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산 묘지

한자 泉男産 墓誌
중문 泉男産墓志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비석
재질
크기 지(誌) 길이 75×75㎝, 뚜껑 길이 76×76㎝, 지석 두께 4㎝
제작 시기/일시 702년
출토|발굴 시기/일시 1922년
현 소장처 북경대학원 고고학실
원소재지 낙양시 뇌하촌
출토|발견지 중국 하남성 낙양 북망산
정의

고구려 말 권신 연개소문(淵蓋蘇文) 의 셋째 아들인 천남산의 묘지석.

개설

천남산은 원래 연씨(淵氏)였는데, 당나라 고조이연(李淵)의 “연” 자를 피하고자 뜻이 같은 천(泉) 자로 바꾼 것이다. 천남산은 639년(영류왕 22)에 출생했다. 고구려 권신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다. 형은 남생(男生)과 남건(男建)이다. 665년(보장왕 24)에 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자, 남건과 함께 막리지가 된 장형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생을 공격하였으나 남생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唐)계필하력(契苾何力)의 원군에게 저지당했다.

그 뒤 667년 당의 침략을 받고 이듬해 나당 연합군에 패하여 형 남건과 함께 당에 압송되었다. 당에 들어간 후 형 남건은 검주(黔州)에 유배되었으나 남산은 먼저 항복한 이유로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이후의 사실은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그의 이력은 이 묘지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당에서 여러 가지 관직을 역임하다가 최후로 상장군(上將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등에 봉해졌다가 701년[장안 원년(長安元年)]에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이듬해인 702년에 4월 23일에 낙양망산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지는 1922년 낙양에서 출토되어 북경 대학원 고고학실에 소장되었다.

형태

지석은 가로 세로 모두 75㎝이며, 뚜껑[蓋]은 가로 세로 모두 76㎝, 그리고 두께는 4㎝이다. 필체는 정서체(正書體)이며, 뚜껑은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져 있다.

특징

무덤은 1922년에 도굴되었는데, 출토 정황이 명확하지 않아 무덤의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2005년에 천남생과 천남산, 천헌성, 천비(泉毖)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천남산의 묘는 낙양시 동쪽 지역인 뇌하촌(雷河村)에 소재한 천남생 일가의 묘에서 서남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소재하였다.

묘지명의 제목을 “대주(大周)의 고금자광록대부(故金紫光祿大夫) 행영선대장(行營繕大匠) 상호군(上護軍)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라고 하였다. 이어 주인공의 이름과 출신지를 적어 놓은 다음 고구려 건국의 유래를 적었다. 그런 다음 고조부터 증조와 조부 및 아버지의 관직을 서술하고 천남산의 영민한 성품을 기술했다. 천남산의 관직 생활을 기록하였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 당에서 벼슬 생활한 기록이 덧붙여졌다. 나이 63세, 701년 3월 27일에 사택(私宅)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그 해 4월 23일에 낙양현(洛陽縣) 평음향(平陰鄕) 모처에 묻었다는 장례 기록으로 마무리했다. 이상의 지(誌)에 이어 끝으로 운문의 형태로 그의 생애를 칭송하는 명(銘)이 붙여졌다.

의의와 평가

천남산이 당에 들어간 이후의 생애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남산의 이력은 이 묘지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에서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본 묘지가 지닌 의미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역주 한국 고대 금석문』Ⅰ(1992)
  • 길림성 사회 과학원, 『東北史地』(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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