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막전

한자 永幕殿
중문 永幕殿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정의

1935년 12월 간도용정에 세워진 청림교의 예배당.

개설

동학에서 분리되어 나와서 교주 남정(南正)이 1913년에 창설한 신흥 교파, 청림교에서 1935년에 남홍광(南洪光) 등이 의연 활동을 벌려 그해 12월에 용정 북산에 영막전(永幕殿)을 세워 교도들은 달마다 향을 지피고 예배를 하였다. 영막전은 유교·불교·도교의 교리를 섭취하여 유심주의 수도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청림교가 신봉하는 ‘대오도지원리(大悟道之原理)’는 유교, 불교, 도교를 합치면 ‘무극’이다. 무극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있으며 선천적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유쾌하면 ‘무극’으로 되고 극락세계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신도들은 영막전에서 염불을 외우고 예배를 드리고 마음을 수련한다. 이를 통해 ‘만사지(万事知)’의 경지에 닿을 수 있고, ‘무위이화(無爲而化)’가 된다. 무위이화는 무극으로 극락세계에 닿게 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설립과 활동

청림교의 예배 장소, 영막전은 간도의 용정과 토산자[화룡현] 일대의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간도 주교는 임갑석(林甲石)이다. 3·13 반일 시위에 많은 청림교도들이 참가했으며 교주 남정이 죽은 뒤 한병수(韓秉洙) 등이 청림교를 친일의 길에 몰아넣었다.

1925년 청림교는 재차 반일 경향을 띠여 주요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그해 6월말 용정에는 청림교 교회 하나, 교도 30여 명밖에 없었다. 1936년에는 조선의 선조들을 기념하는 육태묘(六太廟)를 지었다. 1942년 3월, 귀석비(龜石碑) 14개를 수건하고 7개월이나 향불을 지피며 예배를 드렸다. 1942년 3월 반일 사상이 있는 조선인들이 적극 교회에 참가하여 연길·화룡 두개 현에만 교도 1,000여 명이 있었다. 1944년 용정에서 ‘청림교 사건’이 일어났다. 1946년 임창세(林昌世) 등은 비석을 세우고 청림교 전도 활동을 회복했다. 이듬해 임창세가 국외로 떠나자 영막전에도 예배하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의의와 평가

영막전은 동학 사상을 주체로 하면서 『정감록』 사상을 결합하였고 1920년 초 반일 운동에 궐기하면서 대종교의 단군 신앙에 기울어졌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는 대성 유교를 건립하고 공맹지도를 숭상하다가 1925년부터 1944년까지는 정식으로 지난날의 추상적인 한울님의 숭배로부터 단군을 비롯한 역대의 개국 시조를 신앙하는 민족 종교로 변하였다.

영막전은 1920년 후반기로부터 단군을 숭배 대상으로 삼은 이후부터 동학의 전통적인 종교 활동 형식을 결합시켜 한 방면으로는 신도들에게 민족 의식과 역사전통을 보존·계승하게끔 교화하여 일단 유사시에 조직·동원함으로써 반일 봉화를 지피게 하려하였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역대 개국 시조들의 망령에게 ‘일제 필패, 독립 필성’의 기도를 드리면서 강대한 일제와 공개적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저들의 반일 독립의 염원을 하소연하며 단군 신령에게서 ‘멸왜 독립’의 계시를 받으려 공공 협력을 이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병철 외:『간도와 한인종교』,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종교연구소, 2010)
  • 김춘선:『延邊地區朝鮮族社會的形成硏究』, (길림 인민출판사, 2001.)
  • 임혜봉,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민족사, 20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6.1.5,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