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1910년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근거지, 한흥동

한자 1910年代 北滿洲 地域의 獨立 運動 根據地, 韓興洞
중문 1910年代北满洲地域的独立运动的根据地, 韩兴洞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계서시 밀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북만주 지역 독립투쟁 근거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부터 1920년대까지
소재지 북만주 밀산부
정의

이상설·이승희 등에 의하여 1910년대를 전후한 시기 북만주 밀산에 건립된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

봉밀산과 흥개호 곁으로 이주하여 온 한인들

흑룡강성 남동부에 위치한 밀산시흥개호(興凱湖)를 끼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밀산의 이름은 봉밀산(蜂密山)에서 ‘봉’자를 떼고 밀산이 되었다. 봉밀산은 밀산벌 동남간, 흥개호 연안에 위치한 해발 574m의 산으로, 옛날 그 산에서 석청을 많이 땄던 것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밀산’이라는 지명을 접하게 되면 첩첩산중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밀산은 산이 아니라 허허벌판이다.

밀산의 각 동리의 이름에는 네 민족의 역사와 흔적 그리고 숨결이 묻어 있다. 우선 중국인 점산호(占山戶)들이 이 지역을 처음으로 개척하면서 붙인 동리의 이름이다. 다음으로는 이주 한인들이 개척하여 이름을 정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일본인들이 집단 농장을 세우면서 붙인 동리의 이름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있었던 만주족 원주민들이 붙인 동리 이름이다.

봉밀산 부근에 있는 동리 봉밀산은 산 이름이 그대로 동리 이름이 된 곳이다. 반절하(半截河)·백포자(白泡子)· 한흥동(韓興洞) 등은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름 붙인 동리이다. 봉밀산 밑 당벽진(當壁鎭)은 토성(土城)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오랜 동리이다. 옛날에는 당벽진(擋鱉鎭)이라 썼는데, 이 말은 흥개호에서 발과 그물로서 고기를 잡는 동리라는 뜻이다. 오늘날 임호(臨湖)라고 불리는 동리는 원래 고려영자(高麗營子)였다. 고려영자는 지일진(知一鎭)· 귀인촌(歸仁村)· 백포자(白泡子)· 봉황청(鳳凰德)에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베링이라고 부르는 황강(荒崗)· 동림자(東林子) 등지에도 고려영자가 있었다.

당벽진 고려영자에 이씨 성을 가진 한인들이 거주하였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흥개호는 입동(立冬)이면 호수가 얼어서 러시아에서 말이 끄는 눈 썰매를 타고 쉽게 건너올 수 있다. 대흥개호는 천리, 소흥개호는 백리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1904년 밀산현[현재 지일진(知一鎭)] 동문 밖에 귀인촌을 만든 사람들은 노령에서 건너온 김씨·이씨·오씨 등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인들의 이주는 주로 가족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들 중 오씨들의 가세가 제일 번창했고 이들이 살았던 동리가 밀산에서 가장 오래된 동리다.

한인들의 밀산 이주는 주로 흥개호를 건너 이루어졌다. 1889년(광서 15년)에 러시아에서 송장진·원덕일·최화보·변우형·김성규·오봉산 등이 흥개호를 건너 당벽진에 거주하다 다시 노령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이때 당벽진에는 30여 호가 여전히 남았다고 한다. 1900년대 초 러시아로부터 넘어온 한인들이 흥개호 물이 들어가는 어구 용왕묘(龍王廟)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용왕묘는 당벽진에 있다. 당벽진 부근의 수게창모·운몽케 등이 이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한인촌은 당벽진·봉황덕·황강 등 흥개호 연변에 직선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들은 성진(城津)·웅기(雄基)·삼수(三水) 출신들이었다. 그 후 1916년 수분하 일대에서 논농사가 성공하자 많은 한인들이 모여 들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동녕에서 목릉을 거쳐 들어왔다. 1930년대 일제가 집단농장을 만들고 밀산을 동안(東安)이라 불렀을 때는 기차를 이용하였다.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길도 흑룡강, 우수리강을 건너 남행하여 밀산으로 왔다.

이 곳 사람들은 러시아와 흥개호라는 자연 국경을 사이에 두었기에 중국에서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러시아로 넘어가고, 또 러시아에 큰 변동이 생기면 중국으로 넘어와 살았다. 흥개호는 호수의 3분의 2가 러시아 땅이고 그 나머지는 중국영토이다. 그 곳은 호수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바다와 같다. 밀산의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이 수많은 한인들을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흥개호 부근 당벽진· 한흥동· 백포자 등지는 1910년대에 개척되었다. 동해(東海)· 흑해(黑海)· 연주산(連珠山)· 계림(鷄林) 등지는 1920년대 중반에 개척되었다. 한인들에 의하여 개척된 논농사는 푸논·산논·휴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푸논은 논을 푼다는 뜻으로 논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산논은 생산에 들어간 논을 말한다. 휴경은 원시적 농경 방법이기 때문에 삼포(三圃)제도처럼 몇 년 농사짓고 논의 기운이 떨어지면 휴식을 주는 것을 말한다.

밀산은 함경북도 출신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해 온 곳이었다. 이들은 삼남인(三南人)들과는 달리 논농사에 익숙하지 못하여 푸논·산논·휴경의 농사법을 채용하였다. 밀산의 논농사는 192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1910년대 한흥동 일대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중동 철도를 이용한 이주 길이 열리면서 밀산으로 한인 이주가 활발하여 졌다. 목릉현 팔면통과 영안· 목단강 등지에서 논농사가 성공하였다. 그 여파는 밀산에 까지 미쳐 흥개호 주변의 수로와 하천을 이용한 논농사가 크게 일어났다. 이와 같이 밀산 지역은 1910년대부터 한민족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지리적인 여건과 사회적인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꿈과 정열을 독립운동의 기지 건설에 쏟아 부은 선구자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1905년과 1910년의 을사· 경술 국치 이후 국내에서는 자유로운 독립운동의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일제의 세력권 밖에서 한민족의 집단적 세력권을 만들어 한민족 독립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한민족의 집단적 세력권을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통하여 만들고자 하였다. 해외 독립운동 기지에서 한민족의 힘을 길러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전개하는 것이 한민족이 독립으로 가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기지에 민족 정신이 투철한 한인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거기에서 산업을 일으켜 생활 안정과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청소년을 모아 근대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시켜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과 민족 운동의 전위대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그 기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국내 동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해외에 있는 전체 한민족을 조직화하고 무장시켜 간다면 언젠가는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1910년대 신민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수립하고 있던 독립 전쟁론(獨立戰爭論)이다.

봉밀산에 한국 독립운동의 기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이상설(李相卨)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상설이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착수한 것은 1906년 4월이다. 그가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띠고 조국을 떠날 때 부터였다. 용정촌서전 서숙의 창설도 그러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1909년 여름 이상설은 헤이그 사행(使行)으로 1년 남짓 구미에서 활동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한민회 회장 김학만(金學萬)과 『해조신문』의 주간 정순만(鄭淳萬), 유학자 이승희 및 윤일병(尹日炳) 등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이상설은 국외 독립운동 기지의 구체적인 후보지를 물색하고, 토지를 사들이기 위해 모금 운동을 폈다. 여기에 그가 미국에 있을 때 약속된 대로 국민회 등 미국에 있는 교포들로부터 보내오는 자금을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기지 후보지를 사방에 물색한 결과 제1차로 중국·러시아 접경에 자리 잡은 흥개호 주변으로 정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우선 봉밀산 지역을 잡았다. 이상설을 비롯한 민족 운동가들은 이 지역의 일부를 사들이고 개척을 시작하는 일을 이승희에게 맡겼다. 이승희는 이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백 리가 넘는 이곳을 1909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면밀히 답사했다. 이승희는 경상도 성주 출신의 유학자로 을미사변 이래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상소와 배일 운동을 벌이다가 1908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남 유학자로 이름 있던 한주(寒洲)이상진(李震相)의 아들로서 면우(俛宇)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이진상의 학통을 이은 학자였다.

1909년 가을 이승희는 우선 봉밀산 밑에 기름진 땅 45방(方)을 사들였다. 1백 여 가호를 이주시키면서 이승희는 이곳의 이름을 한흥동이라 지었다. 한국을 일으킨다는 뜻의 한흥동 마을은 바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한흥동 건설 자금은 모금 운동으로 충당하였다. 그 방법은 이상설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교포 유지로부터의 모금도 추진하면서 국내에 사람을 보내어 자금을 거두어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후원회는 1909년 연말에 미국에서 송금해 온 5천 달러를 기금으로 하여 설립한 원동 임야 주식 회사(遠東林野株式會社)였다. 이 회사는 우선 중국과 러시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로 하여금 주식을 사게 하고 그 자금으로 토지를 사들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든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학교를 세우고 한민 학교(韓民學校)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조국 광복을 꾀한다는 뜻에서 강재(剛齋)라는 호를 한계(韓溪)라고 고치고 이름까지도 대하(大夏)라고 고쳤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4년 동안 머물면서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모든 정력을 쏟았다. 그는 여기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한민 학교의 학생들에게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다. 또한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흥동 한인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즉 「일칙명」·「오강 십목」등을 지어 한흥동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암송하도록 하였다. 전통 유교의 바탕을 잃지 않고 생활 속에서 유교 이념을 실천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910년 3월 밀산에 한흥동이 건설되면서 미국에서 건립된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에서도 태동 실업 주식 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미국 한인 사회에서 자본금 5만 달러에 1주당 50달러의 1천 주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한흥동 부근의 미개간지 2천 4백 에이커를 사들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한흥동 경영에 호응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던 신민회에서는 국외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독립운동의 당면 과업으로 내세웠다. 1910년 4월 신민회의 중요 간부이던 안창호(安昌浩)·조성환(曺成煥)·김의선(金羲善)·이강(李剛)·김지간(金志侃) 등이 중국청도(靑島)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독립운동의 큰 방략을 논의하는 청도 회의에서 한흥동을 경영하고 있던 밀산부봉밀산 부근의 미간지 10만평을 사들여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는데 중지를 모았다. 청도회의에 참가했던 신민회의 간부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독립운동 기지의 경영을 밀산부를 중심으로 추진하였다.

1910년 봄 미주 공립 협회(共立協會) 회원 김성무(金成武)는 안창호의 명을 받고 목릉하(穆稜河)· 밀산(密山)· 백포자(白泡子)에 들어와서 신한 국민회(新韓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김성무는 평양의 개신교인데 러시아를 거쳐 밀산 지역에 들어와 교회를 중심으로 이주 한인 사회에서 아동 교육·농업 장려·동포 구제 등의 사업에 진력하였다. 그는 김명성(金明星)과 함께 사숙을 열었고 개신교 전도를 함께 하였다.

1913년 이승희이상설의 후원으로 봉밀산자(蜂密山子)에는 밀산 무관 학교가 세워졌다. 봉밀산은 밀산시에서 약 35㎞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높이는 574m이다. 봉밀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북쪽으로는 밀산시가 보이고, 동남 방향으로는 백포자가와 흥개호가 보인다. 봉밀산은 밀산시 방향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흥개호와 백포자 방향은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세가 적군이 이 지역을 공격하기는 어렵고 아군이 지키기 쉬워 무관 학교 부지로는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1914년 한국 독립운동의 전선적인 인물이었던 홍범도(洪範圖)가 밀산 무관 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밀산의 한인 사회는 단오절이 되면 모두 모여서 큰 행사를 중국인들과 함께 즐겼다. 십리와· 쾌당별이 등 학교가 있었던 동리의 청년 운동은 북만에서도 유명하였다. 독립군이 밀산의 한인촌에 갈 때면 휴식처와 식사가 제공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밀산 쾌당별이[당벽진]에서는 모든 이주 한인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독립군단이 떠났다가 다시 도착 했을 때에도 이주 한인들은 힘을 합하여 그들을 도왔다.

1920년 10월 북간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맞서 한국 독립운동사상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린 독립군단이 후퇴지로 선정한 것도 바로 밀산이었다. 청산리 대첩이 후 북정에 참여한 독립군들은 안도현 대사하· 돈화· 목단강을 따라서 북으로 행군하였다. 그들은 동경성· 영안· 목단강· 목릉을 거쳐 밀산에 도착했다.

1921년 1월 북정에 참여한 독립군들이 밀산에 모여 항일 무장 단체의 대통합을 이룩하였다. 총인원 3천여 명의 대한 독립 군단의 결성으로 1920년대 독립운동은 큰 전환을 이룩하였다. 그 간의 숙원이었던 항일 무장 단체의 통합이 밀산에서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밀산은 3천여 명의 독립군이 집단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독립군은 노령 이만으로 그 집결지를 변경하였다. 그 후 노령으로 넘어간 독립군은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북만으로 넘어왔다. 이때도 그들은 밀산에 모여서 전열을 가다듬고 목릉·영안·동녕 등지로 활동 근거지로 삼아 떠나갔다. 1921년 8월 26일 밀산 당벽진을 지키던 서일 총재가 토비의 습격을 받아 수많은 청년 병사들이 희생당하자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했던 곳도 역시 밀산이었다. 서일은 홍암나철(羅喆) 이후 제2대 교주 김교헌(金敎獻)과 함께 대종교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서일이 밀산에서 순교하면서 밀산은 대종교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밀산에 새겨진 대종교인의 발자취

1909년 나철에 의하여 중광된 대종교는 단군교라 불렀는데 1년 만에 개칭되어 대종교가 되었다. 출범 당시부터 독립운동 단체의 성격을 지녔던 대종교는 무장 투쟁의 방법을 줄곧 유지하였다. 그러면서도 무장 운동만을 위주로 하지도 않았다. 항상 무장 투쟁과 함께 종교 운동· 교육 운동· 산업 진흥 운동 ·민중 계몽 운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대종교 세력은 1914년 국내에서 투쟁의 한계성을 느끼고 총본사를 백두산 북록 청파호(靑波湖)로 옮겼다. 포교 영역을 4도 교구와 외도 교계(外道敎界)로 정하였다. 1914년 대종교만주를 무대로,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30만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그 가운데서 북도 교구 지역은 이주 한인촌 형성이 아직 활발하지 않아 대종교의 교세가 미약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동경성· 영안· 밀강· 영고탑· 밀산 등지에 한인촌이 형성되면서 대종교의 중심축은 북만 일대로 옮겨갔다. 1922년 4월 대종교는 총본사를 북만주 영안현 남관(南關)으로 이전하여 각처에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였다. 김교헌은 1922년과 1923년 2년 동안에 48개 곳에 시교당을 설립하였다. 김교헌은 자신의 저서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가지고 민족 정신과 애국심을 앙양시키는 교육에 힘썼다. 1923년 교통(敎統)을 이어 받은 제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의 포교 활동은 밀산· 동경성 등지에서 대종교도들에 대한 피검 사건이 계속되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윤세복대종교에 대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교세 확장에 힘써 대종교의 사회· 결사· 교육 등 현실 참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자 하였다.

1925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으로 대종교 포교가 불법화되자 1927년 총본사를 당벽진으로 옮겼다. 윤세복은 이곳에서 대종교의 재기를 준비하였다. 1933년 윤세복은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교단의 총본부를 옮기기로 하였다. 흥개호 부근인 당벽진에서 본부는 밀산 평양진 신안촌(平陽鎭 新安村)으로 옮겼다. 이곳은 이주 한인촌이며 목릉· 목단강· 영안· 동녕 등지로 나갈 수 있는 교통의 길목이었다. 밀산에서 영안까지의 한인촌에는 신일시교당(信一施敎堂) 등 4개소가 신설되었다. 북만일대 동지선(東支線) 연선을 따라 한인촌을 연결해 나가면서 시교당이 설치되었다.

현천묵대종교도들을 중심으로 밀산 백포자에서 대한 군정서를 재정비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대 북만 지역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민부는 창립 이후 밀산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여 훈련을 받으며 농사도 함께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북만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김좌진(金佐鎭)은 역시 밀산에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또한 밀산을 근거지로 신민부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북만 지역에서 대종교가 가장 크게 일제에 의하여 탄압을 받은 사건은 1942년 임오 교변(壬午敎變)이었다.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악형으로 인해 21명중 1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8명은 실형을 받아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임오 교변으로 대종교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임오 교변은 대종교가 북만에서 끝까지 독립운동을 추진한 유일한 세력임을 반증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 大倧敎 倧經 倧史 編修 委員會, 『大倧敎 重光 六十年史』(대종교 총본사, 1970)
  •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 『中國 東北 지역 韓國 獨立 運動史』(집문당, 1997)
  • 『밀산 조선족 백년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7)
  •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 독립운동 시론」(『사학 연구』22, 1977)
  • 박영석, 「大倧敎의 민족 의식과 항일 민족 독립운동-임오 교변을 중심으로-」(『건대 사학』6,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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