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림답부

한자 明臨答夫
중문 明临答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관리
성별
대표관직 국상
출생 시기/일시 67년
활동 시기/일시 165년
활동 시기/일시 166년
활동 시기/일시 172년
몰년 시기/일시 179년 9월
정의

고구려신대왕 때의 국상.

가계

연나부(椽那部) 출신이다.

활동 사항

명림답부[67∼179]는 하위 관직인 조의(皁衣)였으나, 군사를 동원하여 165년(차대왕 20)에 포악한 왕으로 원성을 샀던 차대왕을 시해하였다. 그 후 좌보와 우보 등이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伯固)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제8대 신대왕(新大王)[165~179]이 즉위하였지만 배후에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한 사람은 명림답부였다. 명림답부는 166년(신대왕 2) 패자(沛者)로 승진하면서 최초로 설치된 제가 회의의 의장인 국상(國相)에 취임하였다.

172년에 후한(後漢)의 현도 태수(玄菟太守)인 경림(耿臨)이 침략해 왔을 때 큰 공을 세웠다. 후한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많은 신하들은 전면전을 주장했으나 명림답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원거리를 이동해온 적이 식량을 획득할 수 없게 만드는 소위 청야 전술과 지구전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 전략으로 적을 철수하게 만들었으며,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추격전을 벌여 좌원(坐原)에서 대승을 거뒀다. 명림답부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좌원 및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명림답부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연나부는 왕비족으로 부상하였고, 계루부와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고국천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은 연나부 출신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묘소

명림답부는 179년 9월 113세에 죽었다. 신대왕은 직접 집으로 찾아가 조문했으며, 크게 슬퍼하여 7일 동안 조회를 파하였다. 또한 예를 다하여 질산에 장사지내도록 하고,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20가구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이기백, 「고구려 왕비족고」(『진단 학보』20, 진단 학회,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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