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연강석판벼의 고장, 발해진 강서촌

한자 沿江石板벼의 고장, 渤海鎭 江西村
영문 Rice plants volcanic soils in Jiangxicun Bohai
중문 沿江石板稻谷的地方, 渤海镇江西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강서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개설

강서촌영안시에서 남쪽으로 51㎞ 떨어진 목단강 상류의 서안에 향수촌과 나란히 서있는 마을로서 정확한 주소는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강서촌이다.

촌으로 들어오는 길목 5㎞지점에는 160년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유지와 박물관이 있는 발해진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발해 왕족들의 놀이터였으며, 상경용천부를 건설할 때 필요한 현무암을 채석하면서 만들어진 호수라고 알려진 현무호를 둘러싸고 발해의 풍경을 담은 유원지인 발해 풍경원과 새롭게 건설되는 도작(稻作) 박물관이 들어서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37㎞지점에는 발해 흥망의 전설이 서려있는 중국의 국가급 명승지인 경박호가 자리 잡고 있다.

강서촌 일대는 수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용암석지대로 그 위에 두터운 부식토가 덮여있다. 예로부터 황제의 수랏상에 올랐다는 향수쌀은 이곳 영안시 발해진의 향수촌강서촌, 합달촌과 우창촌 등 조선족 마을에서 생산되고 있는 쌀의 명칭이며 연강석판벼라고도 부른다.

1884년 당시 영안현 동경성 일대의 조선인 농민들이 목단강물을 끌어들여 수전을 개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논농사가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많은 조선인 농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2004년 강서촌 촌민 위원회에서 발간된 『78년의 강서촌 력사』에는 “1926년 좌우로 8세대의 이주민이 강서촌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강룡전, 강룡팔, 강순녀, 김준달, 김부관, 안경순, 황영춘 등이라고 한다.”라고 처음 강서촌에 조선인이 들어온 정황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강서촌은 개간되지 않은 벌판이었고 지금의 강서촌을 중심으로 남해자(南海子), 망비보자(望飛堡子), 연화보(連花堡) 등으로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쑥대와 억새풀이 무성한 황무지였으며 한족이나 만족으로 구성된 20여호가 5~6호씩 산재해서 살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중국 동북 3성이나 흑룡강성으로 이주해 온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혈통이나 민족의 속성에서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의 유민들과는 직접적인 계승관계가 없는 한반도에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지만 고구려발해의 유적이 있는 곳에는 조선족들이 집단 주거 지역을 형성하고 수전을 개발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당서』「발해전」에 벼가 발해의 특산물이라는 기록과도 관련이 있다. “발해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 중 농산물과 관계된 것은 책성(柵城)의 된장, 현주(顯州)의 베, 옥주(沃州)의 솜, 용주(龍州)의 명주 등과 함께 노성(盧城)의 벼가 귀중한 물품”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벼가 수전인지 한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이 벼가 잘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수전을 개발하고 논농사를 지어서 살아갈 목적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게 ,벼가 잘 자랄 수 있는 지역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송화강이 흐르는 강서촌향수촌 등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 진다.

강서촌이 속해있는 발해진은 역사적으로 한민족에게 중요한 지역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첫째 발해가 160여 년간 수도로 삼았던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발해진에는 지금도 당시의 궁궐터와 고분군이 남아있다. 둘째는 대종교의 총본사가 있었던 지역이다. 대종교는 1914년 화룡현 청파호(淸坡湖)로 총본사를 옮겼다가 1935년에 지금의 발해진인 이곳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왔다. 단군을 교조로 하는 한민족의 민족 종교인 대종교가 발해진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당시 이곳에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종교 교도인 백산안희제는 1933년 중국인으로부터 넓은 토지를 매입하여 발해농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경박호에서 내려오는 목단강 상류의 물을 막아 발해봇둑을 설치하여 강서, 향수, 상관, 하대원, 유창, 하관지, 봉화, 삼영 등 1천 5백만㎡에 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개발하고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조선인 소작농 300여 가구를 이주시켜 농장을 개척하고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는 등 조선인의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현제 발해봇둑 옆에는 해방 후 중국에서 건설한 아보(阿堡)수력발전소가 들어서 있으며 발해농장의 터는 발해진에서 향수촌를 지나 삼영촌으로 가는 사이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지금의 상경뜰이다. 그리고 발해농장의 사무실이 있었던 자리는 발해진 상경로 17호로서 지금도 옛 건물의 일부가 남아있으며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지역은 발해궁터 앞 30m 지점이며 임오 교변의 역사적 현장도, 3.1 학원의 자리도 함께 발해진에 속해 있다.

마지막으로 항일 운동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 중 가장 큰 사건은 재만 한국 독립당 산하의 한국독립군이 중국 의용군인 길림 구국군의 요진산 부대 및 제14사 시세영 부대와 연합하여 1933년 6월 7일 일본군 및 만주국 연합부대가 상주하는 동경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동경성 전투를 들 수 있다. 동경성 전투의 현장은 현제 발해 소학교의 정문부근이다.

1936년 일제는 강서촌에 학교를 설립하고 1937년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조선총독부가 만든 교과서를 사용하였으며 1941년부터는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는 등 황민화 교육에 박차를 가하였고 창시개명(創始改名)을 강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선계(鮮系)라고하여 일본인은 1등 민족, 조선인은 2등 민족, 중국인은 3등 민족으로 분류하는 등 민족적인 차별을 가하여 한족이나 만주족 등과 이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강제징병을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몰았다. 그리고1937년 전후에는 산재한 주민들을 강제로 집중시켜 집단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70여 세대가 이주하였다. 마을의 둘레에는 높이 2m 폭 2.5m의 토성을 쌓고 자위대를 조직하여 밤낮으로 보초를 섰으며 동쪽과 북쪽에만 대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것은 독립군이나 공산당과의 접촉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지역에 펼쳐졌던 항일 운동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일제는 강서촌에서 4㎞떨어진 아보둔에 촌공소를 세워서 마을을 관리하였으며 강서촌이 아래에 있다 하여 하둔(下屯)이라고 부르며 목단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300m 지점에 보를 만들고 수전을 개간하는 일에 매달렸다. 촌공소는 일제를 대신하여 농업세를 받아들이고 공출을 독촉하고 징병을 독려하는 업무를 보았는데, 이일을 하는 사람을 조리라고 불렀는데 조리의 악행은 말할 수 없이 가혹하였다. 조리는 가을 추수를 끝내고 나면 탈곡한 모든 벼를 즉시 공출하였고 벼를 숨겨놓은 집을 찾는데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으며 또 개인이 숨긴 벼를 찧을 수 없도록 절구며 방아마다 인분을 채워 놓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이 마을에는 한국으로 건너가려다 여비가 떨어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강서촌 270호, 이웃 서안촌은 300여 호가 되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강서 소학교의 학생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마희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약 4천여 명의 토비의 토벌을 위해 강서촌에서도 박최동 등 5명이 참군하였으며 그 중 2명이 전사하였다. 이어진 국공내전에도 35명이 참군하여 6명이 전사하였고, 6·25 전쟁에는 참군한 36명 중 6명이 전사하였다.

1947년 가을부터 토지 개혁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구호는 “지주와 부농을 타도하자.”, “밭가는 사람에게 토지를 주자.”, “중국 공산당 만세! 모주석 만세.”등이었다. 당시 무상 몰수 된 250ha의 토지는 205세대에 인구 비례로 무상 분배하였다. 토지개혁이 끝난 후 1950년 촌의 행정 체계가 완성되었다. 1956년에는 마을 경내인 남해자의 한전 60ha를 수전으로 개간하였으나 물이 모자라 그 중 40ha는 다시 한전이 되어버린 아픔을 겪었고, 인민 공사 시기와 문화 혁명 시기의 상황들은 다른 마을들과 대동소이 하였다.

황제의 수랏상에 올랐던 연강석판벼

강서촌의 벼가 황제의 수랏상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하였다고는 하나 강서촌 역시 여타 흑룡강성의 다른 지역과 같이 혹한의 긴 겨울로 인하여 벼가 싹이 트고 모내기를 할 때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강서촌의 조선족들은 처음부터 논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갈 목적으로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고 우수한 품종의 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볏모 재배 방법을 개발하였다. 초기 이주민들은 개척 시기부터 해방 전까지 대부분 모내기 대신 논에 직접 씨를 뿌리는 산종의 방법이었으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내기를 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70%, 1980년대에는 80%, 1990년대 중반부터는 모든 논에 모내기를 하게 되었다.

1950년대 처음 모내기의 방법은 논에 물을 댄 후 일정한 면적에 종자를 뿌리고 물을 대고 모를 재배하는 수상 육모의 방법을 이용하였다. 그 후에는 모판을 만든 뒤에 종자를 뿌리고 그 위에 복토를 하고 물을 댄 후 비닐 막을 씌워 모를 키우는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70년대 말에는 널빤지를 모판을 만들고 그 안에 비닐을 깔고 물에 충분히 불은 종자를 펴고 온실에서 쌓은 다음 불을 지피거나 더운물을 뿌려주면서 모를 재배하는 무토 육모의 방법을 택하거나, 논갈이를 한 다음 물을 대고 종자를 뿌린 다음 큰 나무칼로 종자가 충분히 흙속에 박히도록 눌러준 다음 비닐을 치고 물을 주어가면서 재배하는 떼장 육모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부터는 비닐로 만든 모종판에 채로 친 부드러운 흙을 채우고 물을 충분하게 준 다음 한 구멍에 2-3알의 종자를 뿌린 다음 그 위에 복토를 하고 물을 주면서 비닐 속에서 키우는 판육모 방법을 사용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자기 집의 채전 밭에 대형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판육모의 방법을 사용하여 종자의 발아를 용이하게 하여 모의 생육기를 앞당기고 병충해 예방을 쉽게 하는 등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최근 모를 키우는 5월에 강서촌을 방문하면 집집마다 비닐하우스의 모판에 호스로 물을 뿌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강서촌 등은 전 중국에서 가장 좋은 쌀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오염이 없는 경박호의 물과 논으로 형성된 10~30㎝의 부식질 토층 아래 화산폭발로 형성된 용암석에 있다. 한 낯의 강렬한 태양열로 달구어진 용암석은 밤중에도 식지 않고 벼의 생육을 돕는다. 그래서 같은 종자라 할지라도 타지에서 생산된 쌀보다 훨씬 밥맛이 좋고 일교차가 커서 광물질, 유기질, 미량원소가 풍부하며 타 지역의 보통 쌀에 비해 영양소가 3~5배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도 만족하지 않고 이 마을의 역대 공산당 지부 서기들은 강서쌀의 품질을 더욱 높이기 위해 새로운 종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 보급하여 전 중국 농산물 박람회에서 1992년부터 연속 3회에 걸쳐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선진적인 정미소를 설치하는 등으로 고급화와 차별화를 시도하여 “연강석판벼”라는 브랜드를 개발하였다. 그래서 타지방보다 훨씬 높은 값이지만 수확 전부터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서·연화 뜰 전체를 국가 현대 농업 시범 기지로 선정하여 종자에서부터 비료, 제배 방법 및 가공, 판매 등 모든 영농 과정을 촌에서 통제하면서 경작자가 자신의 논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품질 향상을 시도하고 있으며 경영 합리화를 꽤하여 고수익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현무호 부근에 “이 지역이 발해 시기부터 벼가 생산되었으며 신당서에 기재된 노성의 벼가 재배되던 곳이다.”라는 이 지역 벼농사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비롯하여 연강석판벼의 생육 모습을 보여주는 노천전시관이 만들어져 직접 수전 농사의 현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 개관은 하지 않았으나 논농사의 변천 과정과 사용하던 농기구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설립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도작 박물관이라 부르고 있다.

강서촌의 조선족 교육

1937년 일제는 항일 투쟁을 막고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선인 농민들이 정착을 유도하고 노화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강서촌에 집단 마을을 건설하면서 학교를 설립하였다. 삼강성 강서사립학교로 출발한 학교는 1939년 발해강서초등학교, 1941년 경박현 강서 국민 우급 학교, 1946년 발해 강서 국민 우급 학교, 1949년 영안현 강서 제14 완전 소학, 1951년 영안현 제7구 강서 완전 소학, 1957년 영안현 강서조선 민족향 중심 소학, 1859년 영안현 동경성 공사 강서 소학, 1966년 영안현 발해 공사 신서광 학교, 1969년 영안현 동경성 공사 강서 학교 혁명 위원회, 1973년 영안현 발해진 공사 강서 조선족 학교를 거쳐 1977년부터 발해진 강서 소학으로 개명하였다. 1937년 개교 당시 20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학교는 그 이듬해 40명, 1940년에는 110명, 1944년 230명으로 늘어났으며 1949년부터는 300명을 넘어서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1971년에는 400명을 기록한다. 이러한 정황은 1999년까지 이어졌으나 그 후 점차적으로 학생 수가 줄어들어 2004년에는 73명, 2010년 폐교되었고 남은 학생들은 인근의 발해진이나 영안시 등으로 옮겨갔다.

논농사의 성공과 문화 복지 사업의 전개

강서촌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논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초기부터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인근의 한족들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여가선용에 대한 욕구가 일어났고 1950년 촌정부에서는 적극적인 활동성을 가진 마을 청년들이 여가를 선용하여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업여 구락부를 조직하고 20ha의 논을 활동비 명목으로 배정하였다. 업여라는 말은 직업 외에 여가 선용으로 하는 일을 말하며 굳이 한국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취미 활동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초기 이 구락부의 참가 희망자는 40여 명이 되었고 농장의 수입으로 악기를 구입하여 가무단을 조직하였으며, 학교의 음악 선생님을 초빙하여 악보공부와 악기 다루는 방법, 무용과 노래를 배우는 등 예술적 능력을 배양하는 활동을 하였다. 1951년부터는 3년간의 노력으로 마을 한 복판에 360㎡의 구락부를 건설하고 400명이 앉을 수 있는 걸상을 갖춘 관람석을 만들었다. 업여 구락부의 공연활동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활동은 더욱 더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래서 1954년 영안현에서 시행된 경연 대회에서 전 현 조선족 마을에서 공연한 40여 개의 프로그램 중에서 강서촌의 새 장고춤, 처녀 총각무, 나비춤, 농악무 등이 우수 종목으로 선정되었으며 종합 1등을 하였고, 1964년 국경절에는 북경에서 시행된 소수민족 경연 대회에서 새 장고춤이 우수 종목으로 선정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1961년 대약진 시기와 3년 자연 재해 시기를 거치면서 구락부는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와해되었다.

또 하나의 사업은 노인회 활동이다. 강서촌에는 1955년부터 노인 독보조가 건립되었다. 초기 20년 동안에는 여성들로 구성되었으며 매일 한차례 신문 보도를 읽어주는 활동이 전부였다. 그 후 1979년부터는 남녀 회원들이 함께 모이기 시작하면서 회원 수가 늘어났고 촌에서도 활동 장소를 마련해주었는데 신문 보도 외에 장기를 두는 정도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노인 회관과 문구[게이트볼] 등을 할 수 있는 운동장을 세우고 명칭도 노인협회로 고쳤으며 촌에서 활동비를 지급하였다. 회원의 수가 120명을 넘어서자 남73세, 여71세 이상의 노인들을 제1분회(45명), 그 이하를 제2분회(78명)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문화 오락 체육 운동 등의 활동을 폭넓게 진행하였는데 1990년대 중반에는 사교무, 집체무, 건강무 등의 춤들을 이용하여 조별로 연출을 하였고, 일반적으로 문구라고 부르는 게이트볼 게임을 보급하여 체력 증진에 기여하였다.

강서촌 노인 협회의 활동의 정점은 2003년의 3.8 부녀절 모임인데 합창, 독창, 무용, 재담, 만담 등 17개 종목이 연출되었으며 영상물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1999년 북경 관광을 시작으로 2002년 백두산 유람, 2003년 송화강 유람, 2004년 태양도유람 등을 개최하였다.

2013년 현재 노인 협회의 회원 수는 110명이다. 그들은 마을의 시니어로서 촌정부의 자문 역할 뿐만 아니라 청소와 꽃가꾸기 등 환경 위생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명절이나 큰 행사에서는 춤과 노래를 통한 공연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촌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있다. 필자는 중국의 동북 3성에 있는 대표적인 중국의 조선족 마을을 대부분 다녀보았는데 강서촌의 노인 협회 회원들의 수가 타 지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것은 강서촌이 장수 마을이라는 것을 의미하여 그것은 맑은 물과 좋은 공기 등의 자연 조건과, 문화 예술을 사랑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마음씀씀이, 그리고 청정 수역의 물고기와 석판벼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새마을의 건설

1930~1940년대 강서촌의 주민들이 외출을 하려면 마을에서 2㎞ 떨어진 목단강의 선착장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4㎞를 걸어서 아보둔에 이른다. 그곳에서 동쪽 6㎞지점에 발해진이 있고 발해진에서 동쪽 7㎞지점에 동경성이 나온다. 그래서 지금은 5㎞박에 되지 않는 발해진을 다녀오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25㎞를 걸어야 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때나 토목이나 건축 공사 등에도 차량이나 장비를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강서촌의 새마을 건설의 시작은 신서광 대교를 건설하여 목단강으로 둘러싸여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교통의 오지에서 탈바꿈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소련홍군이 길이 90m 넓이 4m의 허공다리를 설치하여 통행은 다소 편리해졌으나 허공다리는 90m의 길이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서 출렁거려서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홍수 때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우마차가 다닐 수도 없어서 농사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철근 콩크리트 다리를 놓는 것은 인근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안현에서 공사에 소요되는 재료를 부담하고 다리를 사용하는 향수촌, 강서촌, 연화촌 주민들이 건설에 참여하기로 하고 건설은 시작되었다. 3년여가 걸려 1968년 8월 강서촌향수촌을 이어주는 신서광 대교가 완공되었다. 그때부터 농사에 필요한 우마차는 물론 차량 통행 등이 원활해져서 생활 여건이나 주택 건설, 토목 공사 등도 용이해졌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1937년 산재 부락을 집중시키는 일제의 전략에 의해 집단 부락으로 조성되었다. 조성 당시의 주택은 대부분 움집이나 초가집으로 규모도 적었다. 그 후 수전 개발이 성공하고 풍년이 계속되자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으며 주택의 수요도 늘어났다. 그러한 와중에 1979년부터 시행한 새마을 건설은 주택 개량 사업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마을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새마을을 조성하면서 촌 정부는 당시 마을의 북쪽에 있는 밭을 개발해서 대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가구당 면적은 575㎡, 건평은 100㎡정도, 설계는 마을에서 준비하였고 바둑판과 같은 도로망을 갖춘 붉은 벽돌 기와집을 건설하였는데 마을의 면모를 일신한 것으로 중국 농촌 마을 건설의 모체가 되었다. 새마을 건설에는 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모든 대지는 국유지이며 마을이나 개인은 경작권과 사용권만 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주민들에게 대지를 쉽게 제공할 수 있었고 자재의 운반하고 건축에 필요한 노동력도 상당부분 마을에서 지원해주었다. 건축주의 부담은 건축 자제를 준비하는 것이다. 벽체는 붉은 벽돌로 지었고 지붕은 기와를 덮었는데 벽돌과 기와는 마을에서 생산한 것을 사용하였다. 앞마당은 채전 밭이며 구석에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지었다. 주택은 채전 밭보다 40-50㎝ 높도록 해서 습기가 차지 않도록 조처하였다. 1981년까지 30여세대가 마을의 지원을 받으면서 완공하였다. 1983년부터는 마을의 지원이 없어졌지만 벽돌집 건설의 열정은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1984년까지 모두 80여 세대가 벽돌집을 완공하였다. 당시 마을은 오래된 초가집과 새로 지은 벽돌집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어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의 벽돌집에 대한 부러움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벽돌집 건설의 열기를 부채질하였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 250세대, 2004년에는 348세대가 벽돌집에 살게 되었고 81세대의 초가집이 남게 되었다. 2004년 이 후부터는 초가집 보존에 대한 열기가 높아져서 필자가 다시 방문한 2013년에는 남아있는 초가집들이 그 원형을 잃지 않고 말끔하게 보수되어 벽돌집과 초가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새마을을 건설하면서 마을안의 모든 길을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가로수와 상·하수도를 정비하였고 마을 중심부에는 광장을 조성하여 5일장이 서고 운동기구와 무대를 조성하여 아침마다 주민들이 운동을 즐기고 있으며 공연 등이 운영되고 있다.

강서촌의 새마을 건설의 백미는 수력 발전소의 건설이다. 강서촌의 수력발전소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수력 발전소 건설이 발해진에 소속된 강서촌이라는 조그마한 농촌 마을에서 자발적이고 독단적으로 시도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력 발전소의 시작은 1972년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마을의 조명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토론에서 출발하였다. 결론은 목단강 상류에 저리잡고 있는 강서촌의 자연 조건은 수력자원이 풍부하여 두 갈래로 흐르는 합수목에 제방을 쌓고 물을 끌어들이면 그 낙차로 수력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촌정부에서는 경험이 있는 전문인을 찾아 문의도하고 그들을 초빙하여 측량을 하는 등 준비 과정을 거쳐 1873년 1월 6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마을의 노동력과 트랙터 등이 동원되었고 전 주민들이 2년여 동안 분투노력하여 인수로 공정을 상당부분 진척시켰다. 그러한 와중에 발해진에서 합작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촌의 재정으로는 수력발전소의 건설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를 부담하기 어려울 것이니 우리가 재정을 보태겠다면서 이 발전소에서는 3,200㎾의 전기를 발전할 수 있는데 촌에서 필요한 400㎾의 전력은 강서촌 몫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회의를 거쳐 발해진과 합작을 하기로 하고 인수로의 설계를 다시한 후 다시 5년여 동안 발해진과 함께 고군분투하여 1981년부터 전력생산을 하게 되었다. 발전소는 발해 공사 강서 발전소로 출발하였으며 1983년 발해진 발전소로 개명하였다.

또 다른 한류의 출발 유두절의 재현

400여 호의 농가를 가지고 있는 강서촌은 인근에 발해의 궁전인 상경 용천부 유지와 현무호 그리고 송화강과 경박호라는 자연 유산, 연강석판벼 등의 특산물을 활용하여 관광과 경제 산업을 이끌려고 고심해오면서 마을자체를 대외에 홍보할 만 한 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든 중 민족의 세시 풍속을 발굴하여 그것으로 자신들의 홍보를 할 수 대상으로 삼자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연변 사회 과학원의 천수산 교수를 비롯한 연변 조선족 민속 학자들의 건의에 따라 농한기의 명절로 가장 적합한 유두절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2005년 음력 6월 15일 제1회 유두절이 개최되었다. 이 유두절 행사는 2006년 2월에 시행된 흑룡강성 제1회 무형문화유산 조사에서 흑룡강성에서 유일하게 선정된 조선족의 문화 유산으로서 성급 보호문물이 되었다.

유두란 말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 수두 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을 간단하게 표시한 것으로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액운을 쫓아내고 더위를 먹지 않으며 평화와 풍년을 기원한다는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 온 한민족의 고유한 풍속이다. 유두절을 개최한 강서촌은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 대규모로 유두절 계승사업에 나선 유일한 조선족 마을로서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방법으로 민족을 '브랜드'로 개발한 사례로서 의미가 크다. 유두절을 처음 개최한 오철수강서촌의 공산당 지부 서기는 "예전의 농경사회로부터 다양한 생산 양식으로 발전된 오늘날 적지 않은 전통적인 민족 풍습의 계승이 단절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면서 "위기 상황에 처한 민족 문화 유산을 활성화하는 한편 앞으로 유두절 계승사업이 단절되지 않도록 계속 떠밀어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한 유두절은 중국 정부의 후원아래 현제 한해는 영안시 발해진 강서촌에서 다음해는 영안시 와룡향에서 개최된다. 이틀 동안 개최되는 유두절은 천제를 시작으로 다채로운 민속 공연과 흐르는 물에 머리감기 둥의 전통적인 행사 외에도 씨름, 배구, 축구, 그네뛰기 등 체육 종목도 곁들였으며 각 지역의 특산물과 민속 음식을 소개하면서 다양하게 펼쳐졌고 강서촌이나 와룡촌 등과 자매 결연을 맺은 한국의 지역 기관장과 예술인들 등이 참가하여 민족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한류의 새로운 돌파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문헌
  • 김창남, 『78년의 강서촌 역사』(강서촌 촌민 위원회, 2004)
  • 강위원 , 『흑룡강성의 조선족』(고함커뮤니케이션, 2005)
  • 「류두절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다」(『흑룡강성 신문』2007. 7.30.)
  • 인터뷰(강서촌 전임 공산당 지부 서기 OOO 61세, 2004. 2. 7.)
  • 인터뷰(강서촌 노인회 회장, 이석구 69세, 2013. 7. 23.)
  • 인터뷰(강서촌 공산당 지부 서기, 오철수 58세, (2013. 7. 23.)
  • 현지 조사(1999. 10. 29, 2000. 3. 8, 2004. 2. 7. 2005. 7. 6. 201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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