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왕

한자 美川王
중문 美川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성별
활동 시기/일시 293년
활동 시기/일시 300년
활동 시기/일시 302년
활동 시기/일시 311년
활동 시기/일시 313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314년
활동 시기/일시 317년
몰년 시기/일시 331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342년(고국원왕 12)
특기 사항 시기/일시 343년
정의

고구려의 제15대 왕.

개설

미천왕은 어린 시절에 여러 경험을 하면서, 국제 질서, 바다의 중요성, 교역의 이익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다. 그래서 국제 질서라는 큰 틀 속에서 남북 동시 전략을 추진하고, 비교적 남진 정책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남쪽에 뿌리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가계

미천왕[?∼331(고국원왕 1)]은 일명 호양왕(好讓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제13대 서천왕(西川王)이고, 아버지는 고추가인 돌고(咄固)이며, 큰아버지가 봉상왕이다. 아들이 고국원왕이다.

활동 사항

293년(봉상왕 2)에 아버지가 형인 봉상왕에 의하여 반역 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하였다. 미천왕은 어린 나이부터 7년 동안 숨어 다니면서 하인, 소금 장수 등을 경험하였다. 300년에 학정을 편 봉상왕이 폐위 당하자, 국상(國相)인 창조리 등에 의하여 제15대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탁월한 감각을 지닌 임금이었다. 중국에서 분열이 시작되는 등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302년에 3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적 8천 여 명을 사로잡아 남쪽인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훗날 낙랑을 공격할 목적으로 평양 지역을 기지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311년에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서안평(西安平)[지금의 단동시]을 점령했다. 이어 313년 10월, 낙랑을 멸망시키고 1,000여 명의 낙랑군을 사로잡았다. 314년에는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하였다. 결국 고구려압록강 하구를 완전하게 장악함으로써 서한만(西韓灣) 등 남북으로 이어진 항로의 경유지와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항구를 획득하였다.

그 후 317년에 이르러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서방과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4세기 초에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가 요동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옴에 따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평주 자사인 최비의 권유에 따라 선비족의 다른 일파인 단부·우문부와 함께 모용부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모용부의 연나라가 국경을 정하게 되자,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319년 고구려의 장군 여노자가 모용부의 군대에 의하여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는 요동을 계속 공격하였다.

미천왕은 중간에 있는 연나라를 압박할 목적으로 화북 지방을 차지한 후조(後趙)에 사신을 파견하고 군수 물자인 호시(楛矢)[싸리대 화살]를 보내면서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이 모든 작업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묘소

미천왕은 331년 재위 32년 만에 죽어 미천원에 장사지냈다. 342년(고국원왕 12)에 전연의 군대가 쳐들어와 미천왕릉을 도굴하고 시신을 탈취해 갔다. 고국원왕은 이듬해 전연에 사신을 보내어 보물 등을 주고 시신을 되찾아오게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자치통감(資治通鑑)』
  • 『진서(晉書)』
  • 노중국, 「고구려 국상고」 下(『한국 학보』17, 일지사, 1979)
  • 김정배, 「안악 3호분 피장자 논쟁에 대하여」(『한국 고대사의 신조류』, 고려 대학교 출판부, 1980)
  • 강선, 「고구려와 전연의 관계에 대한 고찰」(『고구려 발해 연구』11, 고구려 발해 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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