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성곽과 방어 체계는 어떠하였을까

한자 高句麗의 城郭과 防禦 體系는 어떠하였을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개설

고구려라는 국호가 성을 의미하는 ‘구루’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구당서(舊唐書)』 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76개의 성이 있다고 하는데, 2013년 현재까지 알려진 숫자는 크고 작은 것을 합해서 200여 개가 넘는다.

성의 위치

고구려에서는 어떤 지역에 비중을 두면서 성들을 구축하였을까? 건국 초기에는 주로 수도권을 방어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으므로 혼강(渾江) 유역과 압록강(鴨綠江) 중류의 주변 지역, 그리고 수도권을 둘러싼 산악 지방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영토를 확장해 가면서 성 또한 넓은 범위에 구축하였다.

교통 요충지, 생산지, 전술적으로 효율적인 곳을 택하여 축성했다. 주력 전선이 서북 지방이었으므로 고구려 중기 이후의 산성들은 요령성(遼寧省)의 태자하(太子河)·혼하(渾河)·소자하(蘇子河) 등 요하(遼河)를 따라 축조된 것이 많았다. 6대 태조왕(太祖王)은 요서 지방에 무려 10개의 성을 쌓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행정 단위의 성을 쌓은 것이다.

요동 반도에는 대련(大連)의 비사성(卑沙城)을 비롯하여 와방점(瓦房店)의 득리사(得利寺)[용담(龍潭)] 산성, 보란점(普蘭店)의 오고성(吳姑城), 장하(莊河)의 석성(石城) 등 전략적인 큰 성들이 있다. 압록강 하구를 중심으로는 수군이 남만주로 진입하는 것을 방어할 목적으로 압록강과 지류인 애하(靉河)와 혼강[압록강 지류] 유역에 성을 쌓았다. 서안평성(西安平城)·대행성(大行城)·박작성(泊汋城) 등의 강변 방어 체제를 구축했고, 내륙에는 대성인 오골성(烏骨城)을 쌓았다.

또한 평안도와 황해도에 이르는 해안 지역에도 육로와 해로의 전략적인 거점에는 반드시 성을 쌓았다. 길림성(吉林城)은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집안(集安) 일대[혼강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 및 신개하(新開河) 일대]와 두만강 하류에 집중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서해안 일대와 동해안 일대 한강 이남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북한의 고구려 산성은 41개의 성[산성은 33개]이 확인되었다. 그 외 중부 지방[경기·강원·충청]에 21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강에는 이성산성(二聖山城), 몽촌 토성(夢村土城), 아차산(阿且山) 보루(堡壘), 구의동(九宜洞) 보루 등과 하구에는 강화도와 김포 반도의 곳곳에도 성들을 쌓았다.

특히 임진강변의 칠중성(七重城), 호로고루(瓠蘆古壘), 한탄강변의 당포성(唐浦城), 아미성(阿未城) 등처럼 비록 소규모이지만 육군과 수군이 공동 작전을 벌일 수 있는 독특한 보루들을 구축했다. 충청도 내륙 및 금강 유역에도 고구려 산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동몽골 쪽과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 외몽골에도 고구려 산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요동 반도를 비롯하여 고구려 영토의 바다나 섬, 큰 강의 하구에는 해양 방어 체제나 강변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외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전술적인 산성들이 있다.

성의 기능

고구려에서 성은 어떠한 기능을 하였을까? 군사 공간, 정치 공간, 생활 공간, 경제 공간, 문화 공간의 기능을 골고루 담당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가 60여 개의 성에 주와 현을 두어 정치를 했다고 기록하였다. 성이 정치 단위이며 도시임을 보여준다. 국내성(國內城), 평양성(平壤城) 등은 수도이므로 정치적인 기능을 주로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 유목 민족 및 중국 한족과 항상 군사적인 충돌을 하였으므로 군사적 기능을 가진 성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구려 성은 평상시에는 성주와 군인들, 일부 백성들이 거주하면서 행정 공간, 문화 공간의 기능, 즉 도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유사시에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성 안으로 대피하여 전면전을 폈다. 이른바 청야(淸野) 전술이다. 고구려 성은 방어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전진을 위한 거점이었다.

압록강 하구의 오골성(烏骨城)[현재 봉황성]은 둘레가 산으로 15㎞에 달하지만 내부는 평탄해서 1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다. 북한 학자들은 이 성이 북평양이었고, 부수도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요동성(遼東城)은 현재 요양시에 있는 평지성이다. 제1차 방어선인 요하 전선을 담당하는 군사성이면서 부수도에 해당하는 행정 도시였다.

또 하나는 물류의 거점과 자원 확보지로서 경제 공간의 기능을 했다. 국경 근처의 성에서는 외국이나 다른 지역민들과 물자 교류를 하였다. 국내성이나 안시성(安市城)에서는 무기와 고대 화폐가 발견된다. 요동성은 유목 종족과 중국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는 목적과 함께 요동 지배를 확고하게 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하는 거점 기지였으며, 철 등 지하자원을 관리하고 무역을 하는 경제적 거점이었다. 고구려 성은 종교 공간이기도 했다.

중국의 『북사(北史)』에 따르면 성 안에는 고등신(高登神)과 부여신(扶餘神)을 모신 사당인 신묘(神廟)가 있었다. 고등신은 추모[고주몽(高朱蒙)을 가리킴]이고, 부여신은 그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柳花夫人)이다. 『당서』에는 요동성에 ‘주몽사’가 있어서 공방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위급해지면 사람들이 그곳에 달려가서 빌었다는 내용이 있다. 심지어는 여인을 아름답게 치장해서 사당에 들여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성의 구조

고구려 성은 종류가 일정하지는 않지만 역할과 기능에 따라 대체로 궁성·도성·읍성, 그리고 산성·행성·장성·차단성 등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 수도를 방어하는 도성 체제나 대성을 방어할 때는 ‘평지성과 산성’의 짝 구조로 되어있다. 평지에 성을 쌓을 경우에는 반드시 주변의 험악하고 전술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해서 산성을 쌓아 전쟁 시에 대비했다. 협공 작전도 중요하지만 일종의 피난성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고성자성오녀 산성’, ‘국내성환도 산성’, ‘안학궁(安鶴宮)과 대성산성(大城山城)’, ‘성자산성과 하룡 고성[연길]’ 이 있다. 차단성은 집안 외곽의 관마 산성, 망파령 산성, 패왕조 산성 등이 있고, 장성은 요동 반도의 천리장성과 연변장성(延邊長城), 압록강 하구의 대행성이 있다.

성의 형태

고구려 산성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로봉형이라고 한다. 포곡형(包谷形)이라고도 하는데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 능선과 골짜기 그리고 때때로 절벽들을 이용하여 허약하고 부실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돋아 올려 보축하였다. 곳곳에 문을 만들어 놓았고, 대체로 정문에 해당하는 골짜기들이 모인 곳에는 견고하게 방어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이러한 곳은 물이 풍부하여 장기 농성전을 펼칠 수가 있다. 환도산성(丸都山城) 등 정책적인 성들은 대부분 고로봉식 산성이다.

또한 말안장처럼 2개의 봉우리를 둘러싼 말안장형[마안형(馬鞍形)]이 있다. 집안 북쪽인 유화현에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은 고로봉형과 마안형이 복합된 구조이다. 또 정상의 8부 능선을 둥글게 돌아가면서 쌓은 테뫼식(鉢卷式) 산성이 있는데, 초소나 소규모 병사가 지키는 전술적인 산성이다. 소수의 군대가 정찰 임무나 전술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소규모로 만든 보루도 있다. 자연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큰 규모로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성을 함께 붙인 양성 체제도 있다. 소수의 규모로 적을 방어할 수 없는 곳에는 방어벽으로 쌓은 차단성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시설을 '관애(關隘)'라고 부르고 있다. 관마(關馬) 산성(山城) , 망파령(望波嶺) 산성, 그리고 패왕조(覇王朝) 산성 등이 있다. 또한 해안가에는 해양 방어 체제, 강가에는 강변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요동 반도 해안의 섬에는 섬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다.

성의 시설물

성은 크기에 따라 분류한다. 대형 산성은 둘레 2㎞ 이상으로 설정하고, 중형 산성은 둘레 1∼2㎞, 그리고 소형 산성은 둘레 0.2∼1㎞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재료에 따라서 석성 토성, 토석성, 토석 혼축성, 책성(柵城) 등으로 구분한다. 사용된 돌은 일반적으로 화강암을 사용했으나 산지에 따라서 석회암을 쓴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나통 산성백암성이다. 성벽은 양 겉으로는 잘 다듬은 돌로 쌓았고, 내부에는 조그만 자갈돌들 혹은 부서진 돌들을 채워 넣는 형식을 취했다. 사용한 돌은 한 쪽 부분이 개 이빨처럼 모가 난 견치석[설형석]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토목 공학적으로 안정성을 확보하고, 미의식을 고려하여 퇴물림 양식을 사용했으며, 큰 치의 경우에는 굽도리 양식을 사용하였다.

고구려 성은 전체적으로 구조뿐만 아니라 과학적이고 복잡하게 설계하여 방어 시설을 치밀하게 만들어 놓았다. 평지성은 쌓기에도 노력과 공력이 덜 들어가고 생활하기에도 편리하지만 상대적으로 방어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몇 가지 구조물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해자이다. 성 둘레를 폭이 넓고 깊게 도랑을 파서 그대로 놓아 두거나 또는 물을 채워서 적의 공격을 1차로 저지했다. 물론 계곡물이나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따로 파지 않고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또한 가장 취약한 곳이며 성안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곳에 만든 성문에도 특별한 시설물을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문은 옹성(甕城) 구조이다. 두개의 벽이 만난 곳을 엇갈리게 해서 서로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게 한 다음에 양 벽이 만나는 그 속에다 문을 해 달았다.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가면 굴곡이 심한 S자형이나 항아리 모양을 이루고 심지어는 겹성으로 만들기도 한다. 적군이 이러한 성문을 통과하려면 정면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국내성과 환도산성, 대성산성(大城山城) 등에 나타난다.

치(雉)[馬面]는 평평한 성벽의 곳곳에 적을 공격하는 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성의 일부를 네모로 돌출시켜서 만든 시설물이다. 즉 방어군은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대성산성에는 치가 69개가 있는데 치 사이의 간격은 평균 109m이다. 화살의 유효 사거리를 염두에 두고 그 간격을 정한 것이다. 국내성의 북벽 서벽에 흔적이 남아 있고, 백암성은 현재 5개가 남아 있으며, 장하(莊河)의 석성(石城)에도 있다.

성에는 적대(敵臺)가 있다. 이것은 성문 가까운 양쪽에 성벽과 같은 너비와 높이를 돌출시킨 망대(望臺)이다. 성문에 다가오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키는 시설물이다. 이 두 시설은 성 위에서 시계(視界)와 사계(射界)를 넓히고 화살의 발사 각도를 최소 각도로 좁히게 하였다.

각루(角樓)가 있다. 이것은 성의 모서리를 지키는 시설로 성내의 전투를 지휘하는 보조 지휘소 역할을 한다. 국내성(國內城)요동성(遼東城)의 경우처럼 네모난 성곽은 성의 모서리에 직접 세우거나, 치와 마찬가지로 성벽 밖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만들기도 하였다. 각루 역시 전투 지휘와 성의 위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다. 점장대는 성 외부는 물론이고, 성 내부 전체를 관찰하고 지휘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두었는데, 때로는 최후까지 항전하는 장소의 역할도 하였다.

여장(女牆)(雉堞)이 있는데 이것은 성벽 위에 설치한 사격대로 치첩(雉堞)[성가퀴]이라고도 부르거니와 성벽 위에 몸을 숨기고 접근하는 적을 사격하는 시설물로 치(마면)의 상층부에 대개 요철(凹凸)모양을 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물 저장고인 연못이다. 고구려가 장기 농성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이 연못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오녀 산성천지(天池), 용담산성의 용담, 환도산성의 음마지(飮馬池), 대성산성의 100개의 연못이 그것이다. 물의 중요성은 사료에서 확인된다. 대무신왕 때인 AD 28년에 적들은 환도산성을 포위한 채 물이 떨어져서 항복하기를 성 바깥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수초에 싼 잉어를 보내자 성 안에 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 철수했다.

그 외에도 암문(暗門)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비밀 통로로서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두었다가, 필요시에는 통로로 사용했다. 이 암문은 성의 규모에 따라 달랐으며, 암문으로 통하는 성벽 안에는 대체로 군대의 비밀 집결 장소로서 활용하는 공지가 있다. 이러한 암문 외에 배수구로서의 수구문이 따로 있다.

성의 구축 체제

고구려는 성 방어 체제를 주로 어떠한 방식 또는 시스템으로 구축했을까? 북한 학계는 분포한 지역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3중 체제라는 해석을 내렸다. 요하(遼河) 일대에 구축된 전연 방어성[기본 방어성]을 축으로 하고, 수도인 집안(集安)에 이르는 중간 지역[태자하(太子河) 상류와 소자하(蘇子河) 일대]에 중심 방어성[중간 방어성]과 수도 방어를 위한 최종 방어성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전체 틀 속에서 국경에서부터 수도권까지의 거리를 몇 개의 구획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성이 도시 기능도 겸하고 있으므로 군사적으로 효율성을 누리면서도 다른 역할도 겸할 수 있도록 전략과 전술뿐만 아니라 도시 구조 이론과 지정학적·지경학적·지문화적 특성, 풍수 이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으며, 단일 성 중심이 아니라 여러 성의 체계와 맥락 속에서 구축했다. 대성인 중심성을 쌓고, 주변에는 방어 전략에 맞게 크고 작은 성들, 즉 중간성들을 배치시킨다. 그 주변에는 고유한 기능을 갖춘 차단성 장성 초소 등의 위성들을 세운다. 모든 성들이 공동의 생존 구조를 가진 독특한 시스템이다.

이러한 유기적 시스템으로 최소의 전력과 화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을 최대한 고려하여 풍수에 맞게 능선과 깊고 얕은 계곡 등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면서 편안한 느낌이 들게 건설하였다. 현실적 기능과 미학적 아름다움, 성스런 의미[이념]등을 배합 조화시켰으며, 자유 의지와 강한 공동체 질서를 구현한 장소이다. 고구려의 산성 양식은 백제를 거쳐 신라는 물론이며 일본 열도까지 전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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