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천남생 묘지

한자 泉男生 墓誌
중문 泉男生墓志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비석
크기 지석 약90×90㎝, 뚜껑 약66×66㎝
제작 시기/일시 679년
출토|발굴 시기/일시 1921년 중국 하남성 낙양
현 소장처 하남성 개봉도서관
원소재지 하남성 낙양 회맹진 뇌하촌
출토|발견지 하남성 낙양 회맹진 뇌하촌
정의

고구려 말 권신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장남인 천남생의 묘지석.

개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 최고 권력자 연개소문의 장남이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천남생은 634년(영류왕 17년)에 태어나서 679년(의봉 4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당서(新唐書)』에 천남생의 전(傳)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죽을 때, 그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어수(魚水)와 같이 화목하여 벼슬자리를 다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이미 그의 아들들 사이에는 어떤 불화의 조짐이나 가능성이 있었는지 모른다. 665년(보장왕 24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자인 남생이 그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사후 장남 남생이 정사를 두 아우에게 맡기고 지방의 여러 성진(城鎭)을 순찰하던 중 어떤 자가 남건·남산에게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지위를 뺏을까 염려하여 그대들을 제거하려 하니 먼저 도모하라”고 하였다. 또 어떤 자는 남생에게 “두 아우는 형이 돌아와 정권을 뺏을까 하여 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 한다” 하였다. 이로 인해 형제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남생은 두 아우에게 패해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 원조를 요청하였다. 당은 고구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남생 부자에게 관작을 주는 동시에 계필하력(契苾何力)을 보내 남생을 구원하게 하고 이세적을 주장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형태

천남생 묘지의 제목은 ‘대당 고 특진 천군 묘지(大唐故特進泉君墓誌)’이며 전서(篆書) 3행으로 쓰여 있다.

679년(의봉 4)에 만들어졌으며, 왕덕진(王德眞)이 글을 짓고, 구양통(歐陽通)이 썼다. 1921년 중국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교(北郊)에서 출토되었는데, 지석은 약 90×90㎝, 뚜껑[蓋]은 약 66×66㎝이며, 해서체(楷書體)의 47행(行), 행(行)당 47자(字)이다.

특징

천남생의 묘는 1921년에 도굴된 바 있지만 묘지석의 출토 정황이 명확하지 않아 무덤의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2005년에 낙양시 동쪽 뇌하촌(雷河村)에서 연개소문의 증손자 비(毖), 아들 남생, 손자 헌성(獻誠)의 묘가 동서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천남산의 묘가 있었다.

무덤은 원형으로, 크기는 직경 16m, 높이 6m 정도였으며, 고구려 기와와 당삼채(唐三彩) 등이 출토됐다. 천남생은 원래 연씨(淵氏)였는데, 당나라 고조이연(李淵)의 “연” 자를 피하고자 뜻이 같은 천(泉) 자로 바꾼 것이다. 묘지의 첫머리에는 “대당(大唐)의 고 특진(故特進)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겸 검교우우림군(兼檢校右羽林軍) 장내공봉(仗內供奉)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증병주대도독(贈幷州大都督)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라고 이름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묘지를 지은 이와 글씨를 쓴 이의 신분과 이름을 명기했다. 그런 후에 천남생을 칭송하는 시구를 적었다. 이어서 천남생 가문의 내력과 더불어 증조부부터 아버지 연개소문에 이르는 혈통에 관해 언급하였다. 천남생이 9세가 되어 선인(先人)의 지위에 올라 32세에 대막리지가 될 때까지의 관직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어 연개소문 사후 권력을 잡은 천남생이 국내성을 시찰하던 중 두 동생의 반란으로 기습 공격을 받아 권좌에서 쫓겨난 일과 천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 당에 들어가서 복록을 누렸던 사실, 679년 정월 29일에 병을 얻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46세를 일기로 병사(病死)한 사실이 적혀 있다. 679년[조로(調露) 원년] 12월 26일에 낙양망산(邙山)에 묻혔고, 아들 하위위시경(下衛尉寺卿) 헌성(獻誠)에게 천자의 은택이 미친 사실과 장례 때 천자가 물심양면으로 은혜를 배푼 사실이 적혀 있다. 맨 마지막에는 천남생의 생애를 운문으로 읊조린 명(銘)이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천남생이 9세에 선인부터 시작하여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24세에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하면서 장군(將軍)을 겸직, 28세에 막리지(莫離支)에 삼군 대장군(三軍大將軍), 32세에 태막리지(太莫離支)에 올라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러한 관직 역임 기록은 사서에 보이지 않는 묘지석의 독보적인 내용으로서 고구려 귀족 신분의 관직 여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동시에 기록이 다른 연개소문의 사망 시점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편, 『역주 한국 고대 금석문』1(1992)
  • 길림성 사회 과학원, 『東北史地』(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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