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구 교회

한자 明月溝 敎會
중문 明月沟教会
분야 역사/근현대|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회
설립 시기/일시 1930년
정의

1930년 연길 교구 산하로 동만주의 연길현 명월구에 세워진 천주교회.

설립 목적

천주교세의 확장과 해당 지역 조선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처음 동만주 일대 천주교 신도는 연길과 화룡에 거주하였다. 이후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1909년에 연길현 용정과 화룡현 삼원봉 영암촌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하여 신도들은 도처에서 신도 마을을 설립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동만주 일대에는 학서골·싸리밭굽·삼원봉·부채골 등 천주교 공소가 설립된 곳에 신도 마을이 형성되었다.

1928년 동만주 일대의 천주교 신도는 1만 2,057명으로 증가하였지만, 연변 각지의 농촌에 설립한 천주교 공소·야학 강습소·사립 학교는 한 때 위기를 맞았다. 장작림의 동북 군벌이 실시한 귀화와 압력으로 많은 조선인이 국내로 들어오거나 만주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신도의 숫자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동만주 일대 천주교 교세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새로운 선교 전략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1929년 연길 교구가 정식으로 성립되고 2월 5일에는 백화동 신부가 교구장으로 취임하고 중앙 관리소를 국자가에 설치하였다. 백화동 신부의 수하에는 독일인 신부 20명, 조선인 신부 2명 외에 연길·훈춘·화룡·두도구·팔도구 등 교회에 16명의 독일인 수사(修士)가 있었다. 연길 교구 산하의 화룡·용정·연길·훈춘과 명월구·목단강·신참·돈화·합마당 등지에는 14개의 교회에 1만 5000명의 신도, 사립 학교 41개소에 학생 1,500명이 있었다. 연길 교구는 선교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입장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육 선교의 방침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연길 교구에는 천주 교회가 있는 곳마다 학교가 병설되었다.

이는 명월구 교회의 설립과 확장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명월구, 즉 옹성라자(瓮聲拉子)는 대령동에서 북으로 30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이었다. 대령동 교회가 설립된 후 곤라도박신부는 옹성라자 공소를 주요 공소로 지정하고 공소의 강당을 신축하고 학교와 교회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1930년에 명월구 교회가 정식으로 설립하고 박신부가 초대 주임 신부를 담임하였다. 이듬해 고르비니안주신부가 부임하여 성당을 비롯한 신부 저택을 벽돌로 신축하고 보록 학교(保祿學校)를 확장하여 해성 학교로 발전시키는 등 교회 시설을 완전하게 갖추었다. 동시에 신부 저택을 이용하여 수녀원 분원을 설립하였는데 1936년까지 4명의 수녀가 선교사업을 협조하고 있었다.

1936년, 주신부는 신설된 신참 교회의 주임 신부로 전근해가고 용정 교회의 보좌 신부로 있던 아르놀노신부가 명월구 교회에 주임 신부로 왔다. 1936년, 명월구 교회에는 7개 공소와 1,206명의 신도가 있었고 부설 해성 학교에는 교원 7명과 학생 367명이 있었으며 주일 학교에는 학생 133명이 있었다. 명월구 해성 학교는 6회에 걸쳐 졸업생 45명을 배출하였다. 명월구 교회에는 교회 조직이 3개가 있었는데 총 249명의 회원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연길 교구명월구 교회는 선교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입장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육 선교의 방침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연길 교구에는 천주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학교가 병설되었고, 해당 지역 조선인 사회의 안정과 정착에 기여함으로써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 정용두, 류성민『종교학 10강』(성광문화사, 1995년)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한국교회사연구소, 1982년)
  • 김광회, 『연변천주교의 연혁과 오늘의 상황』(『연변문사자료』8, 1997년)
  • 『연길교구 각교회 연혁과 현세』(『카톨릭청년』41, 1936년)
  •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6, 종교사』민족출판사, 2006년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