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현 교회

한자 琿春縣 敎會
중문 珲春县教会
분야 역사/근현대|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회
설립 시기/일시 1924년
정의

1924년 연길 교구의 산하로 동만주 훈춘현에 세워진 천주교회.

개설

처음 동만주 일대 천주교 신도는 연길과 화룡에 거주하였다. 이후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1909년에 연길현 용정과 화룡현 삼원봉 영암촌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신도들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하여 도처에 신도 마을을 건설하였다. 그 결과 동만주 일대에는 학서골·싸리밭굽·삼원봉·부채골 등 천주교 공소가 설립된 곳에 신도마을이 형성되었다.

1928년 동만주 일대의 천주교 신도는 1만 2,057명으로 증가하였지만, 연변 각지의 농촌에 설립한 천주교 공소, 야학 강습소, 사립 학교는 한 때 위기를 맞았다. 장작림의 동북 군벌이 실시한 귀화와 압력으로 많은 조선인이 국내로 들어오거나 만주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신도의 숫자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동만주 일대 천주교 교세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새로운 선교 전략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1929년 연길 교구가 정식으로 성립되고 2월 5일에는 백화동 신부가 교구장으로 취임하고 중앙 관리소를 국자가에 설치하였다. 백화동 신부의 수하에는 독일인 신부 20명, 조선인 신부 2명 외에 연길·훈춘·화룡·두도구·팔도구 등 교회에 16명의 독일인 수사(修士)가 있었다. 연길 교구 산하의 화룡·용정·연길·훈춘과 명월구·목단강·신참·돈화·합마당 등지에는 14개의 교회에 1만 5,000명의 신도, 사립 학교 41개소에 학생 1,500명이 있었다. 연길 교구는 선교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입장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육 선교의 방침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연길 교구에는 천주 교회가 있는 곳에는 꼭 학교가 병설되어 있게 되었다.

현황

팔지(八池)와 마찬가지로 훈춘은 백신부가 매년 한번씩 순회 선교할 때마다 신도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장기간 천주교 공소로 있었다. 그러다가 1924년에 육도포 교회 주임 신부로 있던 가니시오구신부를 주임 신부로 맞아들이면서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되고 5년 후, 즉 1929년에 연길로 전근한 구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엑베르도정묵덕 신부에 의해 본당 증축과 학교 설립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부터 교세가 확장되기 시작하여 1933년에는 3만여 원을 투자하여 해성 학교와 신부 주택 그리고 수녀원 분원과 병원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준공하였는데 건평이 1,940㎡에 달하였다. 하지만 시국의 불안정으로 훈춘 교회 산하 22개 공소는 부진 상태에 처하였으며 신도는 1,244명 있었다. 부설 해성 학교[3년제]에는 교원 3명, 학생 180명이 있었고 야학교와 주일 학교에는 학생이 각각 50명, 55명이 있었다.

교회 부설 수녀원 분원에서는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고 병인 구제에 나서서 4,500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여 주었고 또 여자 야학교도 설립 운영하였다. 훈춘 교회에는 예수 성심회, 가톨릭 진행회 등 교회 조직이 있었고 회원이 23명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연길 교구 소속이었던 훈춘현 교회는 선교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입장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육 선교의 방침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연길 교구에는 천주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학교가 병설되었다. 훈춘현 교회도 이주 조선인의 생활 안정과 정착에 기여함으로써 해당 지역 조선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 정용두, 류성민『종교학 10강』(성광문화사, 1995년)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한국교회사연구소, 1982년)
  • 김광회, 『연변천주교의 연혁과 오늘의 상황』(『연변문사자료』8, 1997년)
  • 『연길교구 각교회 연혁과 현세』(『카톨릭청년』41, 1936년)
  •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6, 종교사』민족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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