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한자 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중문 青山里战斗纪念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청산리 대첩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
관련인물 김좌진, 홍범도
크기 높이 17.60m, 넓이 25m
건립 시기/일시 2001년 8월 31일
현 소재지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산림장 입구
원소재지 현재의 위치에서
정의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개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일대에서 홍범도의 연합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이 일본군을 섬멸한 백운평(白雲坪) 전투를 비롯한 10여 차례 전투를 통틀어 말한다.

1920년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에 돌입하였다. 김좌진을 비롯한 북로 군정서군은 21일 아침 백운평 고지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 시각 일본군은 이도구(二道溝) 완루구(完樓溝)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 측면에서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 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한 북로 군정서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坪)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어랑촌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 알렸다. 공격을 예상한 북로 군정서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 군정서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 부대 등 약 1,500명이 총 동원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10월 24일에는 북로 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天寶山) 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10월 25일에는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미 독립군은 공격을 대비해 매복 중이었다. 독립군은 즉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건립 경위

2001년 청산리 전투 80주년을 맞던 해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수건 위원회에서 국가 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다.

위치

백두산으로 가는 관광객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청산리 전투 현장의 초입인 길림성 화룡현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세웠다. 원래의 ‘청산리 항일 전적 기념비’가 있던 산의 7부 능선에 세웠다.

형태

5,000㎡의 부지에 세워진 높이 17.60m, 너비는 25m 화강암 비석이다. 앞면에는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란 문구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들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 넣었고, 뒷면에는 건립 취지문과 건립 경위를 밝힌 글을 새겨 넣었다.

금석문

앞면 :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뒷면 :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해내외를 진감한 청산리 항일 대첩은 항일 투쟁사상 천고에 빛날 력사적 전역이어늘 1920년 10월 21 26일 김좌진홍범도가 통솔하는 항일 연합 부대는 화룡시 2 3도구에서 연변 각 민족 주민의 대폭적 지원 하에 협동 작전으로 백운평와록구어랑촌874 고지고동하반 전투 등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 침략군을 섬멸하였거늘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 전과는 연변 내지 동북 지역 반일 무장 투쟁사상 새로운 시편을 엮음은 물론, 조선 인민의 반일 민족 독립운동을 추동한 력사로서 청사에 새겨졌어라.

청산리 대첩은 ‘일군 무적’ 의 신화를 깨뜨리고 연변 내지 전국 각 민족 인민의 항일 투지를 지대히 고무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위풍을 추풍 락엽처럼 쓸어버렸거늘, 그 실패를 달가와 않은 일본 침략군은 연변 지역 무고한 백성에 대하여 차례로 2,600명을 참살한 보복의 ‘경신년 대학살’을 감행하였은즉 그 죄 하늘에 사무치고 그 참상에 치가 떨리는도다.

청산리 대첩 80 주년에 즈음하여 연변 지역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렬들의 충혼을 기리고 위업을 천추 만대에 전하노라.

경신년 대참안 중 조난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 중 피 흘려 분전하신 항일 열렬들이여, 영생불멸하라!

연변 각 민족 인민 삼가 드림

2001년 8월 31일 준공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건립문」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 정부와 화룡시 인민 정부의 령도하에 주내 여러 민족 인민들의 공동한 노력에 의하여 오늘 여기에 세워지게 되었다.

5,000 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메터 60센치로 된 이 기념탑은 연변 건축 설계원에서 설계하고 화룡시 태달 건축 유한 공사에서 시공하였다.

이 기념비 수건 중 연변 국제 공공 관계 협회와 연변 해외문제연구소가 일상 사업을 주최하고 처리하였다.

우리는 각계 인사들의 여러 면으로 되는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특히 한국광복회의 정성어린 지지를 받았다. 이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연변 여러 민족 인민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수건 위원회

2001년 8월 31일

현황

원래 ‘청산리 항일 전적 기념비’가 있던 산의 7부 능선[청산리 대첩 전적지 입구]에 세워져 있다. 2009년 화룡시 문화 체육국의 주관으로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기념비 보수뿐만 아니라 전시관, 주차장, 화장실, 주변 조경 등의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산리 전투는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역시 무장 독립 투쟁을 기념하는 대표적인 사적지가 되어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주용·박환·조재곤·한시준·한철호, 『국외 항일 유적지』(『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59,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9)
  • 독립 기념관, 『2012년 사적지 관리 기관 조사 보고서』(미공개 자료, 2012)
  • 황민호·홍선표, 『3·1 운동 직후 무장 투쟁과 외교 활동』(『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2,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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