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 참변 장암동 참안지

한자 庚申 慘變 獐岩洞 慘案地
중문 庚申惨变獐岩洞惨案遗址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성진 동명 3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경신 참변에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한 합동 묘소
관리자 용정 3·13 기념 사업회
조성|건립 시기/일시 1920년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9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현 소재지 길림성 용정시 동성진 동명촌 제4대 뒷산 200m 지점
원소재지 연길현 장암동
정의

1920년 일제가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한인들을 학살했던 장암동(獐巖洞) 참변의 발생 공간.

개설

1920년 10월 30일 밤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장 대강융구가 인솔하는 77명의 병력이 용정촌 동북 25㎞ 지점에 위치한 한인 기독교 마을 장암동을 포위하여 습격하였다. 일본군은 마을의 모든 주민들을 기독교 교회 내에 집결시킨 후 40대 이상의 남자 33명을 포박하여 꿇어앉힌 후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다행히 불속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있었으나 일본군의 창칼에 의해 살해되었다.

건립 경위

일본군의 학살이 있은 후 마을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희생자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하지만 5~6일 후 일본군들이 다시 들어와 무덤을 파헤쳐 모으게 한 후 다시 불을 질러버렸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마을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시체들을 모아 마을 뒤 언덕에 합장했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에서 1999년 ‘장암동 참안 유지’라는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체계적인 조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위치

용정시 동성진에서 장암동 참안지가 있는 동명 3대까지는 약 5㎞ 떨어져 있다. 포장 도로지만 폭이 좁아 중대형 관광 버스가 진입하기 어렵다. 동명 3대까지 간 뒤에는 다시 묘소까지 700m 정도 올라가야 한다. 더군다나 이 길은 아직 포장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접근이 더욱 어렵다.

형태

33인을 합장한 묘지는 일반 묘지보다 큰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그 앞에 방형 모양인 ‘장암동 참안 유지(獐巖洞慘案遺址)’라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1920년 10월 ‘경신 대토벌’때 일본 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용정 3·13 기념사업회

1999년 6월 30일”

현황

비석은 장암동 교회 터에서 약 200m 앞에 설치되어 있다. 한국의 초동 교회신익호 목사를 비롯한 신도들의 후원에 의해 세워졌다. 2010년에는 묘역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진행되어 묘소 단장과 묘역 주변에 철장을 세워 가축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른바 ‘경신 참변’은 돌발 상황이 아니라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에서 알 수 있듯이 면밀하게 계획된 학살이었다. 장암동 참안지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적지이다.

참고문헌
  • 김철수, 『연변 항일 사적지 연구』(연변인민출판사, 2001)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조사 보고서』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11)
  • 박환, 『박환 교수의 만주 지역 한인 유적 답사기』(국학 자료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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