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양성 중학

한자 養成 中學
중문 养成中学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길림성 통화시 통화현 합니하 남구사차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민족 교육 기관
설립자 이시영 등
개교 시기/일시 1912년
개칭 시기/일시 1915년 4월
개칭 시기/일시 1919년
최초 설립지 통화현 합니하남구사차
정의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일환으로 서간도 통하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남구사차에 신흥 강습소를 계승하여 설립된 대표적인 중등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국망을 전후하여 신민회는 중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당이회영 가문은 국내 자산을 처분하여 1910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유하현으로 집단 망명했다. 뒤를 이어 안동 혁신유림인 이상룡·김대략·김동삼 가족도 이곳으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이들은 이주 한인 권익 옹호와 대동단결을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교명을 신흥강습소로 한 이유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동시에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정립하려는 의도였다. 현지 중국인들은 이주한인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인식할 정도로 배타적이었다.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거행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신흥은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흥’자를 의미한다.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독립운동 전사를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로 출발하였다.

변천

1912년 망명지사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추가가에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하였다. 7월 20일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흥 무관 학교 낙성식을 거행한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이곳은 천연요새로 이주한인이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신흥 강습소가 폐교된 이후 대동 중학으로 출발한 다음 1915년 4월에는 양성 중학교으로 개편되었다.

1919년 3·1 운동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났다. 이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 부근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로 본부를 옮겼다. 합니하신흥무관학교를 분교로 삼는 동시에 통화현 쾌당모자(快當帽子)에도 분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1919년 5월 3일 고산자신흥무관학교 개교식을 거행하는 등 교세를 더욱 확장시켰다. 1920년 이후 무장세력의 근거지 이동에 따라 현지에서의 교육활동은 중단되었다.

교육 활동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백두산 서편인 통화현 소북차(小北岔)에 군사기지인 백서 농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벌목을 시작하여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군영을 완성하였다. 농장으로 명칭을 정한 이유도 중국측을 의식하였을 뿐 사실상 군사기지나 마찬가지였다. 병농일치에 의한 정예병 양성은 혹독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한글·역사·지리 교육 등도 병행되었다. 군사교과목은 격검·축성학·편제학 등 전술학은 물론 훈련교범·위수복무령·육군형법·육군징발령 등 장차 독립군으로서 자질을 연마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정신교육도 구국대의를 생명으로 한다는 방침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불의에 반항하는 정신, 임무에 희생하는 정신, 체력에 필승하는 정신, 가난에 인내하는 정신, 건설에 창의정신 등이었다. 1911년 12월 제1회 졸업생 40여 명을 배출하였다.

교가와 상징물

교관들은 교가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주요 내용은 항일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제1절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열절의 / 여러 만만 현현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 젖먹여 준 이가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 우리 핏줄에 콜콜콜 걸치며 돈다

제2절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박원은 / 반만년 래로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 좀 서름 받느니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 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 지옥의 쇳문이 온다

제3절 칼춤 추고 말을 달려 / 달련코 새론 높은 인격 정신을 길려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여 / 새나라 세운이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떳다

현황

1914년 당시 양성 중학 교직원은 교장 임필동, 교주 이세영, 교원 차정구·김장오·사인식·이문학·신기우·윤진옥, 재무감독 이동녕 등이었다. 이들은 중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위하여 망명한 민족적인 선각자였다. 재학생은 기숙생 21명과 통학생 41명 62명에 달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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