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례

한자 王思禮
중문 王思礼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고대
상세정보
성격 인물|고구려 유민|장군
성별 남성
대표경력 사공(정1품)
출생 시기/일시 미상
활동 시기/일시 752년(天寶 11)
활동 시기/일시 753년(천보 12)
활동 시기/일시 754년(천보 13)
활동 시기/일시 755년(천보 14) 6월
활동 시기/일시 755년(천보 14) 11월
활동 시기/일시 756년(至德 1) 7월
활동 시기/일시 757년(지덕 2)
활동 시기/일시 759년(建元 2)
활동 시기/일시 760년(건원 3)
몰년 시기/일시 761년(上元 2)
활동지 중국 삭방부
중국 장안·낙양 등 안사의 란 발발지
정의

당에서 활약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

개설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의 번군(藩軍)에서도 장군으로 활동하였으며 당 변방 지역에서 이민족 침입에 대항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안록산의 난(755)이 발생하자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정1품 사공(司空)의 자리에 올랐다.

활동 사항

왕사례(王思禮)는 고선지(高仙芝)·이정기(李正己)·왕모중(王毛仲) 등과 함께 중국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열전에 기록될 만큼 당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고구려 출신 장군이다.

『구당서(舊唐書)』 왕사례전(王思禮傳)에 의하면 왕사례 가문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옮겨 살게 되었다. 본래 영주 지방은 고구려 멸망 후 거란인,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왕사례의 가문도 그곳에서 살다가 삭방군(朔方軍)[내몽고 지역)으로 옮겨 갔다. 아버지 왕건위(王虔威)는 군장(軍將)으로서 전투에 능하였고, 아들 왕사례도 젊어서 군사(軍事)를 익혀 군인이 되었다.

왕사례는 절도사 왕충사(王忠嗣)[706~750]를 따라 하서로 갔다가, 가서한(哥舒翰)[?~756]과 함께 왕충사의 압아(押衙)가 되었다. 이후 가서한이 농우절도사(隴右節度使)가 되자 주필(周泌)과 함께 가서한의 압아가 되었다가, 석보성(石堡城)을 함락시킨 공으로 우금오위장군(右金吾衛將軍)에 제수되어 관서병마사(關西兵馬使)를 맡고 하원군사(河源軍使)를 겸하였다.

752년(천보 11) 운휘장군(雲麾將軍)에 가자되었으며, 753년(천보 12)에 가서한이 구곡(九曲)을 정벌할 때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나라 변방인 토번 정벌(천보 13)에 이민족 장군으로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755년(천보 14) 6월 금성 태수(金城太守)에 가자되었다.

755년 11월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가서한은 토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었고, 왕사례는 현종(玄宗)[685~762]에게 주청하여 개부의동삼사 겸 태상경동정원(開府儀同三司兼太常卿同正員) 겸 원수부 마군도장(元帥府馬軍都將)을 맡았다. 756년(천보 15) 가서한이 관서역(關西驛)에서 안록산 군에게 잡혀가 살해당했지만 왕사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756년(지덕 1) 7월 9일 현종의 아들 숙종(肅宗)[711~762]이 즉위한 후, 6월에 동관(潼關)이 함락된 것으로 인해 견책을 당했으나 훗날 공훈을 세울 수 있다고 하여 석방되어 관내 절도사(關內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수복하는 데 전공을 세워 병부상서가 되었고 곽국공(霍國公)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758년(건원 1) 9월 사사명(史思明)[?~761]이 반란을 일으키자 759년(건원 2)에 곽자의(郭子儀)[697~781]등 9명의 절도사와 더불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를 상주(相州)에서 포위하였다. 하지만 반군의 공격으로 오히려 토벌군이 궤멸당하였고 왕사례와 이광필(李光弼)[708~764)의 군대만 무사하였다. 왕사례는 태원윤 북경유수 하동절도사(太原尹北京留守河東節度使) 겸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하였고 군량을 저축하고 무기를 정밀하고 예리하게 만들어 전쟁에 대비했다고 한다.

760년(건원 3) 당시 최고 관직이었던 삼공(三公)의 하나인 정 1품 사공(司空)이 더해졌는데, 무덕(武德) 연간 이래로 삼공으로서 재상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오직 왕사례뿐이었다.

왕사례는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는 도중 761년(상원 2) 4월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태위(太尉)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왕사례는 처음에 번병으로 당 외방 수비에 공훈을 세웠지만 안사의 난이 발생하자 당군의 중추부에 있으면서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현종의 신임을 얻었고 이민족으로서 삼공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까지 받았다.

『구당서』에는 왕사례가 뜻을 받드는 것과 계책을 모으는 것에 뛰어났지만 용병술은 부족하였다고 평하였으나 그러면서도 물자·재무 관리에 능하고 법을 엄정히 하여 사졸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으니 당시 사람들은 그 점을 칭찬하였다고 하여 이민족 장군에 대한 찬사를 기술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참고문헌
  • 『구당서』
  • 『신당서』
  • 김현숙,「중국 소재 고구려 유민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23, 한국고대사학회, 2001)
  • 김현숙,「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의 거취 문제」(『한국고대사연구』33, 한국고대사학회, 2004)
  • 정병준,「안사의 란과 왕사례 」(『신라문화』26,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5)
  • 정병준,「‘營州城傍高麗人’ 왕사례」(『고구려발해연구』19, 고구려발해학회, 2005)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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