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

한자 廣開土王
중문 广开土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인물|군주
성별 남성
출생 시기/일시 374
활동 시기/일시 391
몰년 시기/일시 413
추모 시기/일시 414
출생지 중국 요령성 집안시
묘소|단소 중국 요령성 집안시
정의

고구려 제19대 왕.

가계

아버지는 18대왕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이며, 할아버지는 16대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고국원왕은 백제근초고왕이 고구려평양성을 공격한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활동 사항

광개토왕의 활동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와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 전하고 있다. 양 기사에는 차이가 있는데, 비문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문에 나타난 광개토왕의 최초의 군사 활동은 서기 395년(영락 5년)의 비려(碑麗) 정벌이다. 비려는 요하 상류의 지류인 시라무렌강 유역에 있던 거란[契丹]이다. 비려 정벌 후 광개토왕은 요동의 중심지인 양평(襄平)[지금의 중국요령성 요양] 등을 거쳐 영역을 순수하며 귀환하였다. 비려 정벌과 요동 순수는 요동 일대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군사 행동이었다.

395년(영락 6)에 광개토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58개의 성(城)과 700개의 촌(村)을 공파하고, 한강을 건너 백제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가 정복한 지역인 58성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한강 이북으로 한정하는 견해와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역에 걸친다는 견해, 그리고 임진강·남한강 상류까지 포함하는 견해 등이 있다. 고구려가 신라에 5만 명의 원병을 보냈던 기록을 참고할 때 소백산맥을 넘는 교통로를 확보했어야 하므로 395년(영락 5) 무렵에 한강 중상류 지역은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때는 광개토왕 즉위 초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광개토왕릉비문」의 기록은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백제와의 전쟁 성과를 모아 396년(영락 6)에 일괄 기재하여 광개토왕의 업적을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98년(영락 8)에는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숙신(肅愼)을 정벌하였는데, 숙신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략 중국의 흑룡강성 영안현 북쪽 일대로 추정된다. 399년 백제와 손을 잡은 왜(倭)의 침공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400년(영락 10)에 5만 군대를 보내 왜군을 격파하고 김해에 있는 임나 가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남부 지역으로 진출한 공백을 틈타 후연이 고구려의 700여 리 영역을 탈취하자, 이를 계기로 광개토왕은 반격에 나서 402년 후연의 요충지인 요서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으며, 이후에는 요동의 주요 거점을 거의 장악하였다. 고구려와 후연의 공방전은 407년 풍발(馮跋)의 쿠데타로 모용씨 왕실이 무너지고, 고구려인의 후예인 고운(高雲)이 즉위하면서 그치게 되었다. 비문의 407년(영락 17)의 전투 기사는 일부 글자가 훼손되어 전쟁의 상대국이 확실하지 않으나, 백제 혹은 후연(後燕)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기사를 후연과의 전투 기사로 본다면 후연에 대한 광개토왕의 최후 승리를 장식한 전투가 될 수 있다.

이후 410년(영락 20) 광개토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복속시켰으며, 동부여의 다섯 압로(鴨盧)가 고구려에 귀의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이외에 광개토왕은 평양을 새로운 고구려의 중심 도시로 개발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2차례 평양 지역을 순수하였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 사찰을 창건하였다. 평양 천도를 위한 도시 건설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반 아래 그의 아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 천도를 실시했던 것이다.

묘소

광개토왕의 왕릉으로는 중국요령성 집안시에 소재하고 있는 태왕릉(太王陵)장군총(將軍塚)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며, 어느 무덤이 광개토왕릉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상훈과 추모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리는 광개토왕릉비는 장수왕 3년(414)에 세워졌다. 비문에 새겨진 광개토왕의 정식 묘호(廟號)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외에 중국집안시에서 발견된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에는 ‘국강상 대개토지 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경주의 호우총고분에서 출토된 호우에는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고 하여, 당시에 만들어진 금석문에 전하는 3개의 묘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 盧泰敦,「廣開土王陵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 1992)
  • 李丙燾, 『廣開土王의 雄略』(『韓國古代史硏究』, 1976)
  • 朴時亨,『광개토왕릉비』(1966)
  •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년』 (高句麗硏究會, 1996)
  • 千寬宇, 「광개토왕의 정복활동」(『한국사 시민강좌』3, 일조각, 1988)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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