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 항일 연군

한자 東北 抗日 聯軍
중문 东北抗日联军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만주지역 항일통일전선단체
설립자 중국 공산당 만주조직
설립 시기/일시 1936년 1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0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2년 7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5년 8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5년 9월
최초 설립지 만주
정의

일본의 만주 지역에 대한 침략에 맞서기 위해 중국 공산당 주도로 조직된 중국 동북 지역 항일 연합 부대의 총칭.

개설

1930년 ‘간도 5·30 폭동’을 전후하여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이 해체되었다. 이 무렵 한인(韓人) 당원들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에 개별적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길림성 연변 및 남만주 지방에서 한인 사회주의운동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또 ‘9·18 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부터 1933년까지 중국 공산당 만주조직 주도하에 동만주 4개현(연길·화룡·왕청·훈춘)의 항일 유격대가 창건되었다. 이후 연변지역에서는 소비에트와 인민 정부, 항일유격대가 당·정·군의 형식으로 상당기간 정립하며 중국 공산당계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항일유격대를 바탕으로 1933년 9월 동북 인민 혁명군 1군 독립사가 건립되고, 이듬해 3월 2군 독립사가 세워졌다. 물론 여기에 많은 한인대원들이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다. 또 1936년 초부터 동북 항일 연군이 제1군부터 11군까지 조직되었다. 여기에도 다수의 한인들이 참가하여 항일투쟁과 각종 사회운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당 반석현위원회와 남만유격대는 항일투쟁이 점차 격화되고 유격대의 역량이 성숙함에 따라 1933년 8월 남만유격구와 유격대 대표자 회의를 열어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건립키로 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만주침략 2주년이 되는 그 해 9월 18일 남만주 반석에서 이 부대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 무장세력은 만주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중공당 계통의 정규군인 셈이었다. 때문에 성립선언과 정강, 사병우대 조례, 각종 선언문 등을 발표하여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 문건 가운데 한국 독립(해방)이나 혁명의 지원을 직접 표방한 내용은 없었다. 사실 1931년 5월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는 ‘만주 한국민족문제 결의안’을 통과시켜 한국혁명을 원조해야 한다고 했지만, 1930년대 초의 좌경화된 분위기하에서 이러한 내용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제1군 독립사는 1934년 11월에 2개 사로 분화 발전하였다.

창건 당시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300여 명 정도 규모였는데, 사장(師長)겸 정치위원은 한족(漢族) 양정우(楊靖宇)였다. 반면 참모장 이홍광(李紅光)과 소년영장 박호(朴浩), 3단 단장 한호(韓浩) 등 주요간부가 한인이었다. 이 조직의 1/3가량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군 독립사는 1933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많은 전투를 치렀으나, 이 가운데 유하현 삼원보(三源浦) 공략전과 양수하자(凉水河子), 팔도강(八道江) 전투 등이 유명하다. 특히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이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한 전투는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 국내 진입작전으로 유명했다. 이는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 투쟁 세력 최초의 대규모 국내 진입 작전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1934년 동만에서 한인 주진(朱鎭)을 사장으로 성립한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중국연변지역의 안도현왕청현 일대에서 한 해 동안 900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유격근거지를 방어하였다. 이른바 일제의 ‘제3기 치안숙정계획’을 무산시킨 것이다. 2군 독립사는 1,200여 명의 병력과 980여정의 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 병력의 2/3가 한인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이 항일부대는 조선 혁명군이나 한국 독립군과 같은 민족주의계 독립군과 이념을 약간 달리할 뿐, 일제타도라는 목표와 그를 위한 역할의 수행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중공당 반석현위원회는 1934년 3월경 신빈일대에서 강고한 세력을 형성하며 완강히 일제와 싸우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인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에 사람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연대공작을 진행하라고 1군에 지시했고, 이후 양 부대는 일정한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북만주의 밀산(密山)에서는 1934년 3월 40여 명의 밀산 반일유격대가 조직되었는데, 한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유격대는 그 해 9월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편성되었다. 또 1932~1933년경 탕원현(湯原縣)에서 발족한 탕원유격대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러차례 전투를 거치며 그 대원이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이 유격대는 1936년 초 주변의 자위단·경찰 등을 흡수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편제되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남만지방을 활동기반으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동만지방을 근거로 하는 2군은 한인이 주력을 이루었고, 사실상 이 시기 중공당계 산하 부대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 투쟁에서 재만 한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많은 어려움을 수반했다. 더욱이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에 일제는 자체의 무력과 괴뢰 만주국 군경, 관헌을 동원하여 혹심한 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은 적의 포위공격을 면하기 위해 근거지를 벗어나 남만과 북만의 드넓은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전술을 모색하게 되었다.

1935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는 가운데 소위 ‘8 1선언’을 발표하고 내전중지와 거국적 국방정부의 구성을 제안했다. 또 이듬해 12월 장학량(張學良)이 장개석(蔣介石)을 구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발생하여 중국 관내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8·1선언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는데, 각 당파와 민족, 모든 계층을 망라한 항일연합군의 조직을 명시했다. 이 선언에 따라 중국 공산당 만주조직은 1936년 1월 회의를 소집하고 각 항일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성키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종래의 동북인민혁명군과 계통을 달리하는 여러 항일부대가 결집되고 중국 공산당 만주조직이 영도하는 동북 항일 연군이 제1군부터 11군까지 결성된다.

이후 중국 동북지역(만주) 항일 무장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중공당 만주조직은 항일투쟁을 위해 각계 각층과 연대하는 것은 물론, 재만한인들의 조국광복운동 직접원조와 자치구 건설, 한인을 위한 항일전쟁의 원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인으로만 조직된 독립부대의 창설도 고려되었지만, 활동상의 애로를 들어 실현되지 않았다. 동북 항일 연군 가운데 한인이 많았던 1군과 2군, 특히 2군은 한 중 양민족의 연합을 실현한 ‘독립군’이라고 볼 수 있는 성격이 강했다. 이 사실은 3개 사(師)와 교도대, 기타 연계 세력을 합쳐 2천여명으로 추정되던 동북 항일 연군 제2군의 경우 절반 가량이 한인이었고, 특히 김일성(金日成)이 이끄는 제3사 병력의 대부분이 한인이었다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자 동북 항일 연군 1군과 2군은 1936년 7월 통합되어 양정우를 총사령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이 때 제2군 1·2·3사는 각각 4·5·6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가운데 한인이 많은 6사(사장 김일성)와 4사는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백두산 일대로 진격하여 유격구를 건설하였다. 그 뒤부터 장백현(長白縣) 등 백두산 일대는 1940년경까지 재만한인 항일무장 투쟁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고,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을 표방하며 조직된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건설 및 국내 진입작전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6사는 1937년 6월 80여 명의 병력으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普天堡)를 기습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 이후 동북 항일 연군내 한인 부대의 활약이 국내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광복회의 조직이 일제에 탄로되어 붕괴되는 손실을 초래했고, 일제 군경의 집요한 추격을 촉진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설립 목적

중국 공산당 만주 지부조직의 산하로 편성되어 각종 항일투쟁 세력의 단위부대를 ‘동북 항일 연합군’이라는 통합부대로 편제하고, 이른 바 ‘항일 민족 통일 전선’ 전술의 실현을 통해 중국 공산당 주도의 항일무장 투쟁을 실현하여 괴뢰 ‘만주국’의 통치를 교란하는 한편, 일본관동군의 중국 관내 지방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변천

만주지방에서 조직적 군사활동이 어려워진 잔존 동북 항일 연군은 1940년 겨울부터 동 북만을 거쳐 소련(연해주)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소련 측의 도움을 받아 남야영(南野營)과 북야영으로 불리는 거점조직을 세웠으나, 1942년 7월 동북 항일 연군 교도려로 편제되었다. 교도려는 소련군 산하 국제홍군 제88특별여단이라고도 했다. 이 무렵 이들의 전체 대원은 600여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인은 150여 명이 있었다.

1945년 8월 초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로 소·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려의 일부 한인들은 작전에 참가했으나, 대다수의 한인 대원들은 직접 독립전쟁(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해 9월경 소련군을 따라 귀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동북 항일 연군 산하 부대 가운데 4사와 5사가 통합되어 편성된 제3방면군은 60%정도의 대원이 한인이었고, 역시 종래의 제6사가 개편된 제2방면군은 대부분의 구성원이 한인이었다. 이 부대는 남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이 1937년 초·중반 일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결국 1938년 초 동북 항일 연군에 편입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인이 다수를 이루는 이 시기의 항일연군 제2·3방면군은 사실상 독립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도 가끔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나 ‘조선혁명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항일연군 제1로군 6사의 보천보 진입전투를 계기로 일제는 한반도 북동부 지역에 대한 대대적 수색작전을 벌여 소위 두차례의 ‘혜산사건’을 빚어내면서 동북 항일 연군 및 조국광복회 관계자 739명을 검거하는 대탄압을 벌였다. 이 때문에 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에 관계된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고 산하 조직의 대부분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항일연군 제2·3방면군은 함경북도 무산 진입전투(1939년 5월), 일본군과 만주국군 100여 명을 섬멸한 안도현 대사하(大沙河) 전투(같은 해 8월), 악명높던 ‘마에다(前田) 토벌대’ 120여 명을 궤멸시킨 화룡현 홍기하(紅旗河) 전투(1940년 3월) 등을 전개하여 최후단계까지 일제 군경에 큰 손실을 주었다. 하지만 동북 항일 연군 제1로군에 대한 일본군경 및 만주국군의 토벌도 강화되어 마침내 1940년 2월 1로군 사령관 양정우가 전사하고 만주지역의 잔존 항일연군도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현황

1936·7년경 동북 항일 연군은 동·남·북만 등 각지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재만한인들도 여기에 대거 참가하여 많은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주요 한인 간부 현황을 살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1938년경 동북 항일 연군의 병력은 1,850명 정도였다.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 계통 직속부대 외에도 다수의 각종 항일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상당수의 대원이 희생되었고, 일제의 탄압과 회유공작이 극심해 짐에 따라 차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의지가 굳지 못한 일부 참가자들이 변절하거나 도주·투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곤경에 직면하여 항일연군 제1로군은 경위려(警衛旅)와 3개 방면군(方面軍)으로 편제를 바꾸어 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GC05305295_01_1936~1937년 동북 항일 연군 내 주요 한인 간부 현황

의의와 평가

비록 중국 공산당 만주 지부 조직 산하로 편성되었으나, 1930년대 후반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맞서 대규모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하여 일본관동군과 괴뢰 만주국군, 관헌과 경찰 등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이 부대에는 최용건, 전광(오성륜), 김일성, 허형식, 김책, 김광협, 최현, 박득범 등 많은 한국인들이 가담하여 투쟁했다는 점에서 한·중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조선혁명군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도 이 부대에 합류하여 일제와 투쟁했다는 점에서 한국근대사, 나아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于偉, 「三年來東北義勇軍鬪爭的總檢閱」 (『東方雜誌』 32권 6호, 1935년 3월).
  • 金正柱 編, 『朝鮮統治史料』 6권(韓國史料硏究所, 1970)
  • 강만길, 『고쳐쓴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1992)
  •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이종석 옭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작과비평사, 1992,)
  • 장세윤, 『중국 동북 지역 민족 운동과 한국 현대사』(명지사, 2005)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1925~40)」(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6)
  • 장세윤,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 투쟁」(『한국사』 50, 국사편찬위원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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