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한자 淵蓋蘇文
중문 渊盖苏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관료|대막리지
성별
활동 시기/일시 642년
활동 시기/일시 644년
활동 시기/일시 662년 정월
몰년 시기/일시 665년
정의

고구려 말기의 태대막리지.

개설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귀족들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 고구려의 실권자가 되었다. 당나라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하여 당 태종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잘 대처하여 승리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 간에 권력 투쟁이 발생했고, 이것이 고구려가 패망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가계

이름은 개금(蓋金) 또는 개금(盖金)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연자유(淵子遊), 아버지는 연태조(淵太祚)이다. 동생은 연정토(淵淨土)이며, 아들로는 연남생(淵男生)·연남건(淵男建)·연남산(淵男産)이 있다.

연개소문의 성을 중국측 기록에서는 ‘천(泉)’, ‘전(錢)’이라 하였다. 이것은 연(淵)이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기 때문에 유사한 뜻을 가진 천으로 표기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당나라의 사서를 참고하였고, 사대적인 인식 때문에 천개소문이라고 하고, 시조가 샘[井] 물[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활동 사항

연개소문[?∼665]은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하였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아버지 모두 막리지(莫離支)였다. 동부(東部)[서부라는 기록도 있다] 대인(大人)이었던 연태조가 죽고,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을 계승하려 할 때 귀족들이 반대하였다. 영류왕이 왕위에 오르고 당나라에 대해 기존의 강경책에서 유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 과정에서 천리장성을 쌓기로 하고, 연개소문이 축성의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 유화책을 지지하는 영류왕과 귀족들은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를 눈치채고 정변을 일으켰다. 642년(영류왕 25)에 평양성의 남쪽 성 밖에서 열병식을 한다고 귀족들을 초청한 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까지 죽였다. 연개소문보장왕을 세운 후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는 연개소문에 반대하여 두 세력 간에 충돌이 생겼다. 그러나 결국은 현 체제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연개소문은 정권을 장악한 후에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당나라와 이미 사신을 교환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승려들이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일도 있었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에게 패배한 나라는 멸망하고 618년에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나라의 고조와 뒤를 이은 당 태종은 고구려와 즉각 전쟁을 벌이는 대신 내부의 안정에 힘쓰고, 고구려·백제·신라 등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과는 유화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622년(영류왕 5)에 두 나라는 고구려나라의 전쟁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포로와 유민들을 상호 교환했으며, 고구려는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리고, 당나라의 직방 낭중인 진대덕(陳大德)이 고구려 내의 산천을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심지어 고구려의 강역을 표사한 봉역도(封域圖)를 바치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서쪽으로 실크로드의 상도를 장악한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북으로는 유목 민족인 돌궐(突厥)을 격파하는 등 동쪽의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최종 준비를 서둘렀다. 반면에 고구려의 상황은 순탄하지 않았다.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 간의 군사 충돌이 빈번하였고,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한강 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 간의 분쟁은 더 격화되어갔다.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부여성에서 요동 반도 남쪽 끝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두 나라는 충돌 직전의 긴장 상태에 있었다.

연개소문은 몽골 초원에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제휴하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전에도 비중을 두었다. 하지만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제안한 우호 관계 요청을 거절하였고, 백제와는 갈등 관계는 아니었지만 동맹 관계는 맺지 못하였다.

당 태종은 644년에 대병력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넌 후, 고구려요동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킨 후 주변의 성들을 차례로 점령해 갔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철수하였다. 연개소문은 사방이 포위되었고, 백제마저 멸망한 상황에서도 고구려의 국정과 군을 지휘하여 방어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662년 정월에 당나라 방효태(龐孝泰) 군대가 배를 타고 상륙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사수(蛇水) 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군대에게 대패하여 궤멸당하였다. 연개소문은 대막리지로서 전쟁을 지휘하면서 당나라의 공격을 방어하였지만, 665년에 죽었다.

그의 사후 고구려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남생(淵男生)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였고, 연남건(淵男建)·연남산(淵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었다. 결국 형제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하여 고구려는 내전에 휩쓸리게 되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연개소문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신채호나 박은식처럼 자주성을 지키고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당서(新唐書)』
  • 이홍직, 「연개소문에 대한 약간의 존의」(『이병도 박사 화갑 기념 논총』, 1956 ; 『한국 고대사의 연구』, 신구 문화사, 1971)
  • 이내옥, 「연개소문의 집권과 도교」(『역사 학보』99·100합집, 역사 학회, 1983)
  • 노태돈, 「연개소문과 김춘추」(『한국사 시민 강좌』5, 1989)
  • 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편, 『역주 한국 고대 금석문』1(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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