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파소

한자 乙巴素
중문 乙巴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인물|관료
성별 남성
대표관직 국상
출생 시기/일시 미상
활동 시기/일시 191년
몰년 시기/일시 203년
거주|이주지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근처로 추정
정의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재위시 국상(國相)을 역임했던 관료.

가계

유리왕(琉璃王)[재위 B.C.19~A.D.18] 때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자손이나, 기타 구체적인 가계는 전하지 않는다.

개설

을파소고구려국내성(國內城)에 도읍을 두고 있던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 재위시 국상(國相)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2대 유리왕 때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자손으로, 국내성 주변으로 추정되는 서압록곡(西鴨淥谷)의 좌물촌(左勿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야에 묻혀 있던 인재를 고국천왕이 발탁하여 정사를 총괄하는 국상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므로 그와 관련한 상황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당시의 고구려는 5부 귀족의 합의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어, 왕을 정점으로 하는 안정된 통치 질서를 확립하지 못한 단계였다. 고국천왕은 190년∼191년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 연나부(椽那部)의 도전을 제압한 뒤,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기반을 정비하기 위하여 4부에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이에 4부는 안류(晏留)를 추천하였으나, 안류는 다시 을파소를 추천하였다.

고국천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禮)로서 그를 불러 중외대부(中畏大夫)의 벼슬을 내리면서 국정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을파소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낮은 관직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양하였고, 을파소의 의중을 짐작한 왕은 그를 국상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하지만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인척들은 을파소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미워하였다. 이에 왕은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으면 멸족시킨다는 교(敎)를 내려 을파소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를 추천한 안류를 포상하였다.

을파소는 감동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며 상벌을 신중히 시행하였고, 194년(고국천왕 16)에는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후 산상왕 때에도 계속 국상으로 재임하다가 203년(산상왕 7) 8월에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을파소는 기존 지배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국천왕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사회의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노중국, 「고구려국상고 하」(『한국학보』17, 일지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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