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한자 鄭律成
중문 郑律成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작곡가,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조선 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 협주단 단장
출생 시기/일시 1914년 8월 13일
몰년 시기/일시 1976년 12월 7일
정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중국과 북한 등지에서 약 360여 곡을 창작한 작곡가.

개설

정율성의 아명(兒名)은 정부은. 별명은 유대진(劉大振)이다. 전남 광주 출신이며, 숭일 학교와 전북 전주의 신흥 중학교를 다녔다. 정율성의 형제 정효룡·정충룡·정의은 등도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활동 사항

1. 성장과 학업

정률성은 1914년 8월 13일, 전남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현재 광주광역시 불로동 163번지]에서 정해업의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해업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장남 정효룡과 3남 정충룡 모두가 1919년의 3·1 운동에 참여했다. 정효룡은 8, 9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그 후유증으로 1934년에 병사하였다.

정율성은 9세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기독교계 사립 학교 숭일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전주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신흥 중학교 역시 기독교 계통의 3·1 운동을 주도했던 학교였다.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폐교를 당한 반일 전통의 학교의 학생이었던 정율성은 기독교 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인으로 교회와 학교에서 찬송가와 서양 음악을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1931년 정율성이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1932년 학교를 중퇴하고 형을 따라 목포에서 일본나가사키를 거쳐 중국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소련의 유명한 교수 크리노와(Krenowa)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이때 이름을 ‘율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크리노와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성악 실력은 “만일 이태리에 간다면 정율성은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2. 음악가로서의 활동

정율성은 상해에서 남경으로 가서 ‘류대진’이라는 이름으로 민족 항일 단체인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남경에서 좌파 청년들이 조직한 ‘5월 문예사’ 창립 대회에서 그의 음악 창작 활동 중 첫 작품인 「5월 문예사」를 작곡하였다. 그 대회가 끝날 무렵에 중국의 저명한 작곡가 니에얼[섭이(聶耳)]의 「의용군 행진곡」과 「아리랑」을 불러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937년 10월 연안에 도착 후, 정율성은 섬북 공학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1938년 로신 예술 학원 음악 학부에서 공부하였다.

1939년 말, 정율성은 로신 예술 학원에서 성악 교원으로 일했다. 1942년 8월 당시 화북(華北)에 있던 조선 혁명 군정 학교에서 교무부장을 담당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공산당 당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부인과 딸을 데리고 9월부터 도보로 중국의 연안을 떠나 3개월만인 12월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1946년 황해도에 배치 받아 황해도 도당 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해주에 음악 학교를 설립하고, 그 해에 김일성을 만났다. 1947년 봄, 평양으로 전근되어 조선 인민군 구락부 부장을 맡아 조선 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겸임하였다. 1949년에는 조선 국립 음악 대학 작곡학부장을 지냈다.

1950년 중국으로 돌아와 1952년부터 북경 인민예술극원 및 중앙 악단의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959년 반우파 정치 운동에서 정율성은 반당이라는 누명을 쓰고 비판을 받았다. 1966년에 문화 대혁명 운동이 시작되자 ‘특무’라는 죄명으로 감금되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창작 활동의 권리마저 박탈당해 그의 작품은 방송, 연주, 출판이 모두 금지되었다. 1976년 문화 대혁명이 종결되고, 주은래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 50주년을 위한 대형 작품을 창작하던 중에 12월 7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정율성은 서정 가요, 군가, 합창곡, 동요, 오페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360여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창작 활동을 시기 별로 요약해 보면 연안 시기에는 「연안 송」, 「연수 요」,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였고, 북한 체류 시기에는 「조선 인민군 행진곡」, 「두만강」, 「동해 어부」 등의 곡을 작곡하였다. 마지막 시기는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 시기로서 「망부운(望夫雲)」(1957), 「설란(雪蘭)」(1963) 등의 오페라를 창작했다. 「우리는 행복해요」 등의 가곡과 모택동의 시에 곡을 쓴 작품들을 남겼다.

1939년에 작곡한 「연수 요」는 민요풍으로 작곡한 서정 가곡이다. 그는 중국의 민간 음악의 음조를 가곡 창작에 도입하였다. 「생산 요」는 6/8박자의 한국 민요풍의 선율, 리듬 위에 중국의 서북 지역 민간 음악의 선율과 잘 조화시켜 작곡한 곡이다. 정율성은 중국 현대 합창제의 개척자로서 약 60여 곡의 합창곡을 작곡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곡이 1939년에 작곡한 「팔로군 대합창」이다. 그는 북한에서 「두만강」(1946-1949), 「동해 어부」(1946-1949)등의 대형 작품을 창작하였고 100여 차례 공연을 갖기도 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정율성은 아동들을 위한 동요를 작곡하였다. 동요 중에 애창곡은 「평화의 비둘기」(1952), 「우리는 행복해요」(1953) 등 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다.

묘소

중국북경에 위치한 팔보산 혁명 공동 묘지.

상훈과 추모

2005년부터 전남 광주에서 매해 정율성 국제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2012년에는 10월 25일부터 28일 사흘 동안 정율성을 주제로 축제가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이중연, 『신 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혜인, 1998)
  • 중국 조선족 음악 연구회 편,『20세기 중국 조선족 음악 문화』(민족 출판사, 2005)
  • 정율성 축제 (http://festivalo.kr/index.php?code=0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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