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한자 新聞
중문 报纸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2월 12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7월 16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9월 18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1월 15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0월 16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5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10월 10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3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10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3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4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4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4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10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 1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4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7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5년 1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3월 1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8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년 1월
정의

조선족에게 뉴스·논설 및 여러 정보들을 제공하는 한글 간행물.

1940년대 이전

해방 이전 만주에서 발행된 신문은 대부분 중국어판이거나 일제에 의해 발행된 신문들이다. 『민성보』와 『간도 신보』가 대표적이다. 『민성보』는 1928년 2월 12일 연길현 용정에서 발행된 일간지로 당시 연길현·혼춘현·화룡현·왕청현연변 지역 교육계와 공상계 상류층 인사들이 공동 출자하여 창간되었다.

『민성보』는 ‘언론을 빌어 동포를 깨우친다’는 취지로 창간된 이래, 편집진에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당원이 대거 참여하여 언론을 통한 활발한 구국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초에 중견 편집진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민성보』는 폐간되었다. 현재 연변 당안관에는 1928년 5월 5일부터 1930년 9월 18일까지 발간되었던 신문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민성보』에 게재된 한인 사회와 관련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연변 시사 만평(延邊時事漫評)(중)」·「동만 운동(東滿運動)의 종횡관(8)」·「혁신단 사건 발생지 용암동 실사기(革新團事件發生地龍岩洞實查記)」·「집회일속(集會一束)」·「레닌주의 대한 민족 문제 개요(6)」·「일본 제국주의 재동북의 전도(前途)(속)」·「논 한민공당의 기인 및 중일러 국제 관계(論韓民共黨之起因及中日俄國際之關係)」·「화룡현 조사지(1)」 등이 그것이다. 이 기사명을 통해 『민성보』가 추구하였던 편집 방향의 대강을 알 수 있다.

『민성보』와는 달리 『간도 신보』는 일제의 침략· 이익을 철저히 대변하였다. 현재 연변 당안관에는 1923년 5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총122개월 분의 『간도 신보』가 사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그 원본을 구해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간도 신보』는 1921년 7월 16일 일제가 동북 지역을 침략하는 중요한 발판 가운데 한 곳이었던 연길현 용정에서 창간되었다. 발행인은 당시 용정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을 맡고 있던 안동정원(安東貞元)으로 일본 영사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다. 신문 창간 당시에는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으로 발행했는데, 현재 연변 당안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일본어판이다.

『간도 신보』는 모두 4면으로 구성되었다. 1면은 사론(社論)을 비롯하여 일본 관련 내용으로, 2면과 3면에는 연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역에 대한 내용으로, 4면은 광고로 구성하였다.

『간도 신보』에는 일본사와 관련된 일본 거류민회의 내용, 중국사와 관련된 중국 봉계 군벌의 내용 등이 실려있다. 그 가운데는 『간도 신보』에 나타나는 연변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관한 내용, 조선 총독부 관리들이 연변 지역을 방문한 내용, 소련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 관련 내용, 연변 지역과 함경북도 지역과의 무역 관련 내용, 일제의 조선 혹은 중국 한인 사회에 대한 지배 정책 관련 내용, 연변 지역을 비롯한 동북 지역과 관련된 여행기 등 방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하다.

『간도 신보』는 당시 연변 지역 한인 사회와 동북 지역, 함경도 지역, 소련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1차 신문 사료이다.

1940년대 해방 전후

해방 후 조선족 한글 신문들은 민족성·지방성·대중성을 특징으로 한다. 해방 이후 최초로 발행된 조선족 신문은 『한민 일보』로 1945년 9월 18일부터 그해 11월 4일까지 연길에서 발간되었다. 중국 내의 국민당과 공산당 관련 기사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정국 관련한 내용도 게재되었다.

1945년 11월 4일 연변 민주 대동맹은 『한민 일보』를 정간시키고 11월 5일부터 기관지 『연변 민보』를 창간했다. 『연변 민보』는 8절지 2면 일간지로 1946년 5월까지 연길에서 발행되었는데, 연변 뉴스와 조선족의 생활상, 민족 단결 및 소련 홍군에 대한 기사들을 많이 보도하였다. 남한 관련 기사도 가끔 게재되었다.

연변의 『한민 일보』·『연변 민보』와 같은 시기에 발행된 신문은 1945년 10월 16일부터 1948년 3월 2일까지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발행된 『인민 신보』이다.

『인민 신보』는 목단강시조선 민족 해방 동맹의 기관지로, 4절지 4면의 격일간지로 북만주 조선족을 대상으로 발행되었다. 초기에는 중국 공산당 대표 대회 보도 등이 게재되었지만, 1945년 말부터는 점차 북한과 관련 기사의 비중이 높아졌다.

『연변 민보』가 폐간된 후 1946년부터 연길에서는 『길동 일보(吉東日報)』(한글판)이 발행되었다. 『길동 일보』는 길동 군구 정치부에서 『연변 민보』를 접수하여 1946년 5월부터 8월까지 발간된 신문이다.

『인민 일보』는 길림성 위원회 기관지로, 『길동 일보』와 통합되어 1945년 10월 10일 창간되었다. 『인민 일보』는 1946년 9월 1일부터 1947년 2월까지는 연길에서 발간되었다. 초기에는 4절지 4면으로 1주에 6회 발간되다가 11월 4일부터는 7회로 늘어났다.

1947년 3월 1일 『인민 일보』는 『길림 일보』로 제호가 바뀌었고, 4절지 2면으로 축소되었다. 1948년 3월 해방군이 길림시로 옮겨 발행하여다.

당시 연변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8년 7월까지 『노백성보(老百姓報)』가 발행되었다. 1면은 한문판이고 2면은 한글판이었는데 비교적 영향력 있는 지방 신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연변 이외 지역에서 발간된 신문으로는 목단강의 『인민 일보』 이외 북만주의 『전투보』·『민주 일보』, 남만주의 『단결 일보』가 있었다.

『전투보』는 조선 의용군 제3지대 정치처가 1947년 3월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만든 신문이었다. 주로 부대 생활을 반영하였고 주요 독자들도 부대 장병들이었다.

『민주 일보』는 동북 행정위원회 민족위원회 기관지로, 목단강시에서 만들던 『인민 신보』와 『전투보』가 합병하여 만들어졌다. 주로 북만주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1948년 4월 1일부터 1949년 3월말까지 하얼빈에서 발행된 4절지 4면의 일간지였다. 당시 민주 일보사는 1948년 6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조선족 어린이들을 위한 주간 신문도 발간하였다.

『단결 일보』는 1947년 봄부터 1949년까지 주로 길림성 통화시에서 발간된 신문으로 2절지 4면의 주간 신문이었다. 『단결 일보』는 1948년 말 단동으로 옮겨졌다가 심양이 해방되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처음 주간일 때에는 『단결 시보』였는데 일간지로 바뀌면서 『단결 일보』로 개칭되었다. 독자는 군인들과 남만주의 조선족들이었다.

연변의 『길동 일보』·『인민 일보』·『길림 일보』와 『단결 일보』·『민주 일보』 등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에 대한 정치적 주장이 강했다. 당시의 중국의 해방 전쟁과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토지 개혁, 전선 지원 등의 보도에 주력하였다.

이밖에 중국 주재 한국 대표단 동북 총사무소가 1946년 장춘에서 발행한 『동북 한보(東北韓報)』가 있다. 1948년 심양으로 옮겨갔지만 그곳이 해방되면서 폐간되었다. 8절지 2면 일간지로 주로 한국 교포 생활을 보도하면서 한반도·중국 및 세계 정세에 관한 시사를 보도했다. 정치적 성향은 공산당과 소련을 반대하였다. 국민당의 세력권 내에서 한글로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 후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민족 정책에 따라 많은 한글 신문들이 속속 창간되었다. 『연변 일보』·『동북 조선 인민보』·『흑룡강 신문』·『요령 신문』·『길림 신문』·『중국 조선 소년보』 등이 대표적인 신문들이다.

『연변 일보』는 1948년 4월 1일 중공 연변 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동북 전체가 공산화되면서 동북국(東北局)의 결정에 따라 1949년 4월 1일 『민주 일보』·『단결 일보』와 통합되어 『동북 조선 인민보』로 바뀌었다.

『동북 조선 인민보』는 중공 연변 지방 위원회의 기관지인 동시에 동북 지역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이었다. 『동북 조선 인민보』는 1950년 11월부터 1951년 8월까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연길시 민주촌에서 발행되었다.

당시 신문사는 남·북만주에 각각 주재 기자와 자체 통신망을 갖추고 있었다. 1951년 3월 동북 3성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통신원 대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1952년 4월 20일부터 『동북 조선 인민보』는 신문 제호를 제외한 모든 기사에서 한글로만 기사를 작성하였다. 동북 조선 인민보사는 조선족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1949년 11월 7일부터 4절지 4면의 일간지로 『동북 조선 인민보』(노동판)을 만들었으나 1954년 4월 10일 정간되었다.

1954년 동북군이 철수하면서 1955년 1월 1일부터 『동북 조선 인민보』는 『연변 일보』로 개칭되었지만, 중공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대상 지역이 연변으로 축소되었고, 남·북만주의 주재 기자들이 소환되었으며 통신 보도망도 폐쇄되었다.

『연변 일보』는 1952년 4월 24일부터 신문 보도에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1956년 3월 1일부터는 제호까지 한글로 고쳤고, 1956년 1월부터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꿨다. 1958년 1월 1일부터는 중국어판 『연변 일보』를 제작하였다.

『연변 일보』는 문화대혁명 당시 정간되었다가 1973년부 1월 8일부터 속간되었고 1978년 10월 11일 당 위원회 감독제가 편집위원회 감독제 하의 주필책임제로 개편되었다.

1950년대

『중국 조선족 소년보』는 1957년 7월 중국 조선족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연길에서 창간되었다. 초창기 제호는 『소년 아동』이었는데 1966년 1월 『연변 소년』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연변 소년』은 1966년 7월 정간되었고 1982년 9월 복간되면서 『연변 소년보』로 바뀌었고, 1986년 1월 또다시 『중국 조선족 소년보』로 변경되면서 전 중국 조선족 소년들 대상의 신문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1980년 9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존속했던 주간신문 『중국 소년보』(한글편역판)의 영향을 받았다.

연변 이외의 지역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으로는 흑룡강의 『목단강 일보』와 『흑룡강 신문』, 요령성의 『요령 신문』 등이 대표적이다. 1955년 『동북 조선 인민보』가 『연변 일보』로 제호가 변경되면서 흑룡강성에는 조선족을 위한 한글 신문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7년 3월 1일 흑룡강성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목단강 일보』가 목단강 지방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되어 1월 4절지 4면 격일간으로 발행되었다.

1962년 『목단강 일보』가 정간된 후, 그해 10월 1일 『흑룡강 신문』이 하얼빈에서 창간되었다. 1963년 『흑룡강 일보』로 제호가 바뀌었고 7월부터 격일간 발행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신문 제호가 또다시 『흑룡강 조선문보』로 개칭되었다. 1983년 1월 흑룡강 신문사에서 독립하여 7월부터 오늘날 『흑룡강 신문』으로 고쳐지고 2절지 4면으로 지면이 늘어났다.

1960년대

『요령 신문』은 1966년 1월 1일 중국요령성 기관지로 심양에서 창간되었다. 이전 1958년 8월 창간된 『요령 농민보』(한글판)이 있었지만 폐간된 지 5년 만에 발행된 것이다.

창간 당시 제호는 『요령 일보』로 요령성의 조선족 농민과 간부 및 기타 분야에 종사하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발행되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정간되었다가 1979년 복간되었고 1982년 6월부터 『요령 조선문보』로 개칭되었다. 1986년 1월부터 지금의 『요령 신문』으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에 『연변 청년보』·『장백보』·『훈춘보』·『왕청보』·『연길보』·『황룡보』 등의 신문이 창간되었다.

1970년대

1970년에 들어서면서 연변에는 많은 새로운 신문들이 창간되었다. 1970년에 연변 위생 선전 교육소에서 만든 『위생 선전』, 1973년 1월 연변 농업 과학 연구소와 연변지구 농업 과학기술 정부 중심소에서 만든 『연변 농업 과학기술』 등을 대표적인 신문들이다.

1980년대

1980년대에도 여러 신문들이 발행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길림 신문』을 꼽을 수 있다. 『길림 신문』은 1985년 4월 1일 길림성 백만 조선족을 대상으로 연길에서 창간되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외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한글로 된 신문이 없어 불편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성 단위급으로 발간되었다. 이에 장춘·길림·통화 등지에 주재 기자를 두었다. 『길림 신문』 창간 당시에는 연변일보사 편집위원회에 소속되어 2절지 4면 격일간 발행되었는데, 1987년 4월부터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1982년 7월 연변 과학기술 협회와 민족사무위원회에서 발간한 『과학기술 신문』, 1983년 5월 연변 산아제한위원회에서 만든 『인구 선전』, 1984년 6월 용정 과학기술 협회에서 만든 『용정 정보』, 1984년 10월 연변 방송국에서 발행하는 『연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1985년 6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창간한 『생활 안내』 등이 발행되었다.

1990년대 이후

1992년 중국 공산당 제14차 대표 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건립에 대한 목표를 제기한 후 신문 산업은 계획경제 발전 모델로부터 시장경제 발전 모델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신문은 ‘기관형’으로부터 ‘봉사형’, 또는 ‘기업형’으로 전환되면서 경제력도 크게 늘어났다. 신문 사업 경제가 발전되면서 적지 않은 언론 매체들은 규모화, 집단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005년 말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안관에 소장된 신문은 모두 63종 2,403책에 달한다. 이 신문들을 언어별로 살펴보면, 한글판 신문 10종, 중국어판 신문 48종, 일본어판 신문 1종이다. 그 가운데서 『연변 공상보(延邊工商報)』를 비롯한 4종의 신문은 한글판과 중국어판을 동시에 발행하고 있다.

평가

한국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판물은 조선족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와 목적을 지닌다. 즉 민족의 언어를 사용해 의사전달 체계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이 주어지기 때문에 조선족들은 일찍부터 신문 발행과 함께 잡지 및 소설류를 한국어로 출판했다. 그리고 이 출판물들은 조선족을 하나로 묶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김원태·최상철, 「중국 조선족 동포의 우리말 신문 방송에 관한 연구」(『한국 언론 학보』 28, 1992)
  • 바이두(百度百科)(http://www.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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