캐를 가르는 경계를 삼은 곳이 산해관이었다. 산해관 안을 관내라 했고, 곧 문명의 세계로 인식하였다. 연행사들에게 산해관은 중국의 규모와 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박지원은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만리장성이 서쪽으로 이어지는 곳에 각산이 있다. 또 각산장성 너머의 산중에 각산사가 있다. 월사 이정구가 다녀갔고, 김창업이 유람하며 묵었던 사찰이다. 몇 차례의 소실과 복원으로 지금은 서현사로 사찰명이 바뀌었지만, 과거 각산사였음을 말해주는 ‘각산사수비기념비’가 서현사 경내에 있다. 김창업이 각산사를 찾은 내력이 『임유현지』(1878년)에 「유각산사기」로 전하고 있다.

연행 사신(使臣)들의 시선이 머물던 공간,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지배층의 대중국 관념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의리를 견지해왔다. 이러한 인식이 점차 변하기도 하는데, 조선 후기 18세기에 들어서면, 강력한 청의 통치력에 놀라면서 오랑캐로 여겨왔던 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청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북학적 사고를 지닌 실용 학풍의 지식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과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연경의 유리창 일대에서 청의 관료, 문인들과 학문적, 개인적 교유 관계를 맺기도 하였으며,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지닌 천주교 신부들과는 천주당을 통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서구의 문물과 과학적 지식 등 선진 문화에 대한 소양을 체득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연행(燕行)은 자각의 기회가 되었다. 연경 체험을 통해 세계인들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고, 세계관의 확장을 이루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연행은 세계를 보는 창(窓)이었다.

일찍이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는 『조선 상고사』(총론)에서 “(전략) 당지에 집안현의 일람(一覽)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독(萬讀)함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리었다.”고 한 바 있다.

최근 중국 동북 지역으로 향하는 연구자들의 발길이 빈번하다. 여행자들의 방문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행 노정은 한 나라의 700년 역사를 거치면서 꾸준히 외교 사절이 오가고, 동서 문물이 접변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연행록의 대부분이 연행 노정의 현장에서 경험한 자연, 산천, 풍속, 문화를 여행자의 시각에서 체득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옛사람들의 행적과 그들의 생각을 밝히는데 있어 문헌 연구는 한계가 있다. 연행 노정 공간에 한번쯤 서서 과거 연행사들이 걸었던 시각으로 ‘옛 길’을 걸어볼 일이다.

참고문헌
  • 『심양일기(瀋陽日記)』
  • 박지원, 『열하 일기(熱河日記)』(민족 문화 추진회, 1977)
  • 임기중, 『연행록 연구』(일지사, 2002)
  • 소재영 외, 『연행 노정, 그 고난과 깨달음의 길』(도서출판 박이정, 2004)
  • 김태준 외, 『연행의 사회사』(경기 문화 재단, 2005)
  • 김태준 외,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푸른 역사, 2005)
  • 신춘호 편, 『연행노정기』(실학박물관, 2019)
  • 김경록, 「조선 시대 조공 체제와 대중국 사행」(『명청사 연구』30, 명청 사학회, 2008)
  • 사행록 : 조선의 눈으로 보는 역사 여행(http://saheng.ugy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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