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東臺子 遺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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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东台子遗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성격 | 건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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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동서 약 500m, 남북 약 150m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13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8년 |
현 소재지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원소재지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
동대자 유적은 둘레에 회랑을 돌린 가옥으로 정실[1실과 2실로 구성]과 편방([3실과 4실로 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실의 경우 두 칸의 중간에 남북으로 길고 좁은 통로가 있고, 처마 돌출 부분의 지주(支柱)에 잇대어 복도가 나 있다. 정옥(正屋)의 면적은 동서 길이 35m, 남북 너비 36m이다. 편방의 3실과 4실은 모두 정실과 연결되어 있거나 부속 관계가 있다. 정옥의 회랑과 편방의 복도는 서로 이어져 통하는 형태이다.
동대자 유적은 1963년 도로 개설과 토사 채취로 유적이 상당히 파괴되었으며, 1958년에는 대지의 대부분이 통화∼집안 철도 건설 시에 파괴되어 유적의 일부만이 남았다. 2011년 한국 학자들의 조사 시에는 유적지 일대에 민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동대자 유적의 1실 유물은 대부분 굴뚝 서측의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발견되었다. 모두 대형 토기편으로 실내에서는 철제 솥의 잔편이 발견되었다. 와당은 대부분 처마 아래 초석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2실의 아궁이 부근에 토기편이 있고, 구들 주변과 그 내부에 쇠못과 쇠편이 있으며, 구들의 연결 부분 북쪽에서 절구 1건, 철촉, 토제 가락바퀴, 사족대공도기(四足帶孔陶器) 1건이 출토되었다. 3실에서는 대부분 철기와 토기편 소량이 발견되었다. 4실에서는 토기편, 철제 솥편, 철촉 등이 발견되었다.
동대자 유적은 1914년에 소개된 이후 고구려의 중요 유적으로 주목받았다. 건물의 성격에 대해서는 발굴을 담당했던 길림성 박물관은 고구려의 침실로 추정하였다. 다만 3~4실은 추정하기 힘들다고 파악하였다. 한편 방기동(方起東)은 1실 중앙에 있는 거석(巨石)과 사주(社主)와의 형태상의 유사성과 당시 문헌 기록에 보이는 고국양왕 9년[329]에 왕실의 종묘·사직을 수리했다는 기록과 연관하여 종묘와 사직이라는 견해를 발표했다. 한편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이후 다수의 학자들이 동대자 유적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이 고구려 후기의 특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해 국내성 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하여 고구려 후기의 중요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