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한자 箕子
중문 箕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길림성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조선
상세정보
성격 국왕
성별 남성
출생 시기/일시 미상
몰년 시기/일시 미상
묘소|단소 평안남도 평양
사당|배향지 평안남도 평양
정의

은나라에서 조선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전설상의 인물.

개설

기자의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이며, 현재 중국산서성 태곡(太谷)인 기(箕)에 봉해져 기자(箕子)라 한다고 전해진다.

가계

상(商)나라의 28대 군주인 문정(文丁, 혹은 太丁)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라 전한다.

활동 사항

상나라 때 농사와 상업, 예법 등에 능하였으며, 주왕(紂王)의 폭정을 간언하다 유폐되어 비간(比干)·미자(微子)와 함께 상나라 말기 3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그가 봉해진 기(箕) 지역은 상나라 영토 가운데 가장 북쪽이고,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리는 북방 이민족이 강성했던 곳이다. 기자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복속시킨 공을 인정받아 태사(太師)로서 형인 제을(帝乙)을 보좌하며 상나라를 융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을을 이어 즉위한 주왕은 신하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기자는 형인 비간(比干)과 함께 주왕에게 거듭 간언하며 정치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왕이 폭정을 멈추지 않자 사람들은 기자에게 상나라를 떠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기자는 신하된 도리로 왕이 간언을 듣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임금의 악행을 부추기는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고, 머리를 풀어 미친 척을 하며 남의 노비가 되려 하였지만, 주왕은 그를 사로잡아 유폐시켰다.

BC 1046년 주나라 무왕(武王)이 충신을 살해한 주왕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갇혀있던 기자를 풀어주며 정치에 대해 묻자, 하나라 우왕이 정했다는 9가지 정치의 원칙을 전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홍범9주(洪範九疇)’ 또는 ‘기주(箕疇)’이다. 하지만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되기를 거부하며 상나라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죽서기년(竹書紀年)』·『상서(尙書)』·『논어(論語)』 등 선진시대의 문헌에는 기자의 덕과 학문, 인현(仁賢)으로서의 기록이 확인되지만, 조선으로의 동래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기자가 동방으로 옮겨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것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3세기의 『위략(魏略)』과 이를 저본으로 한 『삼국지』 동이전에는 기자 이후 자손이 40여 대에 걸쳐 조선을 다스렸는데, 여러 차례 연나라와 충돌했고 마침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자조선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하여 기자의 동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반면 『구당서(舊唐書)』 고려전에는 고구려에서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과 더불어 기자신(箕子神)을 토착신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음을 전하고 있어 일찍부터 이에 대한 민간에서의 숭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추모

『위략』과 『삼국지』에서의 기자 관련 기록은 고조선의 역사 변천에 관한 전승과 어우러졌다. 이것이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토대로 제시되어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단군을,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기자를 설정함으로서 역사적 유원성으로서의 단군과 함께 문명의 상징성으로 기자를 인식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 기자 인식의 확대는 삼국시대 이후 유교가 정치이념으로서 위치를 확립하게 된 결과의 반영으로 1102년(숙종 7)에는 평양에 기자의 사당이 세워졌고, 1178년(명종 8)에는 기자묘(箕子墓)의 제사를 위한 유향전(油香田) 50결이 배당되어 국가제사에서 기자가 숭배되었다.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으로 동방 유교문화의 시원인 기자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였는데, 신흥세력에 의해 개창된 새 왕조 ‘조선’ 역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정도전(鄭道傳)의 국호제정 경위 설명에서도 확인되듯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기자조선의 계승자를 천명하는 인식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1403년에 편찬된 『동국사략(東國史略)』 이후 기자가 건국했다는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위만조선과 함께 우리 상고사의 삼조선(三朝鮮) 인식 체계의 하나로 사실화되었고, 이후 한(韓)과의 계승관계로 확대되어 뒷날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의 논거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유구한 문명국인 소중화로서 조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문헌
  • 최남선, 「조선사의 기자(箕子)는 지나(支那)의 기자가 아니다」(『육당최남선전집』2)
  • 신채호,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조선사연구초』, 1925)
  • 안재홍, 「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조선상고사감』)
  • 이병도, 「기자조선의 정체와 소위 기자팔조교(箕子八條敎)에 대한 신고찰」(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김정배, 「소위 기자조선과 고고학상의 문제」(『한국민족문화의 기원』, 1973)
  • 천관우, 「기자고(箕子考)」(『동방학지』15, 연세대 동방학연구소, 1974)
  • 박광용,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천」(『한국사론』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0)
  • 한영우, 「고려―조선전기의 기자인식」(『한국문화』3,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2)
  • 윤내현, 「기자신고(箕子新考)」(『한국사연구』41, 한국사연구회, 1983)
  • 한국고대사연구회, 『고조선과 부여의 제문제』(신서원, 1996)
  • 윤용구, 「3세기 이전 중국사서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상」(『한국고대사연구』14, 한국고대사학회, 1998)
  • 김한규, 「기자(箕子)와 한국(韓國)」(『진단학보』92, 진단학회, 2001)
  • 송호정, 「대릉하류역 은주(殷周) 청동예기(靑銅禮器) 사용 집단과 기자조선」( 『한국고대사연구』38, 한국고대사학회, 2005)
  • 박대재, 「기자(箕子) 관련 상주청동기(商周靑銅器) 명문(銘文)과 기자동래설」(『선사와 고대』32, 한국고대학회, 2010)
  • 이정일, 「조선 후기 기자인식에 나타난 유교 문명과 보편성」(『한국사학보』37, 고려사학회, 2009)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