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항일 유격 근거지

한자 磐石 抗日 遊擊 根據地
중문 磐石抗日游击根据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길림시 반석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만주지역 항일유적지
건립 시기/일시 1932년 말
폐지 시기/일시 1937년 초
소재지 중국 길림성 반석시(磐石市) 버리하투(坡璃河套), 홍석라자(紅石砬子)
정의

1932년 말 길림성 반석현 파리하투(坡璃河套)와 홍석라자(紅石砬子) 등지의 중국 공산당반석현 위원회 관련 항일 유격 근거지.

개설

9.18 사변(일명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경 중국 공산당 반석중심현위(磐石中心縣委)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자체의 조직을 방어하고 일제 침략의 앞잡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무장 조직의 결성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역량있는 활동가로 지목되던 이홍광(李紅光) 등 7명의 한인 청년들을 토대로 '적위대(赤衛隊)(일명 打狗隊, 개잡이대)'가 이통(伊通)에서 창건되었다. 이때 이홍광이 대장을 맡았다. 사실 그는 반석현위원회 주요 멤버의 한사람이었고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종 대중운동에 적극 앞장서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항일 및 반봉건 투쟁을 위한 무장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차였다. 창건 당시 적위대의 무장은 소총 한자루와 권총 5정, 수류탄 2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조직은 한인(韓人) 밀정 등 일제의 하수인과 부일배(附日輩)들의 조직인 조선 인민회(朝鮮人民會), 보민회(保民會)만주국 관헌, 일본군경, 악덕 지주계급 등과의 투쟁을 통해 이름을 떨치면서 대중에게는 일제의 앞잡이를 숙청하는 부대라고 해서 '개잡이 부대'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리었다.

이 소조(小組)의 출발은 보잘 것이 없었으나 남만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이었다. 이를 토대로 남만지역에서 항일 유격대가 발전하며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과 동북 항일 연군 제1군이 각각 창건된다는 입장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는 9.18 사변 이후 가중되는 일제의 침략과 이에 따른 일시적 치안 및 행정의 혼란상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1931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추수 투쟁'과 '춘황(春荒) 투쟁'이란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반봉건(계급) 및 항일 투쟁의 성격을 띠는 이 봉기에는 주로 동만(東滿)지방의 궁핍한 한인농민들이 대거 참여했으나, 남만지역에도 상당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이 대중운동을 통해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의 활동영역이 넓어졌고 차후 그 계통의 항일무장 투쟁 세력이 확대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반석 의용군은 일본군과 만주국 관헌 등의 탄압으로 활동근거지를 버리고 정식 부대명칭을 포기한 채 1932년 9월에 구동북군계(舊東北軍系)부대였으나 마적[山林隊로 호칭되기도 했음]화한 상점(常占)부대와 연합하여 상점(常占)의 지휘를 받았으며, 반석현성(磐石縣城)을 공격하는데 동참하여 싸우기도 했다. 10월 하순에는 120여 명에 달한 대원을 4개 대대로 재편하고 한국인 이홍광이 참모장을 맡는 개편을 단행했다. 하지만 역시 반석의용군의 기치를 내세우지 못하고 오양(五洋) 부대라는 마적 항일 부대와 연합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행태는 분명 중국 공산당이나 반석유격대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고, 일반 대중에게도 중국 공산당계 유격대가 마적과 다름없는 조직인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당시 현(縣)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던 전광(全光)등은 9월에 반석항일유격근거지를 포기하고 화전(樺甸)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지만 이홍광이동광 등은 이를 반대하는 한편,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반석의용군의 실제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 수립을 요구했다.

일제와 괴뢰 만주국 군경 등의 거듭된 토벌과 집단 부락 정책의 실시 등으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1937년 초에 파괴되었다.

위치

중국길림성 반석시(磐石市) 버리하투(坡璃河套), 홍석라자(紅石砬子) 일대에 있었다.

현황

중국 공산당 산하의 남만 유격대는 1933년 1월 말부터 5월 초까지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반석의 파리하투(坡璃河套) 항일유격근거지를 포위공격하는 일본군과 만주국군(滿洲國軍), 투항 마적 등에 대항하여 60여 차례의 공방전을 치르며 성공적으로 이들을 격퇴하였고, 오히려 홍석립자(紅石砬子)에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항일 유격대가 진정으로 대중을 위하고 항일에 앞장서는 부대라는 인식이 중국인 대중에게 점차 확산되었던 이유가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전투 도중 항일 유격대를 찾아오는 청장년이 늘어나고 또 일제의 괴뢰가 되기를 거부한 만주국군의 일부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유격대에 합류했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 무렵 남만 유격대는 25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고, 신식총을 소지한 자가 230명에 달했지만 그 외에도 150여 자루의 화승총 등 구식무기가 있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홍광 외에도 박한종(朴翰宗)과 한호(韓浩)[본명 金輪浩]가 한인으로서 각기 1, 2대대장을 맡아 크게 활약하고, 또 초기보다 비율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대원의 1/4이상이 한인(韓人)이었기 때문에 남만 유격대는 사실상 한중(韓中) 양민족의 연합부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1930년대 초·중반 중국길림성 반석현 등 남만주 지역에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주도의 항일 유격 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향후 중국 공산당 주도의 항일 무장 투쟁과 공산주의 운동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중국 공산당 반석현위원회와 남만 유격대의 창건은 오성륜(吳成崙)[일명 全光], 박봉, 이홍광(李紅光) 등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이 주도하였고, 반석항일유격근거지 주민의 대다수는 한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중국동북지역 공산주의 운동과 항일무장 투쟁에서 한인들의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창국, 『남만 인민 항일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1986)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 운동사(1920~1945) : 민족주의 운동 및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대립과 연대를 중심으로』(아세아 문화사, 1999)
  • 양소전 외, 『중국조선족 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김창국, 「반석항일유격근거지」(『중국조선민족 발자취총서 3-봉화』 연변인민출판사, 1989)
  • 장세윤, 「이홍광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8집, 독립기념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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