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好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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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好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성격 | 인물|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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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성 |
혼인 시기/일시 | 32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32년 |
몰년 시기/일시 | 32년 11월 |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왕자.
대무신왕의 서자인 호동은 용모가 아름다워 대무신왕이 호동(好童)이라 이름을 짓고 사랑했다고 한다. 32년(대무신왕 15년) 4월 호동은 옥저(沃沮) 지역을 유람하다가 낙랑국(樂浪國)의 왕 최리(崔理)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뒤, 낙랑 공주에게 부탁하여 몰래 북과 뿔피리를 없애야만 아내로 삼겠다고 하니, 낙랑 공주는 이 말대로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였다.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청하여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낙랑국을 공격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최리는 자신의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결국 호동은 낙랑국을 멸망시킨 공을 세웠지만 자신의 아내를 잃게 되었다. 다른 기록에는 낙랑을 멸하기 위해 대무신왕이 낙랑왕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인 뒤에 본국으로 보내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해(32년) 11월 대무신왕의 사랑을 받은 호동을 시기하고 혹시 호동이 태자의 지위를 차지할까 두려워한 원비(元妃)가 대무신왕에게 참소를 하였다. 거듭된 원비의 호소에 결국 부왕의 오해를 받게 된 호동은 스스로 자결하여 삶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