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

한자 唱歌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정의

근대 중국 동북 지역에서 불려진 자주 독립, 민권 옹호, 문명 개화의 의지를 선양하는노래.

개설

창가는 한민족의 전통적 음악에서 쓰지 않던 외래 명사로서 1880년대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근대적인 반일 문화 계몽 운동의 수단의 하나로 나타난 창가는 그 대부분이 당시 각지에 설치된 사립 학교나 진보적인 문화 단체 또는 반일 무장 대오 내의 시가 창작에 능한 지식인들에 의해 창작되어 광범한 계층에서 널리 불리어왔다.

후에 창가는 학교 교육 과목에 편입되면서 학교 음악과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창가의 주제는 주로 반봉건, 반침략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며 인민 대중을 문명과 개화로 이끄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동심가」, 「자유가」, 「육대주가」가 있다. 그리고 근대 문명과 개화 의식을 구가한 창가들 중에는 남녀 평등, 자유 혼인을 고취하는 「여자는 근본」, 「가정가」, 「결혼 축하가」, 「이혼가」, 「사랑곡」 등이 있으며, 민족의 독립과 진흥을 위하여 새로운 학문과 과학을 습득해야 한다는 민족 자강 의식을 고양한 노래도 많다. 예를 들어 「학도가」, 「권학가」, 「수학가」, 「수업가」 등이 망라된다.

창가의 역사

창가가 한민족 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이다. 1879년 일본이 신교육령을 반포하면서 음악 취조소(音樂取調所)가 설치되고, 1881년에 『소학 창가집』이 처음으로 편찬되었다. 이것이 조선에 도입되면서, 1886년에 조선 최초의 근대학교인 배재 학당(培材學堂)에 창가 과목이 설치되었다. 이후 창가는 신식 학교의 한 과목으로 인정받아 신식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유형의 학교들이 조선인 거주 지역에 세워졌다. 비록 학교를 세운 목적은 달랐지만 새 지식을 전수하고 창가를 정식 과목으로 설정하는 것은 일치하였다. 초기의 창가는 찬송가였다. 이 시기 조선인의 이주와 더불어 여러 종교 단체의 포교도 매우 폭넓게 진행되었으며 화룡, 용정, 팔도구 등의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와 기독 교회당이 세워지고 연이어 통화, 장백, 안동, 봉천 등 지역에도 파급되었다. 종교 계통에서 세운 학교들에서는 첫 시작부터 배일 계몽 사상을 전수하고 창가 과목에서도 이런 정서 교양을 위주로 하였다. 이 때 부른 찬송가는 조선말로 된 것인데 이는 조선에서 1892년에 조선말로 번역된 것이었다.

1906년에 애국 지사 이상설은 용정촌에 처음으로 조선인 신식 학교인 ‘서전 서숙’을 세웠다. 이후 창가는 신식 학교들에서도 불리어졌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조선인의 민족 교육을 말살하였다. 이른바 ‘무료 교육’, ‘졸업 후 취직’이란 수단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일본 학교에 끌어들여 일제 문부성에서 편찬한 『창가집』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들의 창가 음악을 말살하지는 못하였다. 시종 창가를 반일의 선동 무기로 삼아 일제의 노화 교육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창가란 이름은 이렇게 백 여 년을 지난 오늘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창가를 부른다’ 고 한다.

특징

창가는 찬송가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찬송가 곡조에다 새 가사를 바꾸어 당시 생활을 반영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기성 민요들에 새 가사를 도입한 경우도 있었다. 창가의 보급과 발전을 통하여 당시의 음악은 근대 대중가요, 예술 가요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국권 피탈’ 직전에 편찬된 『보통 교육 창가집』은 모두 27곡으로 묶어졌는데,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 일본 창가집에서 직접 번역해서 수록한 「기러기」, 「토끼와 거북이」, 「학문가」, 「권학가」 등이고, 둘째 찬송가에 새 가사를 바꾼 「갈지라도」, 「직송」, 「춘조」들이며, 셋째 찬송가 이외의 기성곡, 즉 프랑스 민요 선율을 이용한 「나비」, 스코틀랜드 민요 선율을 이용한 「필업가」 등이다.

중국 조선족들이 세운 사립 학교의 창가 과목에서는 반일 사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통화지구 집안현 화전자의 광성 학교에서 사용한 창가 교재는 「모험 맹진가」, 「복수 설치가」, 「운동가」, 「동심가」, 「학생전진가」, 「쾌남가」, 「상봉 유사가」 등이며, 통화현 배달 학교의 창가 교재는 「소년 남자가」, 「학도가」, 「권학가」, 「행보가」, 「혈성대가」, 「우리의 운동장」, 「의무가」, 「세계일주가」, 「태평양가」, 「부모의 은덕」, 「상봉가」 등 28수로 묶어졌다.

초기의 창가들은 반봉건적인 문명 개화와 민족적 각성을 고취하는 데 머물렀으나, 20세기의 창가들은 일본 침략자의 잔인하고도 야수적인 만행을 폭로 단죄하고 민족의 해방 투쟁 의지를 반영하였다.

창가는 우선 사상 및 형식상에서 모두 현대 자유시로 과도하는 형태를 이루었다. 형식면에서 보면 전통적인 가사에서 4·4조가 파격되고 점차 자유시로 이행하는 형태를 취하였으며 언어 사용면에서도 언문 일치의 원칙을 제창하면서 소박하고도 생동한 민중들의 구두어를 도입하는 데 힘을 들였다. 그리고 창가는 많은 의병과 독립 지사들에 의하여 창작됨으로 하여 선명한 반일 색채를 띠었고 후에 항일 혁명 가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행보가」, 「작대가」, 「동원가」, 「용진가」, 「독립군가」와 여러 학교의 교가는 창가로 창작되었는데, 이후에는 수정되면서 항일 혁명 가요의 한 부분이 되었다.

참고문헌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3-예술사』민족 출판사, 1994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2-문학사』(민족 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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