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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강북을 엿보다-『강북 일기』

한자 1872年, 江北을 엿보다 - 江北 日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요령성  
시대 근대/개항기
상세정보
성격 일기(답사기)
저자 최종범·김태흥·임석근
권책 1책 9 (46장)
행자 8행 18자 내외
규격 24×20cm
권수제 강북일기
저술 시기/일시 1872년 5월 30일 -7월 11일
소장처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 50
소장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의

최종범(崔宗範), 김태흥(金泰興), 임석근(林碩根) 등이 1872년 5월 30일부터 7월 11일까지 만주 지역 조선인의 실태를 조사하며 남긴 일기.

개설

최종범 등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현지인들에게 질문한 내용은 평안도 백성들이 압록강을 건너 간 이유였다. 관원들의 폭정과 별세계에 대한 환상 때문에 몰래 강을 건너갔지만, 대부분 머슴살이하며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867년 무산 부사 마행일이 환포(還逋) 10여 만 석을 강제로 거둬들이자 무산 백성들이 별세계 이야기에 현혹되어 대규모로 강을 건너왔다가 훌륭한 수령이 부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귀국하기도 했다. 도강한 조선인들은 농사, 인삼 채취, 사냥, 채금(採金) 등으로 생활했는데, 10명 가운데 8~9명은 만주인들에게 품을 팔아 살았다. 만주인에게 머슴살이하는 조선인은 움막조차 없이 지냈으며, 도적 홍호적의 노략질, 횡포에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저자

『강북 일기』에는 저자가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권수제 다음의 본문 첫줄 “임신 5월 30일. 최종범·김태흥·임석근 세 사람이 관가의 명령을 받고 하직하여, 죽전리(竹田里)에 있는 주중겸(朱重謙)의 집에 이르렀다.”라는 구절을 보면 최종범·김태흥·임석근 3명 가운데 한 사람이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는 나[我]라는 1인칭 주어가 거의 없고 3명의 이름을 그대로 써서 기록자를 분명히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관가에 제출하는 보고문이었기 때문이다. 만주어를 잘하는 ‘임석근에게 시켜서’ 질문하는 기록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임석근이 기록한 것은 아닌 듯하다. 위에 인용된 최초의 기록에서 최종범이 제일 앞에 나오고, 주요 화제인 별계(別界)와 고인(高人) 이야기도 최종범이 주로 질문을 이끌고 있으며, 직위로 보더라도 최종범이 이 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주인들과의 이야기도 최종범이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형태/서지

현존하는 『강북 일기』는 필사본 2본이 전한다. 하나는 연세 대학교 중앙 도서관 소장본이다. 46장 필사본인데, 권 구분 없이 필사하였다. 임신년(1872년) 5월 30일부터 7월 11일까지 42일 동안의 일기가 날짜순으로 기록되었으며, 6월 2일부터는 날짜가 바뀔 때마다 줄을 바꿔 써서 구분하기가 쉽다.

다른 하나는 장서각 소장본이다. 35장 필사본인데 연세 대학교 중앙 도서관 소장본이 46장으로 늘어난 것은 내용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글자를 크게 썼기 때문이다. 장서각 소장본은 1면 10행인데 비해서 연세 대학교 중앙 도서관 소장본은 1면 8행이며, 1행의 글자 수도 18자 내외로 장서각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2개의 필사본은 내용이나 구성에서 차이가 없으며, 첫 부분에 그림 지도가 실려 있는 형태까지도 같다.

편찬/간행 경위

평안도 백성 수천 명이 청나라 변방을 떠돌며 살게 되자, 후창 군수 조위현(趙瑋顯)이 후창군의 전 좌채장(前左寨將) 최종범(崔宗範), 전 조방장(前助防將) 김태흥(金泰興), 만주어 통역 임석근(林碩根) 등에게 만주 지역의 상황을 조사하게 하였다.최종범 등은 1872년 5월 30일부터 7월 11일까지 42일 동안의 답사한 내용을 일기식으로 기록하였다.

최종범·김태흥·임석근은 공식적으로 출장길에 나선 듯하다. 강행군 하다 자주 노숙한 것도 이들이 풍류 삼아 여행을 즐긴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일정 지역을 반드시 답사하며 조사할 목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7월 11일에 귀국해서 긴장이 풀어지자 4일간 크게 앓다가, 제일 먼저 관가에 가서 돌아온 것을 알린 것도 이들이 공식적으로 출장했음을 확인케 해준다.

최종범·김태흥·임석근에게 부여된 조사 임무는 첫째, 1864년 이후에 유포된 김유사(金有司)의 위서(僞書)에 대한 진위를 조사하는 것과, 둘째, 1871년 마록포 사건 후 만주인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위서의 내용은 압록강 건너편 어딘가에 나선동, 양화평, 옥계촌, 철포성 등 별세계가 있고, 그곳에 채(蔡) 선생, 곽(郭) 장군, 갈(葛) 처사, 김(金) 진사 등 영웅호걸이 살며 사람들을 모은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자성군 여연면에서부터 유포되기 시작하여 서북 양도, 심지어 서울에까지도 전해졌다. 위서에 속아 압록강을 건너는 자가 급격히 증가하자, 후창 군수 조위현이 최종범·김태흥·임석근을 현지에 파견하여 책의 진위를 조사토록 한 것이다.

마록포 사건은 1871년 12월, 만주인 벌목자들이 어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후창군 부성면 두지동으로 와 민가를 방화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압록강변 삼수, 갑산, 후창, 자성 등지에는 만주인이 주동이 되어 월강한 한인들과 몰래 들어와 벌목하여 가지고 가곤 하였다. 민가 방화 사건으로 후창군의 관군들이 벌목자들을 격퇴하였지만, 벌목자들은 후창, 자성에서 건너온 조선인을 규합하여 마록포에서 무력으로 대항해왔다. 진압군과 벌목꾼 간의 10여 일간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만주인왕양춘, 한오정 등은 앞으로 몰래 벌목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연면으로 작성하여 보내었고, 사건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탐사 지역은 평안북도 후창·자성 양군의 변경 지역으로 북으로는 동북쪽의 탕하(湯河)에서 서북쪽의 혼하(渾河) 일대까지 미치는 1,500여 리의 노정이었다. 탐사 기간에 3인이 숙식비와 배삯으로 지불한 금액과 사례로 준 물품을 보면, 전(錢) 9량 5전과 황금 60여 푼, 청심환 8개, 소합원(蘇合元) 22환, 백지 9권이었다.

민가를 찾지 못하거나 마적을 피해 산야에서 노숙하며, 생곡을 먹기도 하는 등 천신만고의 조사 행적이었다. 홍호적[마적]을 만날까 두려워했으며, 자신들을 정탐하러 왔다고 생각한 만주인들의 폭행을 피해 도망다니기도 하였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최종범과 김태흥이 4일간 크게 앓을 정도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구성/내용

임신년(1872) 5월 30일. 최종범·김태흥·임석근 3명이 관가의 명을 받고 죽전리[평안북도 후창군 하산면] 주중겸의 집에 모였다. 관가에서 마련해준 행구(行具)가 이미 와 있었다.

6월 1일. 하산면 금창리에서 압록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오구배에서 뗏목을 만들어 타고 강을 건너 (오랑캐 땅) 마록포(馬鹿浦)에 도착했다. 오랑캐 움막이 8채, 우리나라 사람 움막이 17채였다. 우리나라 사람 18명과 오랑캐 2명이 사금을 거르다가, 이들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신선들이 산다는 별계(別界)를 찾아왔다’고 하자, 자체 조직인 회상(會上)의 내규에 의해 붙잡았다. 임호범의 집에서 잤는데, 금창리에 살 때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6월 2일. 지난해 겨울 마록포 전투에서 채장(寨將)이었던 최종범과 조방장(助防將)이었던 김태흥의 신분을 알아챈 오랑캐 50여 명이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해치려 하자, 오랑캐 말을 잘하는 임석근이 나서서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설득하였다. 회상 통수(統首) 이서팔이 가호(假胡) 추성률·김성필과 의논하여 통행증[許送帖]을 만들어 주었다. 임호범의 집에서 자고, 4끼 밥값으로 2냥 4전을 냈다.

6월 3일. 의관을 임호범의 집에 맡겨 두고, 베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북쪽으로 20리 가서 혈암평(穴巖坪)에 있는 도회두 신태의 집에 머물렀다. 10년 전에 불법으로 넘어와 오랑캐 옷차림으로 살아가는 신태의 환심을 얻기 위해, 청심환 2알과 소합원 7알, 백지 1권을 주었다. 그가 회상의 문서 2책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1책은 주민의 이름을 적은 것이고, 1책은 무기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 마음속으로 다 외었다. 삼수(三水) 인차(仁遮)의 건너편에서 후창군 경계의 건너편 청금동에 이르기까지 400리에 있는 18개 부락을 합해 1회상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193호에 1,673명이고, 오랑캐는 163호였다. 장정 외에 군인이 310여 명이었다. 호총(胡銃)이 85자루, 대총(大銃)이 20자루, 우리나라 사람의 조총이 48자루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총은 입동에 거두어 회두의 집에 맡겨 두었다가, 이듬해 한식에 나누어주었다. 입동부터 한식까지 압록강이 얼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올 수 있는데, 이때 오랑캐 땅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응할까봐 무기를 거둬들이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 채삼(採蔘), 사냥, 채금(採金) 등으로 생활했는데, 10명 가운데 8~9명은 오랑캐들에게 품을 팔아 살았다. 2끼 밥값이 1냥이었다.

6월 4일. 강가를 따라 40리 거슬러 올라가면서 12굽이를 건너, 칠도구(七道溝) 경계에 있는 방성민의 집에서 잤다. 나선동·양화평·옥계촌이 신선 세계라는 소문을 듣고 3년 전에 몰래 건너온 사람이었는데, 2끼 밥값으로 1냥 2전을 냈다.

6월 5일. 동편으로 백두산이 4~5일 거리에 보였는데, 강폭은 30여 보였다. 북쪽으로 큰 고개를 넘자 50리 길에 숲이 하늘까지 뻗어 있었다. 시냇물 폭이 50보쯤 되는데, 옷을 걷어올리면 건널 만했다. 동쪽으로 7리를 거슬러 가자 들판이 펼쳐졌는데, 무산에서 온 박문권의 집에서 잤다. 오도구(五道溝)라는 곳이다. 청심환 2개와 백지 2권을 주고 지세를 물어보았는데, 날씨가 추워 감자밖에 심을 수 없었으며, 우리나라 사람 13호가 채삼과 사냥으로 생활했다. 초산에서 온 최선달·최도감·김장의 등 세 집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마을 어구 건너편이 후창군 경계인데, 16파소(把所) 이평(梨坪) 땅이었다. 최종범이 아파서 하루를 더 머물렀는데, 4끼 밥값이 2냥 4전이었다.

6월 7일. 2리쯤 가자 지형이 평탄해졌다. 진창을 걸어 북쪽으로 60리를 가자 화개산에 닿았다. 날이 저물었는데 인가가 없어, 나무 밑에서 노숙했다.

6월 8일. 서북쪽으로 40리를 내려가자 판내동 삼도구였다. 골짜기도 깊어지고 물빛도 검어졌는데, 5리쯤 산에서 내려와 김여옥의 집에서 잤다. 무산에서 10여 년 전에 넘어온 김여옥은 가호(假胡) 가운데 가장 말을 잘했는데, 그는 이들이 후창에서 온 탐객(探客)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경(燕京)과 자성(慈城)에서 변방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작년 마록포 전투에 참전했다가 이들이 채장과 조방장으로 참전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강을 건너갔던 이유는 임술년(1862) 백두산 사냥에 실패하여 빚이 늘어났기 때문인데, 그 뒤에 건너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증을 서다가 빚이 만냥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 김원택이 청금동 아래 삼도구에서 왕절로(往絶路)까지 150리의 대회두(大會頭)였으므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명단과 무기의 통계를 기록한 책 2권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1,465명, 집은 277채, 조총 73자루, 오랑캐는 792명, 그들의 움막은 220채, 대총 20자루, 호총 216자루였다.

6월 9일. 비가 와서 김여옥의 집에 머물며 술을 마셨다. 청심환 3알, 백지 3권, 소합원 10알로 답례하며 김원택이 다스리는 회상의 실태를 파악했다. 대부분 무산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는데, 좌수 이상청, 풍헌 한덕여, 감도감, 이도감 등은 향족의 후예였다.

6월 10일. 김여옥이 밥값을 받지 않아, 1냥 5전을 사내종에게 주었다. 서쪽으로 물길을 따라 50리 내려와, 장걸리 풍헌 김여백의 집에서 잤다. 일찍이 교분이 있던 사이였는데, 역시 ‘별계(別界)와 고인(高人)은 없다’고 했다. 2끼 밥값이 1냥이었다.

6월 11일. 물가를 따라 70리 가서 우뚝 치솟은 산봉우리를 만났으며, 다시 10리를 가서 ‘고려성(高麗城)’을 만났다. 높이는 3장(丈), 둘레는 15리인데,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서쪽으로 두 나라 초소가 모여 있는 두도구(頭道溝)가 10리쯤에 보였다. 성 밑으로 오랑캐 움막 수십 채가 있었다, 진재동의 집에서 잤는데, 2끼 밥값이 3푼, 방값이 1푼이었다.

6월 12일. 압록강을 끼고 우리나라 자성군과 만주여연면(閭延面)이 맞닿은 30리 넓은 들판에 나섰다. 물을 거슬러 북쪽으로 30리 가자 양쪽 강언덕 사이로 한 줄기 물이 굽이쳐 흐르는데, 5리에 한 집, 또는 10리에 움막 두 집이 있었다. 멀리 가려는 욕심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바삐 가다가 길을 잃어, 산골 시냇가에서 노숙했다.

6월 13일. 40리를 걸으면서 여울 37곳을 건넜다. 오랑캐 움막 34채, 우리나라 사람의 움막 27채가 있었는데, 오랑캐에게 머슴살이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움막조차 없었다. 오랑캐 왕파두(王把頭)의 움막에서 자고, 밥값 3푼, 방값 1푼을 냈다.

6월 14일. 서쪽으로 큰 고개를 넘었는데, 압록강 북쪽, 파강 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20리를 가서 고갯마루에 이르고, 북쪽으로 10여 리를 내려와도 여전히 고개 중턱이라, 나무에 기대어 노숙했다.

6월 15일. 20리를 가서 고개를 내려오니 왕구초(王溝稍)였고, 5리쯤 더 내려오니 소구(小溝)였다.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듯했다. 팔두강의 근원이 30보 너비인데, 옷을 벗고 건너자 비로소 오랑캐 움막이 자주 보였다. 무산에서 온 허유사(許有司)를 만나, 그의 집에서 잤다. 밥값으로 2푼을 냈다.

6월 16일. 북쪽으로 6~7리를 가서 한 고개 밑에 이르자 큰 길이 가로놓였는데, 청나라의 통순(統巡) 통사(通使)가 드나드는 길이라고 했다. 40리를 가자 빈 집 한 채가 있었는데, 통사가 오갈 때에 음식을 바치던 곳이다. 달리 인가가 없어, 이 집에서 잤다.

6월 17일. 서쪽으로 20리를 가서 고개를 내려갔다가, 큰길을 따라 10리를 가니 오랑캐의 움막이 있었다. 홍실라아자(紅實羅阿子)라는 곳인데, 오랑캐 유성운의 집에서 잤다. 인삼밭이 넓었으며, 산에서 내려온 뒤에 처음 본 큰 집이었다. 올해 봄에 넘어온 안복룡의 안부를 묻자, 홍호자(紅胡子)가 되었다가 향마적(響馬賊)에게 곤욕을 치르고 40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김맹탕의 사냥 움막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밥값은 3푼이고, 방값은 1푼이었다.

6월 18일. 서쪽으로 30리에 있는 삼천동까지, 오랑캐 움막 20채를 지났다. 모두 인삼을 심었는데, 하얀 서양무명으로 위를 덮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슴을 살았는데, 모두 가정을 이루지 못한 홀아비였다. 40리를 가서 팔두강(八頭江)에 이르러, 오랑캐 왕파두의 움막에서 잤다. 밥값은 3푼, 방값은 반 푼이었다.

6월 19일. 비가 갠 뒤에 늦게 떠났는데, 15리를 가자 팔두강 물이 불어 파강으로 흘러 넘쳤다. 강가로 2~3리를 가자 신선들이 사는 듯한 산이 솟았고, 눈앞에 80리 벌판이 펼쳐졌다. 압록강을 건넌 뒤에 처음 보는 들판인데, 파저평(巴瀦坪)이다. 알봉 밑에 재뒤[嶺後]의 대회두 왕보태(王保太)의 움막에서 잤다. 우리나라 사람 7~8명이 머슴으로 살았는데, 돈을 쉽게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머슴이 된 것이다. 왕보태가 3인의 짐을 뒤져본 뒤에 값비싼 물건이 없자 놓아 주었다. 밥값이 3푼이고, 방값이 반 푼이었다.

6월 20일. 서쪽으로 20리를 가서, 파저강에서 배를 타고 건넌 뒤에 배삯으로 1푼을 냈다. 큰길 따라 20리를 가다가, 초산에서 왔다는 김연지의 집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그에게 옥계촌과 양화평 등의 별세계를 묻자, 강을 따라 내려가면 홍호자 수천 명이 항마적 노릇을 하니 그만 돌아가라고 권했다. 그 말을 듣고 임석근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기를 재촉했다. 밥값이 2푼이었다.

6월 21일. 북쪽으로 30리 되는 육두강(六頭江)까지 가는 동안 오랑캐 움막 23채, 우리나라 사람의 집 6채가 있었다. 김영변이라 불리는 파강존위(巴江尊位)의 집에서 잤다. 진경(眞境)을 찾아왔다는 사연을 말하자, 올봄 의주에서 살던 홍 진사가 300명 장정과 수십 채 가마를 이끌고 강을 건너 왔다가, 도리사아치(道里沙阿峙)에서 홍호적 무리를 만나 부녀자와 재물을 몽땅 빼앗기고 산골에서 구차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밥값 2푼을 냈다.

6월 22일. 양식이 떨어져 옥수수 1말을 김영변에게서 샀는데, 값은 7푼이었다. 서쪽으로 50리 가는 동안 오랑캐 움막이 21채 있었다. 홍호적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자, 파강 하류에서 배삯 1푼을 내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2리를 가자 선천에서 왔다는 이훈장(李訓長)의 집이 있어, 별세계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산에서 왔다는 김씨가 홍호적을 만나 동행 2명이 죽고 옷과 보따리를 빼앗긴 채 달아나다 벼랑에서 떨어져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밥값이 2푼이었다.

6월 23일. 도둑을 만날까봐 겁이 나서 풀숲에 몸을 숨기며 30리를 갔다. 오두강가에 오랑캐 움막 7채가 있었지만 홍호적을 만날까봐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 밭고랑에서 미숫가루로 요기하고 밤을 지냈다.

6월 24일.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사두강(四頭江) 강가를 살펴보니, 수백 호 되는 오랑캐 움막이 도둑의 소굴로 보였다. 길을 바꾸어 반 리를 가서 사두강을 건너자 커다란 오랑캐 움막이 있었는데, 주막 같은 곳이다. 여기서 70세 된 노인 장순(張淳)을 만나 이 일대 이야기를 듣고 잤다. 밥값이 3푼, 방값이 1푼이었다.

6월 25일. 청심환 1알, 소합원 5알, 백지 1권을 주고 떠났다. 강물을 거슬러 50리를 가자, 오랑캐 움막 30채가 보였다. 햇볕이 너무 더워 시냇가에서 밥을 지어 먹고, 노숙했다.

6월 26일. 동쪽으로 60리를 가니, 다시 육두강 어구였다. 파강을 건너 김영변의 집에서 잤다. 밥값이 2푼이었다.

6월 27일. 전에 갔던 길을 따라 70리를 가서, 왕보태의 집에서 잤다. 밥값은 3푼이고, 방값은 받지 않았다.

6월 28일. 팔두강을 건너 동쪽으로 90리를 가니 산차자(山次子)였다. 빈집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잤다.

6월 29일. 동쪽으로 5리를 가자, 무산에서 온 사람들이 9채 모여 살았다. 여자들이 고쟁이도 다 떨어져, 붉은 허벅지를 드러내고 지냈다. 소춘령(小春嶺)을 50리 가서야 정상에 이르렀다.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노숙했다.

7월 1일. 방출라아자(方出羅阿子)까지 25리를 가서 사슴 잡는 이야기를 들었다. 탕하(湯河)의 근원까지 10리를 더 가서 최장의(崔掌議) 집에서 잤다. 밥값을 말하지 않아, 백지 1권을 주었다. 오랑캐 움막이 11채, 우리나라 사람의 집이 4채 있었다.

7월 2일. 시두하(始頭河) 하류까지 북쪽으로 10리를 갔더니, 인삼 농사를 하는 오랑캐 움막 3채가 있었다.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탕하 여러 부락의 통수인 오랑캐 황태(黃太)의 배를 타고 배삯으로 1푼을 냈다. 대영(大營)까지 30리를 가서, 무산에서 온 이덕희(李德禧)[1823~?] 선생의 집에 머물러 잤다. 오랑캐 움막이 7채, 우리나라 사람의 집이 3채 있었다. 전주 이씨 족보를 편찬하는 유사로 서울에 머물다가 별계와 고인 이야기를 듣고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이야기와, 1867년 무산 부사 마행일이 환포(還逋) 10여 만 석을 강제로 거둬들이자 무산 백성들이 별계 이야기에 현혹되어 대규모로 강을 건너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최근에 훌륭한 수령이 부임하자, 50여 호나 귀국했다. 이덕희는 부(賦) 1편과 시 1수를 지어 주었다.

7월 3일. 밥값을 받지 않아, 백지 1권을 주었다. 이덕희가 배웅하러 따라 나섰다. 오던 길로 30리를 가서 황태의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50를 가니 시두하에 오랑캐 움막 3채, 우리나라 사람의 집 2채가 있었다. 5리를 가서 무산 포수 이성윤의 집에서 자며 마록포 전투 이야기와, 재앞[嶺前]의 두 회상이 화약 사올 돈 2,000냥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7월 4일. 이성윤이 귀국하여 포과(砲科)에 응시하겠다고 했으며, 이덕희는 송화강흑룡강 유역의 지형을 설명해준 뒤에 돌아갔다. 동쪽으로 10리를 가 오랑캐 장가(張哥)의 움막에서 좁쌀 2되를 16푼에 사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지역을 60리 가서 노숙했다.

7월 5일. 운령(雲嶺)을 넘어 4~50리를 가도 길이 보이지 않아, 빗속에 노숙했다.

7월 6일. 남쪽으로 4~5리 가다가 벌목하는 오랑캐에게 길을 묻고, 길도 없는 산속을 남쪽으로 가다가 노숙했다.

7월 7일. 물길 따라 20리를 가다가 한 골짜기로 내려와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나무 밑에서 노숙했다.

7월 8일. 아직도 길을 찾지 못해 물길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물가에서 노숙했다.

7월 9일. 물길 따라 20리를 내려가다가 사람이 없는 사냥 움막을 만나고, 비로소 오솔길을 찾아 30리를 내려와 동대동(東臺洞) 어구에 다달았다. 동대동 어구를 나와 부운동에 이르렀는데, 우리나라 후창군 부성면 국평 맞은편이었다. 40보 너비의 시냇물을 건너 허긍의 집에 들렸다가, 모친상을 조문하고 잤다. 밥값은 반 푼이었다.

7월 10일. 곧바로 강을 건너려다가, 마록포에 남겨 둔 의관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고개를 넘었다. 55리를 가서 신태의 집에 들려 감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랑캐들이 강 건너 가서 벌목하는 것을 평안도 병마절도사 조태현이 엄금하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다. 세 사람이 흥분해 날이 저물었는데도 뛰쳐나가 10여 리를 갔는데, 거시동(巨柴洞)에서 오랑캐 10여 명이 몰려들어 ‘후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행패를 부렸다. 조태현이 지난 겨울에 오랑캐를 100명 가까이 죽였기 때문이다. 마록포임호범의 집까지 10리를 가서 잤다. 오랑캐 4~5명이 움막에서 “임가네 집에 온 3명이 탐객(探客)이 분명하니, 날이 밝으면 두들겨 패서 확인하자”고 의논하는 말을 임석근이 듣고, 3명이 한밤중에 달아났다. 강가에서 건너편에 있는 오구배 별파방장(別把防將) 이언표에게 문짝을 보내달라고 청하여, 겨우 강을 건넜다.

7월 11일. 주중겸의 집에 돌아왔다. 최종범과 김태흥이 4일간 크게 앓다가, 15일에야 관가에 나아가 복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강북 일기』는 세작 일기(細作日記)로 가치가 있다. 후창군은 1869년에 새로 설치된 고을이다. 함경도 후주부를 평안도로 배속시키면서 무창부와 합해 후창군을 만들었는데, 1871년 겨울에 건너편 만주인들과 충돌하여 서약서가 오갔으며, 1872년 6월 10일에는 청나라 예부와 자문(咨文)이 오갔다. 그런 와중에 후창군에서 세작(細作)[정탐] 3명을 보내 건너편 지역의 지형과 정세를 파악시킨 듯하다.

『강북 일기』는 세작 일기답게, 지형이나 성곽 묘사가 상세하다. 그 밖에 날마다 답사한 거리와 밥값, 방값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지나간 마을마다 조선인과 만주인의 호수, 인구수, 무기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참고문헌
  • 유승주, 「조선 후기 서간도 이주민에 대한 일고찰」(『아세아 연구』59호, 1978)
  • 최종범 저, 최강현 역, 『간도 개척 비사 – 강북일기』(신성 출판사, 2004)
  • 허경진, 『강북일기』(연세 대학교 중앙 도서관 소장 고서 해제 Ⅲ, 평민사, 2005)
  • 이동진, 「1872년 ‘강북’의 조선인 사회 : 『강북일기』에 나타나는 민족, 국가, 지역」(『동북아 역사 논총』, 동북아역사재단, 2005)
  • 이왕무, 「조선 후기 『강북일기』에 나타난 만주 지역 인식(『동북아 역사 논총』, 동북아역사재단, 2005)
  • 허경진, 「중국 조선족 문학 최초의 작품과 그 창작 배경에 대하여」(『한문 학보』18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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